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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크게 소리 내어 말하다 : 29일 두 번째 검은 시위 열려

지난 29일 오후 두 시 종로의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아래 검은 시위)가 열렸다.

지난 9월, 보건복지부는 모자보건법 제14조 제1항을 위반하는 인공임신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하며 이를 시술한 의사의 처벌 기준을 1개월에서 최대 12개월까지 강화한 ‘의료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는 여성들, 의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당 개정안을 현행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상태다.

주최측 추산 약 500명이 참여한 검은 시위에서는 다양한 여성들이 한목소리로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다양한 의견을 성토했다.

02:00 PM
시위 시작 및 발언

검은 시위의 시작과 함께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발언 #1. ‘강남역 10번출구’ 왕클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갖기 위한 상황들을 생각해 봤다. 아이를 가질 것인가? 갖지 않을 거라면 어떻게 피임을 해야 하지? 남편에게 정관수술 하라고 해야 하나? 싫다고 몸이 안 좋아진다고 하면 어떡하나? 아이를 몇 명 낳지? 터울은 조절할 수 있나? 기를 수 있나? 내 경제적 상황은?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으면 내 경력은? 회사에서 출산 휴가 주나? 육아휴직 주나? 남편한테도 주나? 육아휴직 받고 1년 쉬고 회사 나가면 아이는 누가 봐주지 친정? 시댁? 어린이집은 지금부터 예약? 돌잔치는 집에서 하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고 출산을 해도, 육아라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돌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나의, 부부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동네가 나서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동네가 나서야 하는 출산에 대해, 여성에게 일단 낳으라고만 말한다.

여성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지 않아야 하고 임신 이후 벌어지는 일에는 누구의 강요도, 간섭도 없어야 한다. 출산과 양육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는 이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아니다. 우리에게 강요와 의무만 주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는 함께 싸우겠다.

발언 #2. ‘건강과 대안’ 윤정원 의사 

정부는 생명과 도덕을 말하기 전에 이 시대 젊은이들의 건강을 이야기해야 한다. 정부에게 태어나지 않은 자의 생명과 도덕을 말할 자격은 없다.

법이 정해진대로 수술만 하겠다는 의사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의사는 돈 주면 수술을 하고 돈 안 주면 수술을 안 하는 테크니션이 아니다.나는 모든 인간의 재생산권을 지지 하는 의사로서, 여성은 임신을 지속할지 중지할지를 결정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안정과 건강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나왔다.

생명권과 선택권이 대립된다고들 이야기 하지만 일단 ‘선택’이 선택이 아닌 상황이다. 임신중절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상황에서나 선택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국에서 임신 중절은 비상구다. 하지만 지난 20년 간 다양한 나라에서 합법적이고 안전한 인공 유산을 실시하면서 산모의 사망률이 20~50% 줄어들었다. 미국에서는 73년에 임신 중절이 합법이 된 이후 산모의 사망률이 6분의 1로 줄었다.

보건복지부가 앞장서서 루마니아 정국을 만들셈인가? 여성건강을 위협하는 보건부야말로 비도덕적이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줄이기 위해서 피임과 성교육도 필요하지만 정부는 책임 방기할 뿐이다. 피임을 강조하면 출산율이 떨어지니까. 청소년의 성행위를 조장한다고 피임 교육을 교과 과정에서 빼라는게 정부다.

즐거운 마음으로 낙태를 하러 오는 여성은 없다. 무엇이 자기에게 옳을지 선택한 17만명이 매년 수술대에 오른다. 나는 의대 교육 과정이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공부하며 일하고 있다. 약물적 임신중절이나, 소파수술이 아닌 흡입술이 자궁에 더 안전하다는 것 등을. 더 안전한 중절 방법이 현행법상 불법이라 의대 교육과정에서 이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지도 않고, 안전 낙태약물은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발언 #3 

나는 낙태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임신, 출산, 양육. 여성이 모든 책임을 진다. 그러면 남자는? 남자가 돈 벌어 오니 상관 없다고 하는데, 여성이 언제 그러랬나? 여자도 일할 수 있다. 남자도 집안일할 수 있다. 고정된 게 아닌데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항상 육아와 가사는 여성의 몫이다.

