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타고 불법을 넘어서 여성의 권리를 지키다

알다임신중단권

파도를 타고 불법을 넘어서 여성의 권리를 지키다

느티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1999년, 몇 명의 여성들이 네덜란드에서 아일랜드로 향하는 배를 띄웠다. 네덜란드는 1984년 부터 임신 21주 이내의 모든 인공유산이 합법화되었고, 아일랜드는 가톨릭 국가로 낙태가 금지되어 있었다. 국제법상 어느 한 나라에 속하지 않은 공해(公海)에서는 그 선박이 등록된 나라의 법을 적용받는다. 배를 띄운 여성들은 이 원칙에 착안해 낙태가 금지된 나라의 여성들이 인공유산을 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시술이 필요한 여성들을 네덜란드 소속 선박에 태워 공해상으로 나오게 되면 네덜란드 법을 적용 받으니 그 안에서 이루어진 인공유산 또한 합법인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이라고 칭했다.

건강과 대안,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서는 7월 5일과 6일에 걸쳐 ‘파도 위의 여성들’의 설립자 레베카 곰퍼츠를 초청했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고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7월 5일 기자간담회와 국회토론에 이어, 6일에는 서울 영등포 하자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 (Vessel, 2014) 상영회와 함께 토론회가 있었다. 영화는 ‘파도 위의 여성들’의 최초의 항해부터 시작해 주요 활동기를 담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창의적이고 대담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가진 힘에 대한 깊은 신뢰에 기반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파도를 타고 불법을 넘어선 여성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아일랜드 여성들의 구조요청이 쇄도했지만 ‘파도 위의 여성들’의 첫 항해는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마무리되었다. 출항 전에 선박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하지 못했는데, 아일랜드 언론들이 이 점을 문제삼고 늘어진 것이다. 초기 임신에 대해 약물유산을 시행하는 것은 면허 취득없이도 가능했지만 그런 사실은 무시되었다. ‘무면허 의료선’이라는 오명을 덧씌우는 것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그러나 항해가 소득없이 끝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정면 도전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부정과 금지로 삭제된 고통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아일랜드를 시작으로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뿐만 아니라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로 활동영역을 확대해갔다. 그 과정은 물론 순탄치 않았다. 기항하는 항구마다 낙태반대론자들의 공격적 시위로 들끓었다. 그들은 ‘파도 위의 여성들’을 나치,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들이 상상하는 가장 사악한 이름이자 생명을 끊는 행위를 부각하는 이름이었다.

'파도 위의 여성들'을 설립한 레베카 곰퍼츠는 의사로 그린피스에서 활동하면서 임신중단이 허용되지 않고 의료접근성이 열악한 국가에서 고통 받는 여성들의 현실을 목격했다.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낙태를 시도하다 죽어가는 여성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었으니 사람을 살려야 했다. 죽어가는 여성들, 죽을지 모르는 여성들,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사는 여성들, 그 ‘생명’들 말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 여성들을 살려야 할 생명이라고 보지 않았다. 정작 나치와 파시스트라는 단어에 치를 떨면서도.

2004년 포르투갈에서는 군함을 동원해 입항을 저지하기도 했다. 무장도 되어 있지 않은 작은 의료용 선박과 대치한 거대한 군함 두 척. 기이한 풍경이었다. 국제법상으로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있을 경우에만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배가 한 나라에 어떤 위협을 가했다는 말인가? 

