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다른 연극 시즌 투 3.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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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연극 시즌 투 3. 너에게

새입자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6월20일, 제 2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개막했다. 지난 해에 이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연극들을 소개한다. 인터파크에서 모든 연극을 예매할 수 있으며 핀치클럽은 4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전진아

시놉시스

아기는 태어났다. 아기는 죽어있다. 이 연극은 아기의 감탄으로 시작한다. 아기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이 돌로레스와 엘레나와 모건을 만난다. 아기와 서로를 만난 세 사람의 삶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향하는데…

왜 남자가 여기에?

시놉시스를 읽고 생각했다. 아, 저 아기가 내게 교훈을 주겠군. 출연진을 보니 아기 콘스탄티노플은… 남자다. 왜지? 중요한 역할인 것 같은데, 왜 남자가 맡았지?

나는 일단은 이 연극제와 여성 예술가들을 신뢰하기에 쉽게 ‘저건 남자가 아니어도 됐잖아’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연극이 설명해주길 바랐다. 그가 규탄 대상으로서의 남성이든, 이성애 관계를 위해서 존재하든, 상관없었다. 내 궁금증이 먼저고, 작품성은 나중이야.

그러나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절망했다. 이 연극의 주된 키워드는 예상치 못하게 유산과 낙태였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해 경험도 관심도 없었고, 관심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 아기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늘 그랬듯이 괴로움과 절망은 사후해석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이 아기의 젠더는 남성이 아니랍니다

ⓒ전진아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은 젠더리스한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죽어서 태어난 지 2일이 된 아기'다. 사람들은 ‘남자 아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사회가 부르는 방식일 뿐, 아기 자신은 젠더정체성이 특정하지 않다.

가령, SM플레이로 돈을 버는 10대 여성 돌로레스의 방에 들어가, 얌전히 매니큐어를 받으면서, 돌로레스가 “너 이런 거 남자답지 않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 라고 물어보자, “남자다운 게 뭐야?” 하고 반문한다. 극 초반이므로 관객은 ‘넌 남자다운 게 뭐라고 생각하는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콘스탄티노플은 공손한 어조로 몇 번이고 해명한다. 

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는 게 많아. 네가 좀 알려줄 수 있어?
일러스트 이민

리터럴하고 공손한 존재

그러므로 관객은 점차 그의 질문이 말 그대로(literal)라는 걸 알게 된다. 형식면에서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그 말들은 설명이나 설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반응’이나 ‘표현’일 뿐이다. 가령, 돌로레스가 “빡친다”라는 단어를 알려주고나서,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난 채 약속을 지키지 않자, “나 빡쳤어. 나 지금 엄청 빡쳤어.”라고 외치며 발을 구른다.

그의 말들이 유달리 신선한 것은, 콘스탄티노플은 엄연한 캐릭터임에도,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원래의 성격(Character)이란 게 없다는 것이다. 그는 완전히 열린 존재로서, 방금 입력된 것을 몇 번이고 내뱉는, 이제 막 만들어지기 시작한 인간이었다.

여성 연대 속에서 만들어지는 아기

ⓒ전진아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처음부터 죽어있었고, 결국 완전히 죽는다. 생애를 통틀어 만난 사람은 오직 세 여자 뿐이다. 세 여자에 의해 태어나고, 길러지고, 죽음을 목도당한다. 나는 마이클 밀스 감독의 영화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를 떠올렸다. 서사의 중심에는 남자 아이가 있지만, 강력한 여성들이 손을 맞잡고 그를 함께 (페미니스트로) 키워내는 영화를.

그러나 연극은 그 영화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관객에게 연대의 참의미를 알려주기 위한 장애물이 있었다.

실체라는 장애물

역할을 맡은 배우는 체격이 왜소하지 않은 성인 남성으로, 의상은 아기가 입는 기저귀를 최대한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활동성 있게끔 재현한 흰 쇼츠(짧은 반바지)와, 흰 숄이 전부다. 그는 상반신 전체와 하반신 대부분을 드러낸 상태로 무대를 활보한다. 그렇다. 아기의 그 당당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걸음걸이로 말이다.

관객은 눈 앞에 보이는 성인 남성의 육체를 아기로 환원시키며 극을 봐야만 했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나처럼 모종의 불쾌감을 참으며 어떻게든 견딜 수는 있었겠지만, 아마 일찍이 선입견을 내려놓고 그냥 한 인간으로 바라봤다면 관람은 무척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 연극은 그래서 어려웠다. 관객에게 어려운 주문을 했으므로. 눈 앞의 것에 머물지 않고, 그 다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라.

나아가서 선긋기의 연대를

페미시어터 나희경 대표는 제 2회 페미니즘 연극제를 연대라는 주제로 열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번 연극제는 포함과 배제의 선긋기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연결과 포함의 선을 잇는 연대를 이루고자 한다” 나는 포함과 배제라는 말에서 멈춰섰다.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다짐하며 짐짓 장엄하게 페미니스트를 선언한 지 3년째, 나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편협해지고 있었다. ‘남자 배우가 페미니즘 연극제에 올라오다니.’ 내가, 누굴, 어디다가, 포함하고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처음의 예상대로, 혹은 바람대로, 나는 교훈을 얻었다. 이런 교훈은 나에겐 소중하지만 타인에겐 우스꽝스러울 수 있음을 안다. 죄의식에 시달리는 엘레나에게 콘스탄티노플이 그랬듯, 연극은 단지 내게 질문만 던졌을지도 모른다. "미니즘이 뭐야?" 페미니즘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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