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한 번도 못 와 본 티 내기는

생각하다저널리즘

아시아 한 번도 못 와 본 티 내기는

김시호

점거와 난입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각국의 외신들이 앞다투어 이 소식을 전했고 그 중에는 BBC도 있었다. 탄핵 인용 당일, 부산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로버트 켈리 교수는 BBC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자택 집무실에서 탄핵 소식과 정국에 대한 소식을 생방송으로 전하고 있었고, 바로 그 순간 역사적인 영상이 탄생했다. 켈리 교수가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방에 그의 큰 딸과 막내가 난입했고, 당황한 켈리 교수가 아이들을 제지하며 방송을 이어 나가는 모습, 기겁한 그의 부인 김정아 씨가 방에 뛰어 들어와 아이들을 현장에서 퇴거시키는 모습, “왜 엄마아아아” 하고 길게 꼬리 무는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전세계로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해당 영상은 현재 (3월 14일 기준) 유튜브에서 1600만 번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있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사랑스러움 앞에 웃음을 터뜨렸고, 탄핵이 인용되었음에도 청와대 관저에 꿀단지라도 묻어 놓은 양 나올 생각을 않는 자연인에 대한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곧 전세계로부터 더 황당한 이야기 한 무더기를 듣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

‘저 불쌍한 아시안 보모는 곧 해고당하고 말거야’

 해당 영상을 지켜보던 영미권 이용자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김 씨를 ‘보모’로 단정짓고 댓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타임>지마저도 김 씨를 두고 ‘당황한 보모frenzied nanny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현재는 당황한 아내frenzied wife로 수정된 상태이다.) 이 사태에 불을 지폈다. 아시안 여성에 대한 편견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수 만 가지 댓글이 쏟아졌고,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여성이 너무 어려 보였다. (그래서 보모인 줄 알았다.)
  2. 아이들이 여성과 안 닮았다. (그래서 보모인 줄 알았다.)
  3. 여성이 몸을 낮추고 황급히 들어와 수그리고 나갔다. (그래서 보모인 줄 알았다.)

 심지어는 ‘(해고 위기에 처한)보모를 도웁시다’(Nanny in need) 라는 모금 페이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현재 이 페이지의 모금은 비활성화된 상태다.) 보다 못한 한국인들이 댓글창에 찾아가 “아이들이 한국말로 외치고 있으며, 저 사람은 보모가 아니라 부인이다”라며 댓글을 달기 시작했음에도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니 보모 생계 걱정할 일 없어서 다행이네” 등 난장판이 벌어졌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는 “그냥 너희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거야.” 라고 이 사태를 명확히 꼬집었다. 그리고 그 아래 달린 반응은 여러 모로 엄청났다. (정신건강을 위해 굳이 찾아보지 않기를 권한다.)

 여차저차하여 김 씨가 실제로 부인임이 밝혀지자 일군의 무리가 의견을 철회하고 록산 게이의 트위터 계정에 찾아가 잇따라 고해성사(?)를 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해. 왜 나한테 와서 이래.)

백두산 넘어 에베레스트산

 아시안 여성에게는 문화권 특유의 남존여비 사상을 토대로 한 국내의 여성차별이라는 거대한 산이 존재한다. 운 좋게 그 산을 넘어 세계와 마주할 경우, 이번에는 '여성스럽고 헌신적이어서 여자친구로 사귀기 좋다' 며 데이트 시장 속 아시안 여성의 ‘파워’를 강조하는 사고방식, 또는 임금이 저렴하고 비자가 불안정해서 가사일이나 보모일을 맡기기 좋다는 사고방식과 같은 아시아 여성에 대한 거대한 편견을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백인 남성에게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동양인 여성을 자연스럽게 보모로 생각해 버리는 경우는, 사실 나 같은 아시안 여성에게는 ‘영어말고는 할 줄 아는 말도 없는 양반이 아시아 한 번도 못 와 본 티를 내고 그러세요’같은 생각이 들만큼 같잖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아시안 여성은 보모가 아닌 다른 직업도 가질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영상 속 구성원들의 성별과 인종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만약 김 씨가 백인 여성이었다면 어찌 되었든 처음부터 보모로 간주되지 않았을 것을 많은 아시안 여성이 안다. 또는 켈리 교수가 동양인 여성이었다면? 중요한 인터뷰하는데 칠칠맞지 못하게 방문도 잠그지 않고, 프로 정신이 부족하며 이래서 워킹맘은 곤란하다는 쓴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선하다. 일하는 중 아이들이 들어와 무척 곤란해 하는 표정도, 손짓도, ‘엄마답지 못하다’면서 비난 받았을 것이라는 것을 많은 여성들이 이미 너무 잘 안다. 김 씨가 동양인 남성 또는 백인 남성이었다면? 인종과 성별을 바꾼 다양한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겠으나, 어찌 되었든 누구도 일하는 아버지가 문을 잠그지 않은 부주의에 대해서는 곧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허리를 굽히고 아이들의 옷자락을 움켜 쥔채 재빨리 뛰쳐 나가는 김 씨의 모습이 도저히 남편과 '동등한 지위'의 파트너, 즉 배우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서 보모라고 판단했다는 영문 댓글도 보았다. 자신의 배우자가 외신과의 생방송을 진행하는 중 아이들이 그 방에 난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정서적으로 침착한 상태를 유지하며 방문을 살포시 열고 들어와 한 아이의 손을 잡고 한 아이는 팔에 안고, 카메라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목례하고 돌아서 우아하게 나갔다면 비록 아시아 여성이라고 해도 보모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솔직히 장난하지 말라고 전해 주고 싶다. 

귀여움은 착잡함을 덮을 수 없다

 노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세상 시름 모르는 얼굴로 흥겹게 아버지의 일터에 침범하는 그 영상은 무척 귀엽다. 부정할 수 없다. 영상을 통해 비로소 아시아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 영상은 각종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전 세계인에게 웃음을 선사하겠지만, 나는 세계인이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헐값에 일하는 아시안 여성’이라는 거대한 편견을 떠올리게 될 것이고, 마냥 기분 좋게, 사랑스럽게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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