국가에게 여성은 무엇인가. 여성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낙태죄를 둘러싼 이 이상한 풍경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낙태가 금지된 나라들의 낙태시술 비율이 더 높다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 문제가 여성의 인권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가가 장려했던 우리의 ‘공공연한 비밀’

<파도 위의 여성들> 영화 상영 후 이어진 토론회에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는 한국에서 이루어져온 가족계획정책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그 과정이 “한국 정부가 인구관리와 생명선별을 목적으로 여성 섹슈얼리티를 도구화해온 역사”라고 지적한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가족계획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가가 나서서 ‘낙태’를 장려하던 역사가 있으며 임신중지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2010년 2월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시술한 병원을 고발하면서 프로라이프 운동을 시작했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이프 의사회 고발이 미친 파급은 매우 컸다. 당시 낙태시술비가 치솟고 병원들이 인공유산시술을 거부하면서 많은 여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원정낙태’를 간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2012년에는 낙태죄 위헌 소송이 있었다. 위헌소송 당사자는 남성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조산사의 도움으로 임신을 중단했다. 그러자 상대 남성이 여성을 낙태죄로 고발했고, 고발당한 여성은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는 소송을 낸 것이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4:4로 합헌 결정을 내렸는데, 임부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사익’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공익’에 우선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 판결문에 여성들이 분노한 것은 이것이 원하지 않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임신이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배경을 가리고, 그 책임을 온전히 여성에게만 전가했기 때문이다.

나영 활동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은 지 불과 몇 개월 후 한 여고생이 임신중절수술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음을 지적한다. 이 여성은 어머니와 함께 여러 병원을 수소문하다 어렵게 찾아간 병원에서 수술 중 사망했다. 그는 당시 임신 23주였다. 수술비용으로 의사가 현금 6백만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나영 활동가는 “이렇게 심각한 사건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의제화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임신중단은 개인 윤리의 문제로만 취급되고, 어떤 언론에서도 이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고통을 감내했을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이 당시 우리 사회의 한계이자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낙태는 누구나 했지만 밝힐 수 없는 것이었고, 정치적 의제조차 되지 못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낙태에 대해 치열히 논쟁한 경험이 없다.” 나영 활동가가 진단한 우리의 현재는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밝힌다. 논쟁은 변화의 시작이다. '파도 위의 여성들'이 낙태금지국가에 배를 띄운 것은 당장 임신중절이 절실한 여성들에게 유산유도약을 제공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 여성의 건강과 낙태권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었다. 앞서 포르투갈에서 군함이 '파도 위의 여성들'을 막은 사건을 계기로 포르투갈에서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크게 터져나왔다. 이는 이듬해 사회당의 선거 승리로 이어졌다. 사회당은 정권을 잡은 후 2017년 4월 국민투표를 통해 임신중지권을 합법화했다. 그리고 올해, 위먼온웹의 첫 기항지인 아일랜드에서도 낙태죄 폐지 소식이 전해졌다. 위먼온웹은 아일랜드에서 드론과 로봇을 이용해 임신중단 약물을 배달하는 캠페인을 벌이며 아일랜드 여성들에게 연대해왔다.

국경을 넘어선 여성 연대

‘파도 위의 여성들’은 2006년부터 ‘위민온웹’(Women on Web)이라는 단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웹사이트에서는 인공유산이 불법인 나라에 거주하는 임신 10주 미만의 여성에게 유산유도약물을 배송한다. 약물처방이 가능한 상황인지 판별할 수 있는 문진표를 작성한 후 의사의 검토를 거치며, 일정액의 기부금을 받는다. 이메일을 통한 상담과 경과에 대한 추적관찰도 이루어진다. 유산유도약물 사용과 원거리 의료를 통한 인공유산의 안전성에 대해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위민온웹은 17개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2015년부터는 한국어 서비스를 시작해 3년 간 2500여명의 한국여성이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WOW 를 이용한 한국인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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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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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 2017.10.16 동안
위민온웹을 이용한 여성 1328명의 응답

유산유도약을 요청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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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 2017.10.16 동안
위민온웹을 이용한 여성 1328명의 응답

위민온웹에서 배송하는 유산유도약은 모두 다섯 알이다. 미페프리스톤이라는 동그란 알약 하나. 그리고 미소프로스톨이라는 육각형 알약 넷. 약을 받으면 먼저 미페프리스톤 한 알을 먹는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나면 미소프로스톨 네 알을 혀 아래 넣고 녹인다. 끝. 이 간단한 절차로 12주까지의 임신은 99퍼센트의 성공률로 중지할 수 있다. 이 약물들에 알러지가 있거나 특별히 신체적 문제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인공유산 과정은 자연유산과 동일하며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다.

