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했다

알다성폭력

그들이 말했다

김다정,이가온

그들이 말했다.

혹은, 말하지 않았다.

트위터의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공론화된 성폭행 가해 사실에 가해자들은 지나치게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책임을 전가한다

저의 이성에 대한 습벽을 이 기회를 통해 통렬히 깨달았습니다.

또한, 제가 이성에게 행한 행동들을 동료들에게 언급하지 않거나 단순한 호감관계로 포장하여 이러한 저의 습벽이 은폐되도록 했던 교묘한 처신에 대해서도 반성합니다.

이러한 신체접촉은 저의 평소 습벽과 결합되어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큐레이터라는 사실이 작가에게 주는 영향을 책임 있게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습벽이 피해자의 상처로 연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습벽’. 흔히 쓰지도 않는 단어라 오랜만에 국어사전을 열었다.

버릇. 오랫동안 자꾸 반복하여 몸에 익어 버린 행동.

일민미술관 함영준 큐레이터는 자신의 반복된 성추행 및 성폭행 전력을 ‘습벽’이란 단어에 기대어 죄의 무게를 스스로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사과문의 말미에 전문가와의 상담 등을 받겠다고도 언급했다. 자신의 행동이 완전히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정신이상적 행동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나서 공개한 문자메시지와 대화 내역 등에 따르면 그의 괴롭힘은 ‘습벽’ 따위로 포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복적으로 ‘나에게 이딴 식으로 굴면 안 되지’ 등으로 피해자를 협박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습관이 아니라 의도적인 발화다. 그가 저지른 성추행 및 성폭력은 버릇이 아니다. 범죄다.

가벼운 해프닝 취급한다

내 일로 인해~ 상처받은 모든 분께 사과하고 싶어요. (...) 부디, 나의 철모르는 - 뜨거운 생에 대한 갈망을 접으면서 드리는 진정한 맘으로 받아주세요.

스탕달이 그랬듯 살았고 썼고 사랑하고 살았어요. 나로 인해. 누군가 맘 상처 받았다면 내 죄겠지요. 미안해요~

박범신 작가다. 그의 물결치는 문장에서 사과문이 가져야 할 진정성은 어디론가 훌훌 날아갔다. 그 자리엔 그저 가벼운 해프닝에 사과인 듯 아닌 듯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아재만 남았다. 문단 내의 권력자인 그를 고발하기 위해 나선 피해자들의 용기가 무색해지는 순간이다.

법적 대응을 운운한다

저는 이미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자가 되어 있습니다. 직장은 사직하였고 제가 가진 명예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 하지만, 법적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저는 저의 결백을 주장할 것입니다. 저는 결백하기 때문입니다.

 미성년자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이익 씨는 ‘사과문’도 아닌 ‘입장표명문’을 통해서 자신의 ‘법적’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의 손해와 고통을 과대포장한다

사죄드립니다. 저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께 사죄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부적절한 언행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죄문 이후로, 올해 예정되어 있던 산문집과 내후년에 출간 계획으로 작업하고 있는 시집 모두를 철회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SNS 계정을 닫겠습니다.

저의 잘못으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시집 <목숨>, <식물의 밤> 등을 출간한 박진성 시인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산문집과 시집의 출간 ‘계획’을 ‘철회’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죄를 표현했다. 그것이 그에게 어떤 실질적 손해를 끼쳤는가? 실재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실재하지 않는 미래의 시집은 맞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제자 성희롱 의혹이 제기된 최 모 시인은 아무런 사과도,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고 무서운 시대

우리 여성들은 이상하고 무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은 언제나 이상하고 무서운 시대에 살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 여성은 더 이상하고 무섭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사회는 급격히 변하지만 여성을 대하는 방식에는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중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강간이 하나의 농담거리나 에피소드처럼 취급되면서 마치 자연스럽고 가벼운 것인 양 취급되는 강간 문화의 폐해를 지적한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시간이 흘러도 그러한 강간 문화가 생기고, 대중문화에서 전유되며 관음적으로 소비되는 데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간 문화는 여성을 향한 착취와 폭력의 무게가 실제로 가벼운 것인 양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 버린다.

습벽이다. 해프닝이다. 결백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터져 나온 각종 위계질서 내 성폭력, 성추행에 대한 가해자들의 한심한 대응은 그 강간 문화가 깊숙히 자리잡은 2016년의 한국을 보여주는 낯부끄러운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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