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9. 백인이 아니라서

생각하다영문학인종차별

이상한 나라의 영문학자 9. 백인이 아니라서

숙희

일러스트레이션: 킨지

대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영문과 대학원생

한국 대학에서 영문과 학부생이던 시절,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 중에 “고급영어글쓰기 1”과 “고급영어글쓰기2”가 있었다. 나는 성적을 후하게 주기로 소문 난 외국인 교수의 수업을 들었는데, 그는 우리 과에서 “머리 숱 많은 주드 로”로 알려진 유명인이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첫 수업을 듣던 날 주드 로 2.0을 보고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그가 너무 젊었기 때문이다. 학계의 위계 질서나 풍토에 무지했던 나는 주드 로 2.0이 너무 똑똑해서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도 받고 교수 임용도 (왜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받은 줄로만 알았다.

지금 와서 깨달은 것이지만 주드 로 2.0은 아마 대학원생이었을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아시아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돈을 벌고자 했던 흔한 백인남1이었을 수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시간 강사 일을 하다 보니 연구할 시간이 없어 논문 출판 등의 성적을 내지 못해 정식 교수 임용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시간 강사 일을 하는…(이하 생략) 무한 루프에 빠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주드 로2.0의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몇 년 후에 내가 그의 입장이 되어 미국에서 똑같은 수업을 가르치고 있으리라는 것을.

영문과 대학원생들은 학부 1학년생들의 글쓰기 수업을 맡는다. 영문과 수업으로 분류되는 일이 많지만 사실 문학 보다는 수사학 내지는 작문법을 가르치는 수업인데, 그렇다 보니 강사 경험이 없는 대학원생들의 경우 박사과정 입학 후 1년 내내 문학 연구만 하다가 갑자기 수사학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처한다(조금 더 정돈된 박사과정 프로그램에서는 미리 교육학 수업을 제공한다). 나도 그랬다. 학부를 다니던 내내 토플 등의 영어 과외를 했지만, 1:1로 시험 준비에 최적화 된 공부를 시키는 것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 아닌가.

일러스트 킨지

연약한 백인남성성,
질병인가요

무엇보다, 주드 로 2.0과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는 한국에 온 백인 남자였고, 나는 미국에 온 동양인 여자다. 미국인들은 동양인을 무조건 어리게 보는 데다, 심지어 한국인도 동안이라 평가하는 내가 주로 백인으로 이루어진 수업을 맡아 가르쳐야 한다니. 시작도 하기 전에 걱정부터 들었다.

학교에서 진행한 아주 최소한의 워크샵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백인 남자들의 특권의식 또는 무식함만 확인하는 장이 되었다. 강사 윤리 워크샵은 한시간 내내 (백인) 남자 조교 또는 강사가 (백인) 여자 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만 반복했다. 제도는 언제나 헤테로섹슈얼 백인 남성을 중심을 개편되고, 인간의 기본 값을 시스젠더 백인으로 상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체감했다.

물론 내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강사가 퀴어고 학생이 헤테로 섹슈얼일 때, 강사가 유색인종이고 학생이 백인일 때, 강사가 여성이고 학생이 남성일 때 (혹은 나처럼 강사가 퀴어 유색인종 여성일 때) 강사-학생 간의 권력의 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재했다.

강의 계획서 작성을 위한 워크샵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는데, 모든 워크샵이 우리 프로그램의 무수히 많은 백인 남자 대학원생들의 백남스러움을 재확인하는 장이 되었다. 3일 간 진행된 워크샵의 첫 날. 강의 계획서를 쓸 때 출석이나 참여도, 전자기기 사용 여부 등을 명시하고 수업의 방향성을 서술하는 ‘수업 정책’ 부분을 다뤘다. 백남1은 강의계획서에 자크 데리다와 폴 드만 같은 유럽의 철학자들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인문사회계열 학생만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데리다처럼 독해가 어려운 학자로 학부 1학년생의 글쓰기 강의 계획서를 시작한다니? 학생은 안중에도 없고 본인의 “깊은 학식”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뻔했다.

