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13.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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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줍는 시 13.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일상의 투쟁

지난 일요일 오후, 나는 지하철 맨 끝 칸의 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 옆에는 한 아주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곧 한 할아버지가 아주머니 옆으로 탔다. 졸던 아주머니는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 앉았는데 그 할아버지가 내 옆으로 붙어와 탔다. 나는 그렇구나, 하고 그저 멍을 때리고 있었다. 약 2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할아버지로부터 어떤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할아버지의 등산화를 보고, 운동을 하고 오셔서 몸에서 열이 나시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리곤 계속 느껴지는 꽤 심한 열기에 나는 혹 몸이 아프신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좀 걱정이 되어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성기를 주무르며 자위를 하고 있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 욕을 한 후에 곧바로 스스로를 탓했다. 졸던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겼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할아버지가 내 옆으로 와 붙어 앉았던 데 역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무방비함과 순진함을 탓해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성기를 감싸 쥔 손을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할아버지는 시선을 피하는 등 눈치를 보면서도 두 손을 바지춤에서 떼지 않았다. 곧 다리를 떨고 발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할아버지에게 눈빛을 쏘다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할아버지를 보고 싱긋 웃어준 뒤 열차에서 내렸다. 지하철을 빠져나오며 역무실에 전화를 걸어 신고를 했다. “네 자위하고 있었어요. 네. 바지입고요.”

트위터에 욕 몇 마디 적어 올린 후, 모든 것을 잊겠다고 다짐하며 학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 세 명을 가르쳤다. 수업 중 아이들은 말 끝마다 ‘~기모띠’를 붙였고, ‘애무’ 등 성적인 단어들을 내게 말하며 즐거워했다. 수업을 계속 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들은 여성 혐오적인 장난을 계속 했다. 학원 수업이 모두 끝나고 원장 선생님이 “아이들이 장난은 많이 쳐도, 해야 할 공부는 열심히 하지요?”하고 웃었다. 나는 “아니요. 오늘은 한계였어요.”라고 말하고 학원을 나왔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중간에 내려 자전거를 대여했다.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화를 삭히려고 노력했다.

진실로 일상은 투쟁인가

일상은 투쟁이다. 오랫동안 가슴에 그 말을 품고, 일상에서 마주했던 폭력들에 맞서 싸워왔다. 그런데 이쯤되니 의문이 든다. 진실로 일상은 투쟁인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기만 하는 투쟁도 있는 것인가. 나는 ‘일상은 투쟁이다.’라는 말 속에서 계속 싸워 나가겠다는 의지와, 그로부터 꿈꾸어 보는 승리에 대한 희망을 본다. 그리고 내 가슴에 품었던 ‘일상은 투쟁이다.’라는 말 속에서 과거의 의지와 희망이 사라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아무리 지쳐도 아무리 패배해도, 가만히 길을 걷다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얻어 맞는 사건은 인생에서 끝도 없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무척 화나게 만든다. 끔찍한 일들로 나의 일상과 삶의 서사가 구성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억울해도, 나쁜 일들과 나쁜 사람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시간 낭비처럼 여겨져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일어나고 그것은 나를 화나게 한다.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정한아의 시집을 읽고 나는 기쁨에 차서 웃었다. 정한아는 시집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터넷에서 한 차례 회자되었던, 최고로 멋지고 재미있는 <시인의 말>을 살펴보자.

언니, 배고파?/……아니./졸려?/……아니./그럼 내가 만화책 빌려 올 테니까, 그때까지 자살하지 말고 있어!//띠동갑 동생은 잠옷 바람으로 눈길을 걸어/아직 망하지 않은 만화대여점에 가서/『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빌려 왔다./우리는 방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봤다./눈이 아하하하하하 쏟아졌다.//그 후 20년, 이 만화는 아직도 연재가 안 끝났다. 그건 그렇고,//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2018년 봄//정한아

그렇다, 이 시집은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바치는 책이다. 정한아의 언어는 오랫동안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싸워 온 사람의 단단하고 유연하며 날렵한 몸 같다. 그녀의 언어는 우리를 꺾어버리려는 그들의 급소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지속적으로 힘겹게 싸워 온 사람의 내부란 복잡하게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간의 싸움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예민해졌으며 더 능수능란 해졌는 가. 또 그간의 싸움으로 우리는 얼마나 깊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원망하였으며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왔는 가. 정한아의 언어 그녀의 몸에는 매서운 감각과 유쾌한 능청 뿐 아니라, 자기에 대한 끝도 없는 의심과 밝은 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피해의식 그리고 자책감과 죄책감까지 잔뜩 새겨져 있다. 물론 피로감과 무력감 그리고 약간의 우울 역시 그곳에 있다.

놀랍게도 정한아는 이 모든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하고 되묻는 것 같다. 삶은 계속되고 나쁜 일들은 끝도 없이 일어난다. 계속 살아가는 한 계속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싸움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 역시 일상은 투쟁이지만, 이때 그녀는 승리를 가슴에 품고 희망을 말하는 투사가 아니라, 몸에서 피가 쏟아지니까 그 피에 맞서 싸워 나가는 투사이다. 그녀는 미학과 정치, 예술과 윤리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뿐이다.

싸움은 불가피하다

오늘 소개할 시편 <PMS>는 또 얼마나 멋진가. PMS 때는 정말 무진장 화가 난다. “아니, 이런 짓은 바람직하지 않지 팔십 년대처럼/시에 대고 화를 내는 건 어쩐지 졸렬한 일 하지만/오늘은 PMS인걸 마그네슘도 트립토판도 도움이 안 된/다, 이를테면” 몸이 붓고 유방이 아프고 아랫배가 뻐끈하고 두통이 밀려오는데 이게 당연한 자연의 순리란다. 그 얘기를 들으면 더 화가 난다. “당연한 것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순/리인/너무 오래 돈 지구의 무의식—쉬고 싶어/하던 대로 하고 있지만 쉬고 싶다 지구는 생리 전이다/내일은/어디에서 피가 터질지 모른다 정치도 미학도 위안이/안 된다” 가끔은 너무 화가 나서 PMS 때문에 내가 미쳐 날뛰게 되는 것인지, 원래 내가 미쳐 날뛰는 인간인데 PMS 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정한아의 시는 무척 길다. 그녀는 말도 많고 화도 많은 타입.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녀는 생리 전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무척 길다. 우리는 말도 많고 화도 많은 타입. 아니, 그래서 뭐 어쩌라고? 몸에서 피가 쏟아지는 우리에게 싸움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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