뮬란은 왜 남장을 해야 했을까 : 자유페미니즘

알다페미니즘 운동사여성 주인공

뮬란은 왜 남장을 해야 했을까 : 자유페미니즘

수민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내 어린 시절의 8할은 디즈니 영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뮬란>은 내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 개봉한 작품이라 다른 디즈니 영화들보다 훨씬 나중에 접했는데도 유난히 애정이 가던 영화들 중 하나였다. 디즈니에서 처음으로 아시안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전의 디즈니 프린세스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남장까지 하며 싸움터로 나아가는 주인공의 대담한 면모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뮬란은 내가 이전의 디즈니 영화의 주인공들에 비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뮬란>에서는 페미니즘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주의 페미니즘Liberal feminism과 상통하는 면을 속속들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발생했던 18세기 유럽의 여성들에 처해있던 상황과 뮬란이 처한 상황이 굉장히 비슷하다는 점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내가 여자아이로서 뮬란에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힌트도 될 수 있는데, 우선은 뮬란의 이야기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주위로부터 ‘선머슴’이라고 불리는 뮬란은 타고나길 자유분방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 시대 중국에서 뮬란 같은 여자가 주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려운 법. 그래도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에 중매쟁이에게 선을 보이러 가는 날 얌전하고, 자식도 잘 낳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최고의 신붓감’ 코스프레를 해보지만, 역시 벼락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뮬란은 중매쟁이한테 찍힐 대로 찍혀선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당시 ‘시집 잘 가기’의 길이 막혀버렸다는 건 여자로서 성공하는 유일한 길이 막혀버렸다는 것과 다름없다. 뮬란의 파花가문은 대대로 이름난 가문인데 이래선 개인적인 명예는 물론이고 가문의 명예까지 더럽히는 꼴만 나게 생긴 것이다. 자책과 슬픔에 빠져있던 뮬란은 흉노족이 쳐들어왔다는 파발이 도착하여 다친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야 되는 상황이 되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버지라도 살리자 하는 마음으로 가족들 몰래 아버지의 갑옷과 검을 챙겨 남장을 하고 아버지 대신 전장으로 뛰어든다.

정상 가족의 탄생

한편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산업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노동 구조가 변화하면서 ‘근대적 가정’이 탄생하게 된다. 나가서 돈을 버는 남성과 가정을 책임지는 여성, 그리고 그 아래에서 보호받고 교육받는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이 소위 ‘정상 가족’으로 설정된다. 모든 형태의 가족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서의 정상 가족의 등장은, 여성에게 가정에 관한 일—아름답게 가꿔진 집, 자녀 교육 등—을 의무로 지워, 이러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여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장 등에 고용되는 비율이 남성이 훨씬 높았던 탓에 여성은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여성에게 있어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가 되었고, 정상 가족 모델 덕분에 결혼을 해서도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가지 영역이 주어진 남성들과 달리 오로지 가정 내에만 머무를 것을 요구받았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받는 교육이란, 여성들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필요한—아이의 ‘감성’을 발달시키고 남편의 체면을 깎지 않을 만큼의 교양 교육과 각종 가사 기술을 배우는, 즉 신부 수업뿐이었다. 우리가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은 오직 남성에게만 허락되어 있었다. 이에 영국의 메리 울스톤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녀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는데, 이 권리는 특별히 자유주의Liberalism의 권리를 말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철학을 바탕으로 이론을 정립하고 그 이론 내에서 실천 방향을 제시하는 성격을 가진 탓에, 한 페미니즘 사조가 보이는 특정한 방향성은 그 사조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철학 사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그것은 이름 그대로 자유주의가 된다. 자유주의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누구나 동일하게 자연권—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자연권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함 즉 ‘자유로워야 함’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때의 자유는 철저히 ‘이성’을 따라 행동하는 자유다. 자유주의에선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성을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스톤크래프트가 말하는 권리에 대한 주장은 여성도 인간인 이상, 남성과 똑같이 이성이 부여되어 있는데도 이성을 발달시키려는 목적의 교육을 여성을 배제한 채 남성에게만 실시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주장과 같다.

이러한 권리 중심의 주장은 19세기로 넘어가 그 유명한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그의 평생의 사랑 해리엇 테일러 밀Harriet Taylor Mill이 바통을 건네받게 된다. 단순히 평등 교육을 통해 여성의 이성 발달과 자율성 확보를 목표로 했던 울스톤크래프트를 넘어서, 밀 커플은 이성을 통한 공적 영역에서의 자기완성까지 실현할 수 있도록 여성의 평등한 정치적 권리와 경제적 기회까지 주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은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의의 권리를 이어받고는 있지만, 공리주의자로 유명한 밀답게 공리주의적인 면모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늘리는 것이 공리주의의 목표인데, 이 ‘다수’는 보편적인 인간을 말하고, 따라서 여성 또한 이에 포함되므로 여성 개인이 각자 바라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해야 다수의 행복 또한 늘어난다는 것이다.

