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일기>, 젠더를 벗어던지다: 급진적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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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일기>, 젠더를 벗어던지다: 급진적 페미니즘

수민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원체 만화를 좋아하는 나는 그간 사 모은 단행본으로 책장 하나를 꼬박 채울 수 있을 정도다. 요일마다 웹툰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무언가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그려진 만화에는 관심이 없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사’ 같은 류의 작품 말이다. 만화란 자고로 재미로 보는 거지, 계몽을 위한 수단이 되면 그때부터 재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도 있는 법. 작년에 읽은 만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 작품은 단순히 재미있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계몽적이어서 놀라웠다. 요즘 한국 페미니즘의 바탕이 되는 사상의 골자를 완벽하게 풀어내고 있었달까. 바로 <탈코일기>다.

여자와 여성성의
연결고리를 끊어라

최근 몇 년간 한국 페미니즘의 최대 이슈는 ‘탈코르셋’ (이하 ‘탈코’)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코일기>의 제목이자 주제이기도 한 이 운동은 그간 여성의 상징이라고 여겨져 왔던 긴 머리, 메이크업, 실루엣이 드러나는 옷 등을 여성을 옥죄어왔던 ‘코르셋’이라고 보고, 그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여성성을 탈피하는, 그래서 기성 사회에 반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기저에 깔린 사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 운동의 바탕이 되는 핵심 사상은 여자라는 성별에 연관된 여성성이라는 젠더가 가부장제 사회를 지탱하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젠더를 벗어던져 성별과 젠더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은 70년대 미국에서 시작한 급진적radical 페미니즘과 궤를 같이 한다. 한국 페미니즘이 급진적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단순히 ‘여자들이 막나간다’는 의미에서 지껄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제로 한국 페미니즘을 급진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건 이러한 사상적 연관성 때문이다.

<탈코일기>가 큰 인기를 끈 데에는 분명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탈코에 담긴 메시지—급진적 페미니즘—가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에 공감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왜 내가 공감하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탈코가 페미니즘을 위해 필요하다는 건 직관적으로 공감이 되지만 그 정확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이들이 대다수였을 터. <탈코일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그러한 논리를 분명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덕분에 이 작품은 탈코에 마음은 있지만 확신이 없어 실천을 망설였던 이들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해주기도 하고, 탈코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탈코가 필요한 이유를 납득시켜주기도 했다. 누구나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만화라는 포맷을 통해 탈코 운동의 당위성과 그 의의를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가의 역량과 작품 내 표현이야말로 <탈코일기>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일러스트 이민

여성이 '을'이 되는 논리

투블럭컷에 화장기 없는 얼굴, ‘15분컷’으로 외출할 준비를 마치는 주인공 뱀희는 이미 탈코를 실천하며 꾸밈 노동을 거부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그도 불과 1, 2년 전까지는 그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코르셋을 차곤 했다.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시간과 돈을 들여 머리와 화장을 하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남자들의 인정을 보상이자 자신의 권력으로 생각했다. 이런 그에게 있어서 친구 로아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일이자 탈코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굳은 마음에 ‘현타‘를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로아는 아직 탈코르셋이 왜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예뻐지는 게 뭐가 나쁜 거냐며, 자신은 예뻐지고 싶으니까 자신의 선택에 의해 화장을 하는 거라며 자신의 꾸밈을 정당화한다.

급진적 페미니즘의 초점은 그동안 여성다움의 기준이 되었던 요소들이 사실상 ‘여자’라는 성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해왔다는 것에 맞춰져 있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여자로 태어난 이상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에 일부러 돈을 들이면서까지 자신을 꾸며야 한다.

급진적 페미니즘에 따르면 가부장제는 여성이라는 섹스로 태어난 이상 이러한 여성적인 덕목들을—여성 젠더를—체화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가르치며 생물학적인 섹스와 사회에서 규정하는 특정한 성적 규범을 연결한다. 이와 같이 특정 섹스에 특정 젠더를 연결하는 것은 여성에게 수동적인 덕목을, 남성에게 적극적인 덕목을 주입시키고 결과적으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기 쉽게 만든다. 사회가 젠더를 이용해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착화된 섹스-젠더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성은 그래서 계속 ‘을’이 될 수밖에 없다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생각한다.