고용노동부에서 전업주부의 노동의 댓가를 월 450만원으로 추정했다. 그만큼 가사노동은 중노동이다. 남성이 나가서 돈 번다고 하지만 정당한 댓가를 받는다면 여성이 더 많이 받는 게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가사노동을 하는 여성은 ‘집에서 밥 쳐먹고 하는 일이 뭐냐’ 같은 소리나 듣고 있다. 이게 평등한가?

‘콘돔은 기분 안 좋으니까 안 낄래. 네가 피임하면 되잖아.’

그 무책임한 말에 얼마나 많은 여성이 눈물을 쏟았는가. 완전하지도, 몸에 좋지도 않은 약이 피임약이지만 여성의 건강은 고려되지 않는다. 왜 막대한 책임을 우리만 감당해야 하나? 남자는 책임을 안 져도 아무도 모른다.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모자보건법’을 봐라. 아빠는 빠져 있다. 왜 여성의 일을 남자와 국가가 결정하고 책임을 강요하나? 임산부 배려석 앉은 여성 찍어 올리면서 질싸 인증녀 타령하는데 누가 임신하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힘들게 산다. 얼마 전에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나 가진 거 알았을 때 어땠어? 한 번도 후회 안했어?’ 엄마는 애를 키우는 존재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애만 보면 끝도 아니고 집안일 다 하면 내가 없어지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삶을 없애는 걸 국가가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가? 옳지 않다. 내가 지금까지 우울한 얘기 했는데, 시 하나 낭송하고 끝내겠다.

제목: 성역할 / 김지원

임신도 여자몫

피임도 여자몫

낙태도 여자몫

육아도 뭐도 다 여자몫

하지만 오, 단 한 가지 남성의 몫이 있네

그것은 바로 오르가즘.

02:41PM 행진 시작

자유 발언 시간이 마무리되고, 검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최측의 안내를 따라 도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거리 행진의 구호와 노래는 다음과 같았다.

-구호-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정부는 나대지 말고 낙태죄를 폐지하라

연대는 우리의 힘 낙태죄를 폐지하라

-노래-

덮어놓고 낳다보면 나는 인생 개망해

덮어놓고 낳다보면 나는 경력단절녀

몸상하는 것도 비난 받는 것도 모두 나

나도 사람이란다

낙태죄를 폐지하라*4

곧 승리하리라

03:30PM
두 번째 자유 발언

발언 #4 

여아나 장애아 등 태어날 가치가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를 앞장서서 선별한 것은 국가였다. 공익이라는 명분으로 생명을 선택하는 일을 자행해 왔다. 그러면서 여성의 몸은 항상 통제당해 왔다. 여성은 빼 놓고, 의료 권력과 젠더권력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국가가 모여 공모하고 있다. 낙태죄는 여성에게만 묻고 통제 과정에 개입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은 지운다. 여성의 몸은 생산 도구, 인구 통제를 위한 억제 도구 혹은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사람을 만들어 낼 도구가 아니다.

더 이상 여성의 경험을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임신과 출산은 성교육에서부터 파트너와의 관계까지 모든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것이지, 여자 혼자 진공상태에서 임신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선택의 여지를 가지지 못했다. 책임을 진건 항상 여성이었다. 빈곤한 여성은 깔창으로 생리대를 만들고, 장애 여성은 점자 표시가 없는 임신 테스트기로 자신의 임신 사실을 가려내야만 했다.

그동안 여성의 몸에 많은 폭력이 지나갔다. 많은 여성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일상적 통제, 규범화된 폭력과 낙인을 우리의 행동으로 지우고 있다. 책임 있는 정부라면 이를 잘 듣고 공론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허용리스트’를 늘려달라고 요청하는게 아니다. 여성의 권리를 허용과 비허용의 대상으로 나누는 것을 거부한다. 권력과 일상의 민낯을 드러내고 여성의 경험을 드러내며 투쟁해 나가자.

발언 #5 

얘기를 듣고, 처음엔 진짜 기가 차더라. 입안자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그들은 여성들이 이렇게 반발할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여성의 임신 중절 결정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그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게 반갑고 소중하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하게 한건 국가다.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이 임신하면 상사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경력단절이 되면 좋은 일자리를 주긴 하나 ? 비정규직도 감지덕지라고들 한다. 그래서 안 낳으면 이기적이고 잘난 맛에 사는 못 돼먹은 여자가 된다. 사회적 문제의 맥락은 전부 사라진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구나 생각했다. 정부의 낙태 단속 물리치고 낙태죄 철폐하는 싸움을 해 나가자.

