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12.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다문학

다시 줍는 시 12.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두 이야기

친구 넷이 모여 ‘사라진 것들’에 대해 말을 나누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늘 또 슬리퍼를 사야 되네.” 1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어느 날 문득 퇴근해서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갈아 신으려고 보면 슬리퍼가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한때 나도 시계가 자꾸 사라져서 힘들었거든.” 7이 1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7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1은 7의 등을 토닥여준다. “분명히 전날 밤 퇴근할 때 끼고 왔던 장갑이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려고 찾으면 없는 거야.” 장갑이라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 아니냐고 친구들은 말하고, 5는 자신이 장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장갑이 저절로 ‘사라진 것’이라고 말한다. 잠자코 있던 9는 입을 열고 말한다. “나는 냉장고가 사라진 적도 있어.” 9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냉장고는 그냥 그 자리에서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진 거야.”

겨울이 시작된 어떤 날 저녁 6시 무렵, 한 여자가 며칠 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버스를 타자 마자 잠에 빠지고 만다. “눈을 떠보니 버스 기사가 여자를 툭툭 치고 있었다.” 이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버스 차창 밖 밀가루 같은 흰 눈이 내리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여자는 오늘 만나기로 했던 P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버스기사는 종점에서 여자를 깨우고, 여자는 놀라 일어나지만 곧 다시 잠에 빠진다. 결국 여자와 P는 만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이 따뜻한 버스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자는 생각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두운 하늘에서 흰 것이 마구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런 밤이 처음이 아닌 것 같았다. 반복되는 꿈 속에 있는 것처럼”

죽음, 그 뒤

위의 두 이야기는 『흑면백면』(눈치우기 총서03, 2017)이라는 잡지에 실린 강성은의 산문이다. <사라진다는 것>, <겨울 이야기>. 두 이야기는 기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멀지 않다. 어느 날 집에서 물건이 사라지는 일이나, 겨울 밤 따뜻한 곳에서 잠이 쏟아져내려 곤란했던 일. 첫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런 문장들이 흘러 나온다. “그날 밤 9는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냉장고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사라지는 건 죽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사물의 수명은 인간과 같을까, 다를까. 9가 아는 세계의 모든 것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9도, 9의 친구들도 아무도 모르는 채로.” 사라지는 건 죽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또 잠에 꾸벅 빠지는 건 죽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강성은의 두 가지 이야기는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잠깐의 죽음과 그 죽음 뒤에 나의 영혼이 조금 밀려나는 것 같은 아주 고독하고 유일한 느낌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세상과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나의 영혼이 조금 밀려나는 그 순간, 우리에게 쏟아지는 어떤 느낌이란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당신은 어떨 때 외로움을 느낄까. 나는 간 밤에 무섭고 이상한 꿈을 잔뜩 꾸고 일어나 이불보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나쁜 꿈이 분명하게 내 영혼을 조금 밀어냈으나 그 느낌에 대해 오롯이 나만 알고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또 고단하고 피로한 삶으로 사랑이나 믿음이 죽어 나가는 어떤 날, 나의 마음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서 그림자가 평소보다 조금 더 짧아진 것 같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

나 너무 외로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게는 “나 너무 외로워.”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스스로가 작고 쓸쓸하며 별 것 아닌 존재임을 백 번 알고 있는데도, 내 입으로 그 말을 뱉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 다른 사람들이 외롭다고 고백하는 말들에는 진심 어린 걱정을 건네면서도, 나의 입으로 외롭다고 고백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겁이 난다. 수치스럽고 쪽팔린다. 이렇게 입 꾹 다물고 하나도 외롭지 않은 척 살아갈 때, 내 인생의 외로움은 배가 된다. 아, 이렇게 속상하고 비참한 기분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겠구나, 말해봤자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또 말하기에는 역시 너무 창피해.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 가득 차 처연하게 밤거리를 걸어 다닌다. “아, 이 마음을 대체 누가 알까.” 뱉으면서 말이다. 

이번에 핀치에서 소개하는 강성은의 시편 <환상의 빛>에는 아주 외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꾸벅하고 잠에 빠진 나는 꿈 속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본다.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할머니를 보고 많은 눈물을 흘린다, 아마 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찻잔의 차가 흘러 넘치듯 나의 눈물이 흘러 넘쳐, 꿈 속의 모든 것들이 떠내려갈 것 같다. 가만히 매실을 담그던 할머니가 내 아픈 배를 살살 문질러주듯,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나를 햇볕에 가지런히 말린다. 슬픔과 눈물로 나의 영혼이 조금씩 밀려날 때, 나에게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은 할머니의 존재다. 할머니가 나의 슬픔을 알아주었다는 생각과, 그런 할머니가 이제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슬퍼서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나는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한 것들은 죽거나 사라져버린다. 마치 나의 외할머니처럼.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꿈에서 깨어나 눈물을 참는 내 앞으로, 꿈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빛이 내려온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나는 이불보에 앉아 그 빛을 바라본다.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그 빛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 나에게는 또 다시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온다.

사랑해서 슬프고 그리워해서 아프다

강성은의 시편 <환상의 빛>은 사라지는 일과 잠에 빠지는 일과 죽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이다. 꿈 속에서 시인은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을 만난다. 사랑하고 그리워했기에 시인은 그 사람을 만나 반갑고 기쁜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슬프고 아픈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픈 배를 문질러주듯,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은 시인의 아프고 슬픈 마음을 햇볕에 말려 준다. 

그러나 시인은 알고 있다. 꿈과 사람은 사라지고 자신은 혼자 남게 되리라는 것을. 긴 잠에서 깨어난 시인은 가만히 눈물을 참으며, 꿈을 넘어 현실로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질 순간을 상상하며 외로움 안에 담긴다. “아 이 마음을 대체 누가 알까.” 어느 날 새벽 길을 걸으며 작은 한숨과 함께 뱉었던 그 말에 대한 응답처럼, 시인의 삶에 오목히 담겨있던 슬픔과 외로움은 빛처럼 흘러 우리에게로 온다. “저 눈이 녹으면 흰빛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영혼에 그 빛이 조금씩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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