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pro 9. 양으뜸

알다디자이너커리어인터뷰

I'm a pro 9. 양으뜸

이그리트

디자인 : 이민

활발하게 활동하는 현업 여성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I’m a pro>의 아홉 번째 주인공은 디자이너 양으뜸.

Q. 당신은?

그래픽 디자이너. 보통은 포스터, 리플렛, 도록 같이 인쇄매체 위주의 작업을 하며 브랜딩도 함께 하고 있다. 클라이언트의 업종을 따지진 않고 다양한 분야의 일을 받는다.

Q. 어떤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나?

메시지가 단순한 디자인. 한눈에 이게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명확하게 보이는 게 좋다. 그러면 작업의 의도를 설명할 때도 간편하게 설명할 수 있다. 말을 돌려서 한다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숨기고 빙빙 돌려서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개인 성향이 많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스니커즈 브랜드 grds의 품질보증서, 박스테이프, 스니커즈 태그 2종, 2017 s/s 엽서 세트.〈아카이브〉, 《W쇼: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SeMA 창고, 2017년 12월 8일 – 2018년 1월 12일)의 일부. 촬영: 텍스쳐 온 텍스쳐

Q. 어떻게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어릴 때 만화를 매우 좋아해서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미술 쪽 일을 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고.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미술 쪽 일이 아니라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술대학 진학을 희망하게 되면서 입시미술학원을 다녔는데, 재능이 두드러지는 친구들을 보고 회화과가 아니라 디자인과 진학을 고려하게 됐다. 디자인과 중에서는 시각디자인이 가장 친숙했고 관심도 있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는 느낌처럼 디자이너가 됐다. (웃음) 대학을 졸업한 후엔 디자인 회사에서 인턴을 하다가 사회적 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디자인 뿐만 아니라 행사 기획 및 진행과 같은 디자인 바깥의 일도 해야만 했다. 이렇게 계속 일하다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 살고 싶은 삶과 멀어질 것 같다고 느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 이후부터를 나의 디자인 커리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Q. 그때는 ‘디자인 바깥의 일’이라고 여겼던 일도 FDSC에서는 활발하게 하고 있다고.

그때는 업무로 주어진 경우라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고, 어려서였을수도 있고. 지금은 뭔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 게 재밌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동료 디자이너들을 만나니까 주제가 어느 정도 좁혀져 있어서. 기획팀을 꾸리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디자이너를 만난다는 점도 좋다. 혼자 컴퓨터 앞에서 이것저것 기획하다 보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싶은 순간이 오지만, 정작 만나서 함께 얘기하면 에너지가 차오른다. 나는 그렇게 사람 만나는 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까 좋더라.

그렇게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 촬영을 공동구매같이 공동촬영을 맡기는 소모임을 진행한 적이 있다. 포트폴리오 촬영이라는 게 개인이 맡기기에는 금액 측면에서 작은 일거리라서 모아 맡기면 어떨까 생각한 거다. 또, 촬영을 선뜻 맡기기에는 소소한 프로젝트지만 전문가의 시선으로 기록을 남기고 싶은 경우의 프로젝트가 있었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FDSC에 있어서 함께 촬영을 맡겼다. 사진촬영을 맡기는 과정도 재밌었다. 의뢰를 받아서 작업하는 입장이다가 의뢰를 하는 입장을 처음 경험한 셈이다.

Q. 해왔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작업을 꼽는다면.

‘grds’(그라더스)라는 스니커 브랜드 작업. 브랜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쭉 함께 일을 하고 있다.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시기에 건너건너 소개를 받고 일을 맡았다. 로고부터 시작해서 신발의 태그, 박스, 박스에 붙는 스티커, 쇼핑백 등을 전부 만들었다. 올해 브랜드의 컬렉티브 라인을 런칭할 때도 아이덴티티와 박스를 작업했다.

스니커즈 브랜드 grds의 컬렉티브 라인인 GRADUS의 아이덴티티 시스템과 스니커스 박스 패키지, 2019. 사진 제공: grds

클라이언트 팀의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내부에 그래픽 디자이너가 없는데 일일이 외부의 디자이너에게 맡기기 어려운 일들, 예를 들면 쇼룸 윈도우 그래픽이나 SNS 이미지 같은 것은 그래픽 비전공자인 팀원들이 만들던 상황이었다. 아주 사소한 차이로도 훨씬 매끈한 그래픽을 만들 수 있는데, 그 사소함이 조금씩 엇나가는 듯한 아쉬움이 있어 시스템 가이드를 짜서 드렸다. 사용하는 서체와 자간, 글자 크기 등등 수치 위주로. 그랬더니 결과물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졌다. 너무 괜찮아져서 ‘난 그러면 더 일을 못하나?’ 싶은 불안감이 잠시 들 정도의. (웃음) 하지만 올 가을에 새로 런칭하는 의류 라인의 패키징 작업을 다시 맡겨주셨으니, 나의 기우였던 걸로.

스니커즈 브랜드 grds의 컬렉티브 라인인 GRADUS의 아이덴티티 시스템, 2019. 응용디자인 및 사진 제공: grds

Q. 학자금 대출 완납 기념 수건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의 문화 중 좋아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잔치를 열면 수건을 나눠주는 거다. 재밌지 않나. 주는 사람 입장에선 꽤 중요한 일에 대한 문구를 수건에 새겼을텐데 받는 사람은 ‘어, 수건이네?’ 정도의 감상과 함께 사용하는 차이도 재밌고. 인터넷에서 어떤 가족이 벌초기념 수건을 제작한 걸 보곤 나도 언젠가 한 번 꼭 만들어봐야지 싶었다. 벌초 참가한 가족들에게만 그 수건을 나눠줬다더라고. 