'여성'에서 벗어나는 방법

<탈코일기>는 이러한 입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늘어지기 위해 건강을 담보로 남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여자. 치장을 몸에 익힘으로써 자진해서 평가받는 여자. 가부장제 사회를 이끄는 남성의 이득을 위해 규정지어진 코르셋—섹스-젠더 체계—에 스스로를 끼워넣어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된다. 그리고 이 체계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본보기와 학습을 반복하며 점점 더 공고해진다. 여자라는 섹스를 가진 사람이 여성 젠더를 체화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서, 여자이면서도 화장하지 않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펑퍼짐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보게 될 때까지.

여성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러한 섹스-젠더 체계라면,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방법은 그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맨 처음 선택한 것은 그래서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양성androgyny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여자라는 섹스에 남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젠더 가치들이 사회에 의해서 고정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로 인해 여자로 태어난 자신이 완전한 인간으로 발달하는 것을 방해받았음을 각각의 여성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니 이래야 한다는 젠더 관념에 얽매이지 않은 채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가치들을 스스로 취사선택하여 조합해야 한다. 그간 사회에서 남성적masculine 또는 여성적feminine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가치들 사이에서 내게 맞는 것들을 알아서 골라 보다 발전된 인간상을 성취하자는 것이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사회의 섹스-젠더 체계가 붕괴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탈코일기>의 등장인물들도, 그리고 현실에서의 탈코 운동도, 바로 이를 목표로 한다. 특히 <탈코일기>에서는 거의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해당 입장과 동일한 내용을 작품 내에서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인공 뱀희가 탈코가 대체 뭐냐고 묻는 로아에게 “사회적 여성성 탈피”를 통한 “탈가부장제”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급진-자유의지?
급진-문화론?

흥미로운 것은 기존의 급진적 페미니즘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해답을 제시하는 사조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흔히 기존의 사조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양성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부터 급진-자유의지론적 페미니즘이라 부르고, 후에 등장한 사조를 급진-문화론적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새롭게 등장한 문화론적 페미니스트들은 섹스-젠더 체계가 여성 억압의 근본원인이 맞긴 하지만, 실제로 여자라는 섹스만이 가지는 특유의 ‘여자다움’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본질적인 성차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성을 지향하는 것이 적어도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해방을 가져다줄 수 없을 것임을 주장한다. 진짜 문제는 오히려 여태까지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 젠더를 의도적으로 폄하해온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알고보면 남성성에 비해 여성성이 훨씬 우월하고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여성적이고자 노력하면서 문화 전반에서 남성적인 것들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입장의 결론이다. 즉 사회 전반에서 ‘여성적인 문화Female culture’를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탈코일기>는 어디까지나 자유의지론하고만 입장을 같이 한다. 적어도 문화론과 일치하는 면은 찾을 수 없는 듯하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애초에 자유의지론이 등장한 배경이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대두된 배경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 단계인 자유의지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세상의 인식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여성도 하게 해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일단 “여성도 할 수 있다”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어야 편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감히 여자가” 따위의 말을 듣는 게 현실인 한국의 사정을 생각하면 자유의지론이 우세한 이유가 납득이 간다.

