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a pro 6. 김진희

알다디자이너커리어인터뷰

I'm a pro 6. 김진희

이그리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Q. 당신은?

활자를 디자인하는 사람. 흔히 말하는 폰트나 서체를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Q. 어떤 디자인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오래 가는 것. 활자 디자인은 무척 보수적인 분야다. 사용자들이 과감한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시도에 약간의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하나의 활자체를 만들면 오래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오래 갈 수 있는 활자체가 제일 좋은 디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진희 디자이너의 개인 작업. 이미지 김진희

그렇다고 해서 디스플레이 용 활자체가 좋지 않은 디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유행을 따르며 개성이 강한 활자체는 광고나 영상 같이 시장의 변화가 빠른 영역에서 필요한 활자체다. 꼭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오래 쓰는 활자체와 유행을 따르는 활자체는 각각 필요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Q. 어떻게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입시미술을 하다가 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처음엔 그림이 재밌어서 입시미술까지 가게 됐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작가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Q. 그 중에서도 폰트 디자이너다. 어떻게 이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커리어를 쌓게 되었는가?

대학교 2학년 때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타입(Type)을 이용하여 그래픽을 다루는 커리큘럼이었지만, 그 중에 레터링(편집자주: 특정 문구나 문장을 스케치해서 디자인하는 작업)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그게 무척 재밌었다. 레터링한 결과물을 폰트로 만들어도 재밌겠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의 작업실에 가서 제작 툴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바로 폰트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됐다. 졸업전시를 준비하던 중 공고가 올라와서 한 번 내볼까, 했는데 잘 풀렸다.

Q. 예전에는 회사에서만 폰트를 만드는 줄 알았는데, 활자체는 회사 뿐만 아니라 개인 디자이너들 역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영역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다. 최근에 소규모 스튜디오가 많이 생겼다. 활자체 디자인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작업도 굉장히 좋은 작업이 많다. 관심이 있다면 활자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Q. 해왔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작업을 소개해 달라.

‘시대의 거울’ 시리즈. 기획 단에서 가장 공을 많이 들였다. 작업 초반에 1960년대에 사용되었던 레터링을 폰트화하자는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시대의 거울’ 시리즈는 네 개의 폰트를 포함하고 있는데, 회사에서는 또 비슷한 컨셉의 폰트를 매달 나누어 출시하는 데에 부담이 있기도 했고. 

'시대의 거울' 작업. 이미지 김진희

그래서 다른 시리즈 폰트가 어떤 식으로 출시되었는지 찾아봤다. 공병각 서체 같은 경우엔 펜, 크레용 같이 도구적인 서브 컨셉이 잡혀 있었다. 이를 보고 ‘시대의 거울’ 시리즈에도 하위 컨셉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서브 컨셉에 1960년대 시대상을 담았다. 민주화와 산업화다. 

'시대의 거울' 작업. 이미지 김진희

그리고 이 두 키워드의 가장 큰 주축인 학생과 노동자를 폰트의 서브 컨셉으로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까지 폰트 하나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경우가 많이 없어서 레퍼런스가 없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시니어 디자이너들이 도와주셔서 기획에 대한 감을 익힐 수 있던 작업이었다.

Q. 최근엔 폰트 ‘눈솔’을 출시했는데.

2019년 1월에 출시한 따끈따끈한 폰트다. <오륜행실도 언해본>의 활자체를 재해석했다. 

폰트 눈솔. 이미지 김진희

김진평 선생님이 쓰신 책 중 이 <오륜행실도 언해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당시만 해도 활자란 게 손으로 깎아 만들어지는 것이다보니 균일하지 않았고, 한글의 글자수도 워낙 방대해 퀄리티와 글자간의 통일성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이 <오륜행실도 언해본>의 목판본은 활자스러운 조형감각과 통일성을 가진 훌륭한 표준이라는. 여기서 영감을 받았다. 

폰트 눈솔. 이미지 김진희

더불어, 명조체라고 보통 불리는 한글 서체들의 뼈대가 최정호 선생님의 명조를 바탕으로 재생산한 것들이 굉장히 많다 보니 그것을 탈피해 보고 싶었다. <오륜행실도 언해본> 활자체를 보면 다른 명조체와는 달리 받침이 굉장히 넓고, 자모음을 구성하는 디테일의 차이가 크다. 이러한 구조적 디테일 중 하나만 바뀌어도 문단으로 활자체를 사용했을 때의 인상이 달라진다.

Q. 폰트 디자인의 작업 프로세스 전반이 궁금하다.

처음엔 포지셔닝이란 걸 한다. 폰트 시장에 어떤 폰트가 나와 있고, 어떤 폰트가 없는지 현황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포지셔닝이 확정되면 기획에 들어간다. 기획과 포지셔닝이 알맞고, 시안 작업이 잘 어울리면 폰트 제작에 들어가게 된다. 씨글자 200자를 만든 후에 2780자를 제작한다.