미페프리스톤은 임신을 유지하는 호르몬의 작용을 막아 임신을 중지시킨다. 미소프리스톨은 자궁을 수축시켜 임신부산물을 자궁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미페프리스톤과 함께 사용할 때보다 확률은 낮지만, 미소프로스톨만으로도 유산이 유도된다. ‘파도 위의 여성들’은 미페프리스톤이 도입되지 않은 나라의 여성들을 찾아가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해 유산을 ‘합법적으로’(즉, 임신중단이라는 목적을 숨기고) 시도하는 방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들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 안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 고립된 여성들에게 다가갔다. 배를 띄웠고, 웹페이지를 개설했고, 인터넷 이용을 검열하는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 휴대폰용 무료 웹을 개발해 보급했다. 레베카 곰퍼츠는 ‘파도 위의 여성들’의 창조성이 공격적인 전략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이 설정해 놓은 한계선이나 낙태반대론자들의 물리적 위협행위 같은 것에 겁을 집어 먹게 되는 것은 자기검열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니 거침없이 나가자고.

영화 중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낙태반대론자들이 항구에 정박한 배에 인공유산을 하기 위해 오르는 여성들의 얼굴을 찍어서 공개하겠다는 협박을 하자 ‘파도 위의 여성들’은 모두 똑같이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함께 배를 탄다. 누가 활동가이고 누가 임신중지를 하려는 여성인지 알 수 없게 말이다. 영화 안에서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는 아마도 ‘외롭다’일 것이다. 임신과 낙태의 짐을 혼자 지고 지독한 고립감을 느끼는 여성들에게 ‘파도 위의 여성들’은 말한다. “당신에게 우리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어요.” 그렇게 우리는 외로움을 지우고, 두려움과 맞서고, 억압을 넘어선다.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

지난 7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을 비롯한 71개 단체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위헌·폐지 촉구 퍼레이드 “낙태죄, 여기서 끝내자!”를 열었다.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집회로는 사상 최대의 인원이 모였다고 한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한 여성과 시술한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269조1항과 270조1항에 대한 위헌소송이 진행 중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내 19세에서 44세의 여성 중 낙태죄 폐지를 찬성하는 비율은 77.3%에 이른다고 한다. 세계적인 추세를 보아도 낙태죄 폐지에 힘이 실린다. 가톨릭 국가로 낙태죄 폐지에 가장 보수적인 국가 중 하나였던 아일랜드에 이어 최근 아르헨티나도 14주 내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지난 5월 24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소송에 대한 공개 변론에서 여성가족부가 밝혔듯, 한국에서 낙태죄는 사문화된 조항이며 여성들의 건강권과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다. 또한 낙태죄 처벌 대상이 '임부'와 '낙태하게 한' 사람에게 한정된다는 점에서 부당하며, 상대 남성에 의한 협박 또는 보복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대로 둘 수 없는 문제다. 레베카 곰퍼츠가 토론회 참가자들과 함께 외친 구호처럼, 한국에서 ‘낙태죄’ 폐지는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레베카 곰퍼츠와 함께 토론에 참여한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는 낙태죄 폐지가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임의 책임은 여성들에게만 묻고, 아이를 낳으면 학업과 직장에서의 경력단절이 따라오는 상황이 변하지 않으면 인공유산이 마침 피임의 일환처럼 여겨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을 강화하고, 피임기술과 의료시설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 그리고 결혼 유무,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와 질병, 경제적 차이 등에 상관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 권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사회정책과 구조가 재편되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 시작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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