아시안 여성으로 외국에서 살아가기: 난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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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여성으로 외국에서 살아가기: 난이도 ★★★★★

드류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지난 달, 친구가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놀러 왔다. 나는 2인실 기숙사에 살지만 방에 룸메이트가 아예 들어오질 않아 많은 친구들을 재워주곤 했는데, 영국에서 건너온 친구 역시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가기로 되어 있었다. 역에서 집으로 가는 길, 교환학생들로 추정되는 무리가 저 멀리서 시끌벅적하게 다가왔다. 또 어딘가 다같이 놀러가는구나, 생각하며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무리 중 한 남자애가 크게 '곤니찌와!!!'하고 소리치고 몇 명이 그에 와르르 웃으며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이다. 워낙 사람이 많았기에 바로 뒤돌아 봤는데도 누가 소리를 질렀는진 알 방법이 없었다. 곧바로 한국어로 크게 욕을 했고 황당해서 한참을 쳐다봤지만 그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도,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에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다 보면 이와 같은 '인사'는 자주 마주하는 편이다. 니하오, 곤니찌와, 오하요, 그리고 기타 알아들을 수 없는 아시아 인사들. (안녕도 가끔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은 철저히 내가 모르는 사람들, 길거리의 아무개가 하던 말이어서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물론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한나절 후면 잊어버릴 수 있는 정도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완전한 타인이 아니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교환학생 무리. 어쩌면 내 옆집, 아랫집, 같은 동 기숙사에 살 지도 모르는 아무개가 아닌 아무개. 같은 수업을 들을지도 모르는 누군가.

충격이 컸다. 그리고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스페인, 좋다고. 놀러오라고 친구에게 한 말들이 무색하게 내 얼굴은 돌덩이마냥 굳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 상황과 나의 입장에 대한 글을 페이스북에 영문으로 작성해서 타임라인과 기숙사 그룹에 업데이트했다. 많은 덧글이 달렸다. 그 중 한 명의 댓글은 이랬다: 한국이 '존중/존경'을 중시하는 문화인 것은 알고 있다. 나도 아시안 친구가 많이 있다. 그냥 무시해라.

이 상황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지나칠 수가 없어서 쓴 글이었다. 한국인이어서 일본 인사를 들은 것이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다. 존경에 대한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맥락이었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런 인사는 매우 무례한 것 아닌가? 유럽에서는 길거리에 누군가가 프랑스인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초면에 '봉쥬르'하고 낄낄거리며 인사하는 것이 문화인가? 그저 나를 신기한 아시안, 혹은 동물원 원숭이로 보지 말고 (보더라도 티 좀 내지 말고) 너와 같은 하나의 사람으로 봐 달라는 글이었다.

그리고 오늘, 서양인 여자친구와 외출을 했다. 통과의례답게 오늘도 '곤니찌와'라는 말을 들었다. 언제나 기분 나쁜 낄낄거림은 함께다. 같이 걷고 있던 친구는 이전의 상황을 페이스북 글로 접해 직접 덧글까지 남겼던 적이 있기에 한번에 사태파악을 하고 내 눈치를 살폈다. 어렴풋이나마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것 같은 친구는 사실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었다. 그 무리가 지나가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냥 '재미'일걸? 너무 신경쓰지 마. 나중에 내 옆에 동양인들(한국인이었다)이 앉자, 나에게 말했다: 옆사람들에게 '곤니찌와'라고 해봐!

이런 날들을 수십 번 보냈다. 낯선 달이 뜰 때면 속으로는 몇 번이고 울었다.

유럽에서 아시안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뱃머리에 지지대 하나 없이 풍파를 온 몸으로 맞고도 끄떡없어야 하는 것과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니하오, 곤니찌와를 듣는 것은 숨 쉬듯이 겪는 일상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 보자면? 사람들은 나를 70년대 서커스에서 탈출한 아시안을 보듯 쳐다본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2017년. 어딜 가든 여전히 일방적이고 불쾌한 그 인사를 듣는다. 애초에 답장을 바라지 않는 인사다. (여담이지만 단 한 명도 안 빼놓고 이런 인사를 한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들은 내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재밌어한다. 즐거워한다. 우리와는 달리 감정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라고 한다. 무반응이라면? 아시안(여성)들은 역시 감정이 없어, 도도한 척 해, 라고 한다. 즉 아시안 혹은 아시안 여성들은 '특이하게', 그리고 '이국적으로' 생겼기 때문에, 주목당하는 것에 이어 부정적인 특징들로만 범주화를 당한다. 어떤 개인의 외양, 행동과 표정이 아시안 여성이라는 특징을 거쳐 부정적으로 읽힌다. 그 범주화에 저항하면 쓸데없이 ‘예민한’ 존재가 된다. 너 왜 그렇게 예민해?