작업은 혼자 기획해 혼자 끝까지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제작 과정에서 두세 명이 붙기도 하는데다가 기획 단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며 진행되다 보니 온전한 자기 작업이라고 하기엔 힘든 부분이 있다. 하지만 업계 분위기는 시간의 제약이 크지 않은 한 기획부터 제작까지 한 사람이 이끌고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다. 디자이너들은 자기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업을 갖는 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니까. 그러한 면을 고려해 준다고 느낀다.

Q. 좋은 폰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자질이 있다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보는 힘, 보기 위해 오래 앉아 있는 힘. 물론 디자인적인 역량도 중요하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 결국 앉아 있는 힘과 보는 힘이 좋은 폰트 디자이너를 만드는 것 같다. 어떤 활자가 어떻게 다른지, 이 활자는 왜 이런 인상을 가졌는지, 이 활자는 왜 눈에 거슬리는지 계속 봐야만 분석할 수 있다. 

폰트 눈솔. 이미지 김진희

오래 앉아서 한 글자 한 글자 만져보고 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 활자 디자인 자체가 작업기간이 길기도 하고. 폰트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 디스플레용 폰트는 3~4개월, 본문에 사용할 수 있을 만한 폰트는 1년, 길게는 2년까지 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Q. 앞으로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디자인을 하고 있을까?

하고 싶다. 폰트는 하나 만드는 데에 넉넉한 시간을 두고 작업하면 1년 정도가 걸리니까, 5년이면 겨우 다섯 개 만들 정도 아닌가. (웃음) 5, 10년은 오히려 짧은 것 같다. 활자 디자인이라는 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식견이 넓어지면서 유리한 면도 생기고.

Q. 주변에도 오래 일하는 여성 선배 디자이너가 있는지?

물론 있다. 하지만 사내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그 폰트를 누가 만들었는지까지 관심을 갖지는 않으니까. 10년, 15년 넘게 일한 분들도 많은데 알려지지 못한 건 아쉽다. 그래서 이 기회에 대단한 디자이너 한 분을 꼭 짚고 넘어갈 수 있다면, 미생체를 만드신 송미언 디자이너님을 꼽고 싶다. 보는 눈이 다르다는 걸 느낀다.

Q.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을 꼽는다면?

끈기. 사실 다른 디자인 분야에 있었으면 오히려 빠른 변화에 지쳤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하나를 길게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있는 게 활자 디자인에서만큼은 장점으로 작용한다.

Q. 디자이너로서 일할 때 나를 가장 힘들 게 하는 것, 나를 가장 편하게 하는 것 각각 한 가지씩을 꼽는다면?

힘든 것, 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3~5개월 사이에 폰트 하나가 나온다고 하면 ‘그렇게나 오래 걸리냐’고 생각한다. 어쩌면 긴게 맞을 수도 있고. 하지만 서체 하나를 작업할 때 기획부터 제작까지의 기간을 3개월로 요청하면, 실제 제작에만 대부분 3개월 이상 걸리는 작업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많다. 그런 인식이 아쉽다고 동료들끼리도 토로하곤 한다.

도움이 되는 것, 동료. 회사에 동료들이 항상 옆에 있는 게 나에게는 매우 좋은 점이다. 혼자 활자 디자인을 배웠을 때는 물어볼 사람이 없고 워낙 소수의 사람이 업으로 삼는 디자인 분야다 보니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엔 옆자리 사람을 툭 치면 필요한 정보가 나오는 게 무척 편안하다.

Q.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본문에 사용할 수 있는 부리 계열의 활자체를 만들고 싶다. 본문에 사용한다는 것은, 활자체 자체의 목소리가 크지 않아 어디에 써도 디자인적으로 잘 어울리고, 작은 크기로 써도 잘 읽힐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폰트 눈솔. 이미지 김진희

여기저기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서체. 이걸 기필코 10년 안에는 만들고 싶다. 보통 본문에 쓰이는 활자체를 만들기가 더 까다롭다. 디자이너는 큰 화면에서 글자를 크게 확대해서 제작하는데, 사용자들은 그걸 매우 다양한 사이즈로 사용하니까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이즈를 오가며 질감의 변화를 체크하고 수시로 활자체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용 활자체의 개발이 오래 걸리는 이유 중 하나다.

Q. 디자인 업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고정관념이나 습관을 한 가지 꼽는다면 무엇일까?

‘결혼 언제 해? 결혼하면 그만둘 거지?’라고 물어보는 것.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나는 디자인을 계속 할 건데 어쩌라고 이런 걸 물어보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들한테는 결혼 언제 하냐고 안 물어보지 않나. 여성 디자이너를 결혼 전까지만 사용할 수 있는 소비재 취급을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런 물음을 들을 때 버티겠다는 오기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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