자유의지론과 문화론은 젠더뿐만 아니라 섹슈얼리티에 관한 문제에서도 다른 입장을 보인다. 자유의지론은 마치 젠더에 의해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발전을 억압받아왔듯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한 섹슈얼리티 때문에 성적으로도 억압을 받아왔다고 말한다. 포르노를 보라. 이건 일종의 가부장제에서의 섹슈얼리티를 위한 교본이다. 남성과 여성이 짝을 이루어 등장하며 (헤테로섹슈얼), 남성 상위 체위가 ‘정상위’로 설정되고, 그 안에서 남자가 보이는 태도와 여자가 보이는 태도는 거의 정해진 것처럼 똑같다. 적극적으로 행위하는 남성과 수동적으로 느끼는 여성. 자유의지론 페미니스트들은 이를 두고 남자가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서 그동안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컨트롤 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성도 이러한 억압적인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의 섹슈얼리티—헤테로 뿐만 아니라 동성애 및 자위—를 자유롭게 탐구하며 자신의 진정한 성적 쾌락을 발견할 것을 역설한다. 이에 반해 문화론 페미니스트들은, 앞서 그들이 여성성이 지배적인 문화를 목표로 했듯, 성애에 있어도 여성이 컨트롤하는Female-controlled 여성 성애 즉 레즈비어니즘을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한국 페미니즘 씬이 펼쳐질 무대가 문화론 페미니즘이 될 것이라는 예견은 할 수 없다. 자유의지론 그리고 문화론은 어느 한쪽이 등장함으로써 다른 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급진적 페미니즘이라는 한 갈래 안에서 같은 문제 의식을 공유함과 동시에 서로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공존해왔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이민

왜 '탈코' 안 해? 묻는다면

탈코 운동은 확실히 우리 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고 또 다양한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갈등을 야기했다. 탈코를 한 사람은 더 이상 가부장제에 일조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탈코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탈코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말한다. 강요하지 말라고. 그것 또한 하나의 억압이 아니냐며, 자신은 그저 아름다운 모습이 좋은 것뿐이라고 말한다. 탈코를 현실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존재한다. 당장 취업을 해야 하는데 높으신 분들 심기를 거스를 게 뻔한 모습으로 면접을 보러갈 순 없지 않냐는 것이다.

로아는 자신이 코르셋을 차고 있는 것이라며 지적하는 뱀희에게 머리 자르고 화장 안하는 탈코는 일종의 남성화를 목표로 하는 것 아니냐며, 자신은 좀 더 다양한 형태의 꾸밈을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나름대로의 탈코를 하겠다고 말한다. 지금의 자신은 죽도록 다이어트를 했던 시절보다는 살이 쪘지만 당당하게 비키니를 입을 것이라고. 앞서 언급된 반발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경우인데, 마치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여자다움을 가정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데에는 나쁠 게 없다고 말하는 문화론적 페미니즘을 연상케 한다.

한편 두 번째 경우는 아마 탈코의 필요성에 동의하면서도 아직까지 실제로 실천하지는 못한 이들이 해당하는 케이스일 것이다. 하고는 싶지만 차마 할 상황이 안된다는 것. 이들을 향해 용기가 부족함을 지적하며 어찌됐든 탈코를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반페미니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자유의지론에 가해진 비판 하나를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이들을 그저 용기 부족으로 일갈하는 건 조금 위험할지도 모른다.

앤 퍼거슨Ann Ferguson과 같은 이들은 자유의지론이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 나머지 여성의 선택이 어쩌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면 생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춘을 선택한 두고 그건 그 여성의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라고 정당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걸 탈코의 맥락으로 가져와 본다면, 정말로 생계 유지에 위협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 때문에 탈코를 하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의 행동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가부장제에 일조하고자 하는 선택한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계 수단에 얽매이지 않은 채, 여성 해방보다 가부장제를 우선시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런 사람들 중 하나이기에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하지 못하는 탈코를 나보다 먼저 해준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아직까지도 나 스스로는 탈코를 완벽하게 하지 못했다. 탈코가 가부장제를 타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또 여성의 해방을 위해 꼭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지금 당장 가부장제의 젠더를 효과적으로 체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전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변명이 되었건 변호가 되었건, 앞서 진행된 페미니즘의 사조와 이 사회에서 계속해서 진행중인 페미니즘의 담론을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의 화두가 탈코를 넘어 다음 주제로 나아간다면 아마 그것은 사회주의Socialist 페미니즘과 관련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물론 그 맺음과 시작의 구체적인 양상은 어디까지나 직접 지켜보며 확인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음 차례로는 <82년생 김지영> 속의 페미니즘을 짚어봅니다. 2주 후, 월요일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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