애초에, '니하오 가해자'는 아시안 여성을 자신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저 장난이라고 ​여겨지는 행동들의 바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국적이지만 자신보다 약한 개체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도 되고 (무슨 동물 대 동물이야?), 마치 사람처럼 감정은 있지만 혹시라도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놀려도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자. 아시안이어도 마동석같은 덩치와 인상이었으면 (마동석 씨 정말로 좋아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쉽고 가볍게, 비웃음을 섞어 곤니찌와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쉬이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거리에서만 그런가?

어쩌다 보니 듣는 수업들 중에 경제 수업을 제외하고는 아시안이 한 명도 없다. 덕분에 매 수업 나는 아시아의 대표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특히 교수님들은 매번 내게 묻는다: '너의 나라'는 어때?, '동양'은 어때?, '너희'도 그러니? 이 질문을 들을 때 마다, 이 수업에서 나는 인종적 '타자'로 분리된다. 다른 유럽 친구들에게는 어떤 주제에 대해 국가명 그 자체로 물어본다면(그리스는 어때?) 나에게는 대부분 '너의 나라', '너희'라는 이름으로 질문을 한다. 사실상 동양 문화권 전체에 대한 질문들이다.

문제는 내가 중국과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수님들은 사례를 들 때 중국이나 일본 이야기가 나오면 나를 쳐다보며 말하고, 나에게 무언가를 묻는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몇십 명의 동급생들이 다같이 나를 쳐다본다. 그럼 나는 무엇이든 말을 해야한다는 의무를 느끼고, 스스로의 무지에 자괴감을 느낀다.

더 큰 문제는 내가 동남아시아권 문화에 대해서도 굉장히 무지하다는 것인데, 사실 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왤까? 교수님들이 '아시아'라고 하면 대부분 동북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는 아시아로도 잘 쳐주지 않는 것이다. 사각지대 안의 또 다른 사각지대라고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인들은 실제로 종종 중동계나 아랍계로 '퉁'쳐지곤 한다. 이렇게 ‘그들’이 정의하는 아시안과 실제 아시안은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다. 중앙 아시아는 어떤가? 우리에게도 다소 낯설다. 몽골,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인도, 이란, 중국(!),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파키스탄이 이 지역에 속한다. 스타워즈의 '보디' 역 배우 리즈 아메드(파키스탄계 영국인)가 본인을 '아시안'이라고 소개하면 상대방이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는 일화처럼 우리에게조차 사실 '아시안'의 정확한 정의와 구분은 불명확하다.

이뿐인가? 나는 클래스 안 다양성을 부여하는 '수단'이다. 50명이 넘는 수업에 나는 단 한 명의 동북아시안이다. 교수님은 클래스 내 인종적 다양성은 굉장히 중요하고 당신의 수업에는 다양성이 존재해 기쁘다고 말하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영혼 없이 미소짓는다. 없는 것보다 낫다지만, 1/50이라는 비율이 과연 수업의 인종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그 안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 그저 존재 자체로 다양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 피상적인 다양성이 무슨 소용인가?

누군가가 말했다. 아시안 여성은 사실 <스타워즈>의 BB-8같은 존재가 아니냐고. 

귀엽지. 귀엽고 빠릿빠릿한데 사람은 아닌 거. 그러니까 '우리' 말 하는 존재는 아닌 거. '나'와는 다른 존재.

모르는 외국인에게 귀여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 순간 스스로를 '작고 귀여운 동양 여자애'라고 소위 말해 모에화, 대상화하는 것에 끊임없이 싸워 왔다. 그렇게 난리를 쳐도 어떤 남자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넌 정말 귀엽네, 라고 반복하고 말하곤 했다.