학자금대출 완납 기념 수건, 2017. 비매품. 사진: 박신영(스튜디오 도시)

그 뒤 수건을 만들어 기념할만한 경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학자금을 다 갚았더라. 이정도면 축하할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해서 수건을 제작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반응이 생각보다 무척 좋았다.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고, 갖고 싶어들 하고.

Q. 회사를 거쳐 현재는 1인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여럿이 일할 때, 혼자 일할 때, 각각의 장단점을 꼽아본다면?

어느 쪽이 월등히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장단점은 뚜렷하다. 회사에서 일하면 안정적인 수익과 정해져 있는 출퇴근 스케줄이 역시 장점이다. 예를 들면 회사를 다닐 때는 휴가를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내 일을 백업해 줄 동료가 있으니까. 해외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업무 요청이 들어온다거나 하면 다른 사람이 봐줄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서 오래 여행을 가거나 쉬는 데에 심리적으로 부담을 느낀다. 내가 여행을 가서 유심칩을 갈아끼우는 사이에 일을 맡기려는 전화가 왔는데 내가 못 받은 거라면 어떡하나. (웃음)

Q. 그러면, 다시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지?

모든 걸 열어놓은 상태라고 하면 맞겠다. 5년 후도, 10년 후도 마찬가지다. 지금 나는 디자인을 하는 게 좋고 결과물도 이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내가 해보지 않은, 다른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그 일로 성과가 나온다면 그 일로 갈아타거나 디자인을 겸업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Q.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을 꼽는다면? 참. 일하는 여성에게는 스스로를 ‘강제 자랑’하는 기회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세 가지 이상을 꼽아 달라.

첫째로 이해하기 쉬운 디자인을 하는 것. 어떤 디자인을 좋아하는지와도 연관되어 있는 장점이다. 둘째는 텍스트적인 접근에 능하다는 것. 예를 들면 grds(그라더스)의 경우 원래 상표가 이거였다. ‘GRADUS’. 대문자의 구성이 브랜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모음을 제외하고 소문자로만 구성한 로고를 만들었다. FDSC 운동회 이름(‘운동해☀️’)도, 팟캐스트 이름(‘디자인 FM’)도 내가 했다. 셋째는 유머로 꼽겠다.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이 유머러스하고 엉뚱한 발상을 즐긴다.

제1회 FDSC 운동회 "운동해🌞" 네이밍, 2019. 티셔츠 디자인: 양민영 사진: 강희주

Q. 디자이너로서 일할 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나를 가장 편하게 하는 것을 각각 한 가지씩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

사실 힘들게 하는 것과 편하게 하는 것의 주체가 같다. 클라이언트. 힘들게 하는 건, 제대로 된 의견을 주지 않는 것. 편하게 하는 건, 피드백을 명확하게 주는 것.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쿨하게 얘기해주는 게 좋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오는 작업물의 결과가 좋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뺏기지 않으니까.

작업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혹은 이러이러한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 되는데 그러는 대신 ‘다른 게 없나요?’ 같이 물어보거나, 제안한 시안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의견을 내는 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의사소통을 하면 나는 그 말의 의도를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니까 번거롭다.

Q.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같은 작업이 있다면?

카드 디자인, 혹은 항공기 디자인. 사이즈가 극단적으로 작거나 극단적으로 큰 것. 그런 아이템은 평범한 디자이너가 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어느 정도 디자인의 퀄리티가 보장이 되어야 하고, 인지도도 있어야 하고. 그런 암묵적인 요구사항을 충족할 만큼 커리어가 쌓인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또,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게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 기업이나 기관의 내부 보고서, 책자 같은. 그것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길게 사용되는 디자인이기도 하고. 일반 인쇄물 작업 같은 경우는 디자인의 연한 자체가 매우 짧으니까, 더 오래 살아남는 작업을 하면 디자이너로서도 뿌듯할 것 같다.

Q. 디자인 업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고정관념이나 습관을 한 가지 꼽는다면?

아까 장점을 물었던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어 했던 것처럼, 여성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걸 힘들어 한다. 나는 학교에 수업을 나가는데 학생마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여학생들이 과제 발표를 할 때 자신없어 보이는 태도로 말을 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 사실 나도 잘 못하는 부분이고. SNS나 개인 홈페이지에 올릴 때도 자기 검열을 거쳐서 이걸 올릴까, 말까 엄청 고민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FDSC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러고 있더라.

더 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매체에 소개되는 거야 바로 이뤄지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개인 소셜 채널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요즘 거의 여성 디자이너들의 작업만 찾아보는데 몰랐던 디자이너들의 훌륭한 작업물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좋은 작업을 발견할 때마다 ‘왜 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해 왔지?’ 싶은 거다.

그리고 하나 더. 페미니즘이 이슈가 된 이후에 업계에서 여러 명이 참여하는 행사나 전시가 있을 때 참여하는 사람의 성비를 50:50으로 맞추자는 얘기를 많이들 한다. 하지만 디자인 업계의 여남비율을 제대로 반영하면 50:50이 아니라 70:30 쯤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일하는 여성 디자이너를 더 전면에 드러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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