이제는 놀랍지 않겠지만 보스턴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보면 자의식 부족한 백남이 화수분처럼 끝없이 등장한다. 다른 학교에서 석사를 하며 수업을 해봤다는 백남2가 세워 온 수업 정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격했다. 수업에 5분 이상 지각을 3번하면 결석 한 번으로 치고, 수업 중에 절대 교실을 떠나서는 안되며 교실을 떠날 시 결석으로 처리한다는 조항을 강조했다. 끝도 없이 비장애인 중심적인 수업 정책이었다.

사실 75분 수업 내내 교실에 앉아있는 건 비장애인에게도 힘든 일이다. 백남2의 수업 정책을 읽는 순간, 그의 수업을 듣다가 탐폰이나 생리대가 새면 그 학생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런 반박을 제시하자, 백남2는 강사로서의 권위와 수업 장악력을 운운하며 ‘웅앵웅 초키포키’했다. 학생이 수업 중에 잠시 교실을 떠나는 것으로 흩어질 수업 장악력이라면 본인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돌아보는 게 우선이 아닌가 싶었지만, 여기서 말을 더 보탰다가는 취약한 백인남자의 멘탈이 무너지는 여파를 견뎌야 할 것 같아 참았다.

얼마나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고 그것을 채우고자하는 비뚤어진 욕망이 가득하길래, 갓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권위”를 내세우는 건지 한심했다. 이쯤되면 ‘연약한 백인남성성’은 병이 아닌가 싶다. 정작 충실해야 할 강의계획서 자체는 얼마나 진부하고 고민의 흔적이 전무한지. 2000년대 초반에 누군가가 만들어 둔 것을 수정도 않고 가져오는 백인들이 많았다. 1967년에 개봉한 영화 <졸업The Graduate>를 보는 수업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 강의 계획서에 명시된 텍스트 중 90%가 백인 작가의 것이었다.

백인이 아니라서
하는 고민들

일러스트 킨지

대학에 갓 도달한 학생들이 대체로 백인 작가의 텍스트로 채워진 글쓰기 강의 계획서를 마주할 때, 그래서 학생들이 자신의 글쓰기를 모방해야 하는 모범적인 글로 백인의 글만을 제시할 때, 강사는 은연 중에 바람직한 학문적 글쓰기는 백인의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유색인종과 퀴어 작가의 텍스트로 강의 계획서를 짜리라고 결심했다. 학교의 워크샵은 거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다른 유색인종 대학원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대학원생들은 다른 종류의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유부녀인 척 하라는 농담 섞인 진담부터, 학생 면담시간은 반드시 다른 사람(가급적이면 백인 남자)이 연구실에 있는 시간으로 잡으라는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언도 있었다. 수업에 무엇을 입고 가면 좋은지, 학생들이 나를 부를 호칭은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대학원생은 교수가 아니므로 “교수님Professor”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애매하다. 하지만 학계에서 늘 정당성을 의심받는 것이 유색인종 여성이다 보니, 선배들 중에는 일부러 학생들이 교수님이라 불러도 정정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하나 하나 충고를 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교실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말하고 공간을 채울지 모든 것에 신경을 써야했다는 말이다. 준비된 상태로 교실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은 기뻤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게나 철저히 준비를 해야한다는 것이 (그러고도 모자랄 것이라는 점이) 슬펐다.