BB-8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고 싶다. 분명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다. 눈 앞에 숨 쉬고 있는 어엿한 인간인데, 당최 보이지가 않는다. 우리는 차별당할 때만 보인다. 차별당하지 않을 때는 공기처럼 투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숨쉬듯이 차별당한다. 그러니까 투명한데, 투명하지가 않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는 경찰에 의해 중국인이 '감히 덤빈다고’ 죽었다. 한 미국인이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에어비앤비 숙소를 면전에서 당일취소당했다. 눈바람 부는 날이었다. 그리고 동양인 남성 승객을 그야말로 바닥에 내리쳐서 질질 끌고 나간 유나이티드 항공 사건이 있었다. 더 끔찍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온갖 패러디였다. 미국 온갖 유명 TV쇼에서 이를 패러디했다. 그 누구도 피해자의 존엄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좋아하던 장르의 백인 남자 영화감독은 이를 패러디한 레고 이미지를 첨부해 '정말 재밌네'라고 (본인 말에 따르면) 소위 풍자적인 트윗을 남겼다. 그 감독 트윗의 답글에는 진심으로 이가 즐겁고 재밌어 죽겠다는 사람이 한 트럭 있었다. 이 사건에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의 ‘글렌’의 최후 장면(스포) 혹은 배우 ‘스티븐 연’(한국계 미국인)의 사진을 합성해서 밈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은 어디까지 잔인해지고, 엉망진창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일들이 연달아 있었다. 사실 내가 겪는 일들은 이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가벼운 일들이다. 일상적으로 나는 니하오와 곤니찌와를 듣는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그들은 몇 차례고 더 낄낄대며 묻는다. 스쳐 지나가며 묻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답을 할 때까지 들러붙는 사람도 있다. 파리를 걷는데, 길거리의 거지들이 깜짝 놀래킨다고 나를 껴안으려는 시늉을 한다. 모로코에 여행을 갔는데, 로컬 시장을 가니까 거짓말이 아니라 1분에 다섯 번 니하오와 곤니찌와를 듣는다. 내 입장에서는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인데,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시선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고 원숭이를 보고 돌 던지듯 인사를 던진다. 기차를 타면 모두가 빤히 쳐다본다. 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도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고, 지나가는 어른들도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떤 아이는 기차를 타고 가는 몇 시간 내내 나에게 '치노(Chino, 중국인)'이라고 속삭였고, 아무런 반응이 없자 '띵호아'라고 속삭였다. 그 애의 일행인 젊은 남자들은 그저 낄낄 웃기만 한다.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호텔에 들어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술취한 백인 남자가 오늘 뭐 하냐고, 기겁한 내 얼굴을 보고 낄낄거리며 좋은 밤 보내라고 한다. 식당에 가는데 지나가는 차가 굳이 창을 내리면서까지 니하오와 곤니찌와라고 우리에게 소리를 지른다. 식당에 가면 진실처럼 보이는 호의와 함께 니하오를 듣는다. 니하오 아니라고 하니까 오하요, 라고 한다. 또 다른 식당에서는 나이 스무 살은 차이날 것 같은 웨이터가 나에게 번호를 묻는다. 싫다고 해도, 나는 내일이면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연락할 수 있지 않나며 듣지를 않는다. 모자와 안경을 쓰고 밥을 먹고 있는데 나에게 한국인 아니냐며 자신과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여자 아이도 있었다. 이유를 묻자 잘 대답하지 못한다. 미안하지만 싫다고 거절했더니 단지 ‘사진 한 장’ 아니냐고 한다.

어때. 가벼운가? 