발언 #6 

그들에게 묻고 싶다. 무엇에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갓 스무살이 된 겨울,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했을 때 우연히 임신을 하게 되었다. 임신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내 몸과 몸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검사 결과를 받자마자 반드시 애를 낳아서 죽을 때까지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기 아빠의 무관심 속에 전쟁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단 한차례도 나와 함께 병원을 가지 않았고, 10원 한 장도 주지 않았다. 전화를 하면 피씨방이니까 끊으라고 화를 내는 것이 다 였다.

나는 스스로 내 손발을 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착하고 예쁜 사람일 수 없는 나를 원망했다. 몇 번이고 자살하려고 했다. 그래서, 다시 묻고 싶다. 무엇에 반대하고 계신건지. 그분들이 가볍게 입에 올린 양심은 누가 만든 것인건지? 내 고통이나 내 꼬리표는 자연의 섭리가 아닌 사람이 만든 연극이었다. 그것은 나의 삶이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웃으면서 존재하고 있다. 살고 싶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이 말을 하기 위해 큰 용기 냈다. 감사하다.

발언 #7. 연세대학교 ‘와이낫페미’ 홍현재

낙태죄를 두고 '아기의 생명을 위해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나는 은사님 부탁으로 베이비시터 일을 하고 있다. 1년 가까이 아이들을 돌보며 느낀 것은 준비되지 않은 임신에 대해 '낙태하지 말고 낳아 키우라는 말'은 희대의 개소리라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장난이 아니다.

아기는 태어나고 몇 개월간 몸을 뒤집지 못한다. 걸핏하면 날카로운 것을 입에 넣는다. 때문에 아기는 누군가가 항상 옆에서 돌봐야 한다. 아이 식사와, 장난감 정리, 아이 옷 빨래 등 어마어마한 가사노동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육과 정서 안정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아기의 생명을 위해 낙태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누구를 위한 선택인가? 아기를 위한 것도 산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낙태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죄다.

발언 #8 

당당하게 발언하고 싶어서 쓰고 있던 두건을 내렸다. 나는 그 날 강남역에 가지 않아 살아남은 수많은 여성 중 하나다. 또, 셀 수 없이 많은 성폭력의 생존자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내가 운이 좋아서임을 안다. 공중화장실은 최대한 안 가고. 일상적 성희롱을 견뎌내야만 하는 그 모든 어려움. 이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21년이 걸렸다.

이 당연한 사실을 내게 알려준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여성분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성이었다. 우리는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해도 된다고. 이처럼 현명하고 용기있는 여성들이 왜 자신의 몸에 대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나? 소수자의 삶을 살아보지도, 그럴 수도, 필요도 없는 남자들이 왜 여성의 몸을 결정하나?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남성이 시혜적으로 베풀거나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성의 몸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행위다. 여성은 이에 대해 남성의 비위를 맞춰가며 고분고분하게 말해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의 방향을 선택할 권리가 없다. 임신과 출산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여러분은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지금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다.

발언 #9 

나는 고등학교 청소년이다. 나에게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한번은 엄마와 대화 중 이런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만약 내 언니가 남자였다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내가 태어난 것은 할머니가 남자를 낳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문에 페미니즘을 접하고 내 삶을 다시 돌아봤다. 어디선가 나도 성희롱을 당했고 또 누군가는 이 시간에도 계속 성희롱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낙태에 관한 책도 읽어보게 되었다. 책에는 낙태를 합법화 하든 말든 낙태율을 비슷하다고, 다만 비합법화시 여성들의 임신 중절이 더욱 위험해질 뿐이라고 나와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임신을 했다면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안 해줘서? 아직도 나는 콘돔을 어디서 파는지 모른다. 나중에 남자친구가 생겨서 제가 성관계를 맺고 싶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약국에 가서 콘돔을 사려고 하면 어떤 시선이 돌아올까? 나는 그 시선이 두렵다.

발언 #10. ‘페미당당’ 심미섭 대표

페미당당의 심미섭이다. 우리는 이번에 연대 집회를 주최하고, 외국 페미니스트와 소통하는 역할을 했다. 어떤 메시지가 오고 갔는지, 외국 상황이 어떤지 전하기 위해 나왔다.