남성성을 위해

그런데 울스톤크래프트와 밀 커플의 주장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당시 보편적 인간의 모델의 기준이 남성에 맞춰져 있었던 까닭에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회복하는 길이 곧 남성으로의 동화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대에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남성', '예민하며 감성적인 여성' 등으로 규정지어진 본질적인 성차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던 때였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남자와 동등한 것을 획득하는 것이 곧 평등해지는 것이라는 입장에 서서, 당시 통념적으로 말하던 남성적 가치가 여성적 가치보다 훨씬 추구할만한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이는 뮬란이 남장을 하고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평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 어떻게든 ‘전형적인 남자’를 흉내 내며 고군분투하는 것과 이어진다. 주먹질로 대신하는 과격한 인사, 최대한 남자같이 보이려 과장한 몸짓과 표정, 그리고 (너무나 어색한) 침 뱉기 등등 뮬란은 끊임없이 남성성을 획득하려 노력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20세기로 넘어가도 이러한 경향을 한동안 유지하게 된다. 20세기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선도한 인물은 미국의 베티 프리댄Betty Friedan이다. 그녀의 활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때, 전기 동안은 63년에 출판된 그녀의 유명한 저서 <The Feminine Mystique>를 중심으로 하며,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전형인 남성과의 동일시 성향을 보인다. 프리댄은 초기에 "여성에게도 남성이 갖는 권리를 동등하게 달라"고 요구하면서 이러한 요구의 정당성을 위하여 여성도 남자와 동일한 역할을 하고 동일한 노동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아직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시절에는 사적 영역이 남성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에는 여전히 사적 영역은 여성의 소유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여성은 가정 일도 완벽하게 돌보면서, 바깥일도 잘해야 남자와 동일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는 여성들이 직장에서도 성공하면서 가정 일도 완벽하게 돌봐야 한다는 ‘수퍼우먼superwoman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너 같이 약한 녀석은 필요 없다"며 짐 싸서 나가라고 부대장에게 혼난 날, 밤을 새워 장대를 오르고야 만 뮬란

뮬란 또한 자신의 ‘여성성’ 때문에 군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그들—남성—의 기준에 맞춰진 모든 것을 해내려고 노력한다. 뮬란은 각고의 노력 끝에 남자들에게도 어려운 ‘양손에 바벨 묶고 맨손으로 장대 오르기’를 시작으로, 화살 쏴서 과녁 맞추기, 물동이 지고 언덕 오르기, 포탄 피하기 등등 결국 남성 중심의 사회인 군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모두 획득한다.

결과는? 대성공. 이제 뮬란은 부대에서는 물론 상관에게도 ‘동등한’ 동료로 인정받고 군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물론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들켜서 진짜로 내쫓기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군대에서 그들의 동료로 인정받게 된 뮬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바탕에 놓인 자유주의의 보편적 인간상이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는 탓에 야기된 ‘남성으로의 동화’는 결코 여성의 해방구가 되어줄 수 없었다. (오히려 독박육아와 독박가사의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한 듯하다) 이후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 모두가 서로의 특성을 개발開發하여 결과적으로는 인류 모두가 ‘양성성’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참고로 이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근본이 자유주의 사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유주의의 이상은 ‘전인적인 인간—여러 면이 두루두루 발달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치명적인 한계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통해 보편적인 여성 전체의 권리와 지위가 향상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과다. 또한 맨 처음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으로서, 이후에 전개될 페미니즘 논의의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는 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뮬란>은 '페미니즘'의 'ㅍ'자도 거론되지 않던 당시 한국 사회에 살던 내가 여자아이로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뮬란>에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녹아들어 있고,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불모지에서 가장 먼저 주장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보다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즘이 가능해지기 전에—여성 차별적인 사회 구조 및 인식이 사람들에게 너무 깊숙이 뿌리 박혀 있어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때에—‘평등’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할 수 있었던 주장이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성별 간 평등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평등에 대해서 논의할만한 여력이 없던 20년 전 한국은 이런 점에서 보면 18세기 영국의 상황과 아주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 닮은 곳은 어딜까? 페미니즘의 불모지로부터 벗어난 것 같긴 하지만, 아직 그리 먼 곳까지 당도한 것 같진 않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다음 단계라고 할 수 있는, 60년대 미국에서 대두된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이 오늘날 한국에서 거론되는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음 글은 급진적 페미니즘과 <탈코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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