이런 일들이 혼재하는 21세기에서 어떤 정신머리와 가치관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누군가는 아시안(처럼) 생겨서 나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하거나 조롱한다. 나를 조롱하는 듯한 시선과 가볍게 여기는 언어들은아시안 여성이 아니었으면 겪지 않았을 일이다. 아시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거나, 이 정도까지는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이다. 그렇기에 이는 인종차별이다.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재수 없어서, 운이 없어서 걸려든 것 같은가? 그럼에도 과연,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는가? 이번엔 운이 나쁘지 않아 예외였다고 해도, 다음에도, 그리고 그 다음에도 러시안 룰렛에 모든 것을 배팅하고 이 모든 것들을 모른 척 할 것인가? 니하오와 곤니찌와를 아무 표정 없이 지나치며 스스로 나는 작고 귀여운 동양 여자애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는 단순한 장난이니 매 순간 모르는 척 넘어가고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인 것처럼 나 역시 지나가는 순간 잊을 수 있는가?

당연히 잊을 수가 없다.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적 폭력이다. 폭력까지는 아니다, 그저 인사다, 괜찮다, 무시해라, 장난이다, 라고 말하는 모든 말들은 위에서 서술한 사건사고 사례들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는 아시안 혐오 범죄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기여하게 된다.

아시안을 때려죽여야 아시안 혐오 사회인가? 결국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도 친절한 사람은 당연히 있다. 잘 해주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하루에 세 명이면 충분하다. 세 번의 인종차별적 인사는 좋은 기분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새롭게 터지는 인종차별적 사건들도 한 몫한다. 호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것, 기분 나쁜데 다들 그저 네가 참으라고 하는 것,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미묘하게 불편을 느끼는 것은 모두 스스로에게도 지겨운 일이다. '유럽은(바르셀로나는) 아시안 혐오 사회'라고 말하면 우린 너를, 아시안을 혐오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낯짝 두꺼운 인간들이 너무 많다. 여성 혐오 사회 한국에서 '난 여자 좋아하는데?',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별 다를 바 없다.

'난 아시안 차별 안 하는데?'

'난 아시안 차별 안 하는데?', '난 아시안 친구 많은데?', '난 아시안 여자친구 있는데?', '난 스시 좋아하는데?'이런 말들을 보고 듣고 겪다 보면 차라리 하나만 하라고, 아니 차라리 BB-8같은 존재로 봐 주면 안되겠냐고 싶을 때도 있다. BB-8에게 그런 인사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동양에서 온 어떤 하나의 신기한 '존재'로 보니까. 그래서 스스로, '나는 사람이다, 존엄성을 가지고 생존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외양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되고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다.' 이런 말들을 되뇌이지 않으면 정말 힘들 때가 있다. 내가 정말 2등시민이고 열등한 존재인 건 아닐까, 라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내 정체성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많다.

사족.

치노, 팅호아라고 속삭이던 그 애는 특히나 비열했다. 흑인 꼬맹이였다. 뭐라고 할 틈도 주지 않고 계속 나에게 치노, 팅호아, 치노, 팅호아, 이런 말들을 반복했다. 마치 니하오, 곤니찌와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서슴없이 차별적 발언을 하며 좌석 옆을 휙 지나갔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같은 기차를 탔고 그 애는 한 번 보고 안녕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있는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그 애가 한 말들은 수백 개의 돌덩이가 되어 나를 자꾸 눌렀고 정말이지 점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의 몇 시간에 걸친 폭력이었다. 그리고 계속된 차별에 나는 지쳐 있었고, 무력했다. 멍청해 보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 어떤 방어기제도 행할 수 없었고 그 애를 저지할 수 없었다. 바닥 없이 깊은 물 속에 가라앉는 비참함이었다.

그 소년을 말없이 저지한 건 어떤 덩치 큰 흑인 승무원 아저씨였다. 누군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 아저씨는 몇 분정도 옆 좌석에 묵묵히 앉아 있다가 떠났다. 나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저씨 덕분에 그 애가 더 이상 근처에 오지 않는 걸 보고 몰래 울었다. 돌덩이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더이상 가라앉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아저씨인데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긴장이 풀려 속으로는 더 펑펑 울었다.

문득 그 승무원 아저씨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아저씨는 그냥 우연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저씨가 앉아있던 몇 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한 위안이 되었고, 소수자로서 계속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와 박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비록 그 아저씨 덩치를 반으로 줄인 크기의 아시안 여성이지만. 아저씨가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던 것처럼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면. 작게나마 위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나가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작은 힘이 된다면. 그렇다면 이제는 결코 이런 사회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기차 안의 일을 반복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여기 아시안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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