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의 시 읽기 5. 최승자, <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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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의 시 읽기 5. 최승자, <구토>

[웹진 쪽] 희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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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1999년에 나온 시집 『연인들』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집이 절판된 지 오래여서 여기에 묶인 시들이 그리 활발히 회자되지는 않았어요. 이 시 역시 낯설게 느껴질 테고요.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그 시집에 실린 시 중 과반이 연애에 관한 것이지만, 연애관계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덧없음과 회의와 한숨이 주를 이룬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전부인 건 아니에요. 맥없는 한숨 속의 곳곳에 뼈를 숨겨놓는 것이 최승자 시인의 특기이기도 한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역시 마찬가지죠.

특히 이 시 「구토」의 뼈는 꽤나 단단하고 뾰족한 듯 느껴져요. 어조 자체도 강하고요. “죽여 버”려야 한다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올 정도로요. 첫 연에서는 이 세계 전반의 부조리에 대한 환멸 때문에 신을 죽여 버려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두 번째 연에서는 ‘창세기’로 대표되는 인간의 역사에서 결박되고 고통받는 여성 서사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작자를 죽이겠다 다짐하죠.

일러스트 이민

구조와 진행에 묶여
신음하는 여자

“창세기라는 이름의 소설, 아니면 영화 속에서/그 구조와 진행에 묶여 신음하던 여자가/그 스토리 밖으로 가볍게 빠져나온다.”가 2연의 첫 대목이에요. 성경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띕니다. 화석처럼 기록된 역사의 뒷면에는 늘 기록하는 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막강한 손끝들과 차가운 펜촉. 그 막강한 힘에 의해 여성의 이름은 대부분 삭제되거나, 편의적으로 쓰였다가 버려지기 일쑤였어요.최승자 시인은 성경의 ‘서사’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구조와 진행에 묶여 신음하는 여자”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 구조와 진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남성 가부장 중심의 이 사회 속에서 여성은 늘 남성을 거들거나 남성의 도구가 되면서 그 주변을 맴도는 존재가 되어야 했어요. 성공한 여성이란 성공한 남성 옆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여성을 뜻했고요. 아주 드물게 예외가 있긴 했지만, 그 예외조차도 역사의 페이지 위에 기록되는 일은 잘 없었죠. “구조와 진행”을 주무르는 남성이라는, 사회적 ‘절대자’의 손에 의해 올가미가 씌워진 여성은 그 올가미를 벗지 못한 채 신음만을 되풀이해야 했어요.

물론 2연의 말미에 가서 시적 화자는 그렇게 올가미를 씌운 작자가 도대체 누구냐며, 그를 “죽여 버려야”겠다고 말해요. 그런데 그 ‘죽임’은 여성인 ‘나’의 구원과 해방을 위한 것만은 아니에요. 내가 “그 안의 한 고통스런 배역으로 존재하기 싫”기도 하지만, “내 모든 형제들도 탈출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를 죽여야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여성 해방이 단지 여성을 위한 해방만이 아니고, 남성을 얽어매고 있는 그 숱한 정신적/실질적 맨박스(Man-Box)로부터의 해방 또한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시 안의 이런 언급은 의미가 있는 듯해요. 수천 년을 이어져온 이 고리타분한 서사의 작자를 죽임으로써 그 속에서 고통받았던 여성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러스트 이민

용서를
말할 수밖에 없는

하지만 3연에서 시인은 그만 한숨 속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마는 듯해요. 시 속에 다른 목소리를 등장시키면서 말이죠. "이봐, 그것도 꿈이야. 꿈에서/아무리 죽인들 무슨 소용이야, 그저 그 꿈을/용서하는 게 최상이지, 용서가 가장/완벽하게 빠져나오는 길이야."라는 목소리. 싸움의 대상과 싸움의 목적을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싸움을 구체화시키려는 어떤 시도가, 3연에 가서 ‘용서’라는 이름 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이런 진행을 바라보며, 얼어붙은 듯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물론 이런 식의 결말은 1연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해요. 이 세계를 뒤엎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세계를 만든 하나의 신을 죽이는 것인데, 신은 없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싸움의 대상, 싸움의 실체를 잃어버린 거죠.

‘용서’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한숨을 이해할 것도 같아요. 이 세계의 부조리와 불평등이 얼마나 강력하고 확고부동한지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생을 통해 알아버렸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이 세계의 문제를 자각한 일부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을 거예요. 각자도생밖에는 살 길이 없음이 판명된 이 사회에서의 해방이라는 건 각자의 정신수양에 달려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시간 누군가는 시인의 한숨, 혹은 우리의 이런 깊은 한숨을 반기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깊은 한숨을 쉬면서, 싸울 힘을 잃어가는 것, 이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질문의 화살이 스스로에게 겨눠지는 것을요. 이건 모두 돈이 없고 가진 게 없는 나의 잘못이야, 장애를 갖고 태어난 나의 잘못이고, 여성으로 태어난 나의 잘못이야, 가만히 있어야 하고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데 나대면서 돌아다닌 내 잘못이라니까.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 시를 하나의 질문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한숨 쉬는 나 좀 봐줄래? 용서만 하는 내 모습 어때? 보기 좋아? 이렇게 계속 착하게 살면 될까? 당신도 그렇게 살 거야? 하는 질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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