수업은 때로는 물 흐르듯이, 때로는 어렵게 흘러갔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온 “외국인”이 영어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것에 의구심을 가진 학생들도 있었고, 유색인종 페미니스트와 LGBT 작가들을 “견디지 못해” 내 수업을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며 백인으로서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과 자괴감을 어찌할 바 모르고 내게 위로를 바라는 학생도 있었다. 내게 강의를 몇년이나 해왔는지 묻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시안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업을 신청한 유색인종 학생들이 있었다. 인종차별과 호모포비아 등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글을 쓸 뿐만 아니라 학내의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학생들이 있었다. 흑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에세이 모음집에서 에세이 하나를 텍스트로 지정했는데, 스스로 에세이 모읍집을 전부 읽어 온 학생도 있었다. 그런 학생들과 만나며 학자이자 교육자인 나의 책임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유색인종 여성이라 나는 백인 남성 동기들에 비해 감당해야 하는 감정 노동이 많았다. 학교에서 당하는 각종 층위의 인종차별에 힘겨워하며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감정 소모가 심해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유색인종, 네이티브, 퀴어, 장애인, 노동자 계층의 작가가 쓴 글을 찾기 위해 구글 검색만 몇시간씩 했다. 강의 계획서를 만드는 데에 몇 주를 고민했는지 모른다. 인종이나 젠더, 섹슈얼리티 같은 "민감한" 주제에 토론하다가 누군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경우를 대비해 이미 알던 내용도 수십 번 복습했다. 반면, 나와 연구실을 함께 쓰던 백인 남자 동기는 아무 수업준비도 하지 않은 채 숙취에 절어 수업에 들어가고는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해야하는 가에 대해 고민이 커졌다. 시간강사조차 아닌 대학원생인 내가 받는 돈은 한없이 모자르다. 나는 대학원에 와서 한 학기를 제외하곤 파트 타임 일을 쉬어 본 적이 없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도 체력도 모자랐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에세이를 채점하며 궁극적으로 고민하게 된, 그리고 지금도 고민하는 지점은 글쓰기의 미학 그 자체이다. 아무리 다양한 작가들로 구성된 강의 계획서를 만들어도, 대학교라는 환경에서 "학술적인 글"로 받아들여지는 글의 종류는 한정적이다. "올바른 문법"과 "올바른 단어"를 사용한 "세련되고 직관적인" 글, 백인의 글쓰기가 여전히 학술적 글쓰기의 절대적인 기준, 모범적인 미학이 된다. 흑인 방언(AAVE)을 쓰는 학생들이나 다른 문화권에서 왔기 때문에, 혹은 이민자 가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미국 학계가 선호하는 두괄식 서술이나 “형식적인" 어조가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대학의 글쓰기 수업을 거쳐 백인처럼 말하고 쓰고 생각할 것을 강요 받는다. 자신이 편한 방식, 좋아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면 학술적이지 못하다거나 지능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기 때문이다.

단순히 강의 계획서에 더 많은 유색인종, 퀴어, 여성 등을 포함한다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형식" 그 자체가 백인에 의해 정의될 때, 나는 어떤 글쓰기의 형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내가 쓰는 글조차 은연중에 백인의 미학과 형식을 따른다면, 나는 어떤 식의 실천을 할 수 있는 것일까? 핀치에 보내는 원고를 편집자가 수정한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한글로 쓰는 글조차 얼마나 영어의 문법에, 백인의 형식에 물들었는지 깨닫곤 한다.

요즘 나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더 "어려운" 글을 보여주곤 한다. 대학원생인 내가 읽는 책이라고 소개하면 학생들은 두려워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아직 1학년인 자신들에게 "수준 높은" 글을 소개한다는 것에 기뻐한다. 지난 화에 언급한 <항적 속에서In the Wake>와 같은 퀴어 흑인/유색인종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글을 주로 소개한다. 예시로 든 <항적 속에서>에서는 특히나 시적인 서술이 돋보이는 학술서인데, 학생들은 책에서 드러나는 학술적 생각의 깊이에 놀라고, 동시에 학술적 서술이 얼마나 다채롭고 다양한 채도로 존재 할 수 있는지에 기쁨을 표한다. 동시에 학생들은 자신의 글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다.

정답은 없다. 나보다 덩치 큰 백인 남학생이 성적에 불만을 표시하러 연구실에 올 때 나는 여전히 두렵다. 유색인종 학생들이 캠퍼스에서 당한 차별을 이야기하며 눈물 흘릴 때 나는 휴지를 건네고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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