페미당당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체다. 왜 이런 단체가 낙태죄 폐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말하려고 한다. 우리 이전 세대의 페미니스트를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한다. ‘호주제 폐지를 전리품으로 얻어냈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페미니스트가 얻고 싶은 전리품은 무엇인가? 바로 낙태죄 폐지라고 생각했다. 낙태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앗아가는 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활동가에게서 ‘우리가 처음 검은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너희가 한국에서 이런걸 하고 있다는데 정말이냐’는 메시지가 왔다. 폴란드, 뿐 아니라 멕시코, 아르헨티나에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일랜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혜원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꼭 나누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일랜드에서 체류 중인 혜원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지긋지긋한 한국의 여성혐오 문화를 온몸으로 겪었습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사회부적응 딱지를 얻어가며 싸우고 저항하다가 "혜원씨는 가만 보면 참 한국사람 같지 않아.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잘 살겠어." 소리를 듣고 나서 삼십대 중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마침내 어학 연수를 결정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한국사회' 란 뭘까요? 이런 한국사회에 적응한 삶이란 도대체 어떤 삶일까요? 저는 정말 무섭고, 화가 났습니다.

기왕 겪어본다면 유럽의 국가로 가자고 마음먹고 온 곳이 바로 아일랜드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여성' 이 아닌 '사람' 대접 을 받고자 온 이곳에서도 저는 또 다른 여성혐오를 마주해야 했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로, 교회가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장악하고 있는 곳, 섹스는 더럽고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가르치며,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거의 200년 이상의 세월에 거쳐 '몸을 버린 여자들' 에게 거처를 제공한다는 명목 아래 '막달레나 세탁소' 라는 이름의 수용소를 운영하며 3만 명이 넘는 여성을 가두고 학대한 곳, 1980년까지 여성들의 피임법에 대한 접근마저 법으로 금지해온 곳,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철저히 국가와 종교에 의해 감시당해온 곳이 바로 제가 공부하고 있는 유럽의 국가, 아일랜드 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임신중절수술은 1983년 전면적으로 불법화 되었습니다. 근친, 치명적인 태아의 이상, 심지어는 강간 당한 경우마저도 낙태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낙태 시술을 받을 경우 의사와 여성들은 최고 1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습니다. 한 해 3,400여 명의 아일랜드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이웃 나라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이곳 활동가들과 함께 본 다큐멘터리에서 영국의 한 의사가 말했습니다. 임신중절 시술을 받으러 온 많은 여성들 중에, 유독 아일랜드의 여성들만 병원에서 눈물을 흘린다구요. 다른 여성들은 모두 임신 중절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에 당당한 반면, 아일랜드 여성들만 유독 이 선택에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성들에게 이런 죄책감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 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결정 때문에 국가에 의해, 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의 생명권은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반면, 이를 위해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삶과 생명이 위협에 놓여야 한다면 국가와 법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최근 아르헨티나에서는 16살 여성이 납치, 살해된 이후 "한 명도 잃을 수 없다" 고 외치며, 젠더폭력에 맞서 수천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브라질에서는 10대 소녀가 집단 성폭행을 당한 동영상이 퍼진 이후 '강간문화' 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항의 시위를 이끌었으며, 폴란드에서는 낙태를 전면 금지화 하려는 정부에 맞서 여성들이 '검은 시위' 를 조직해 파업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성평등 지수로 세계 1위인 아이슬란드에서도 여성 직장인들이 남자보다 18% 임금을 덜 받는 것에 항의해 일터를 일찍 떠나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이곳, 아일랜드에서는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한 야만적인 the 8th amendment에 대한 폐지를 외치며 지금도 수많은 여성들이 캠페인과 시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에 와서 이곳의 여성들과 함께 싸우며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여성은 전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여성이라는 것, 여성혐오는 단지 한국, 아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며 전세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어디에서 새롭게 삶을 꾸린다 하더라도, 저는 여성이며, 앞으로 평생 이 지독한 혐오와 맞서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먼 곳에 와서야 저는 마침내 제가 그토록 끔찍해하며 도망치고 싶었던 나라에 다시 돌아가 현실을 마주하고 싸워나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싸울 때, 저는 결코 혼자가 아닐 것임을 확신합니다.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 여성들과 함께 뜨거운 지지를 보냅니다.

My body, my choice!

Keep abortion safe and legal!

Repeal the 8th!

 

취재 / 김지호

사진 / 문소영, 김지호

2016.10.31 19:16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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