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길이의 정치학

생각하다칼럼

머리 길이의 정치학

루인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며칠 전 서울인권영화제와 한국퀴어영화제가 함께 하는 네 번째 공동상영회 <퀴어, 인권> 행사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트랜스와 관련한 영화, 향정신질환 의약품과 제약회사, 그리고 유럽과 미국 정치권과의 카르텔을 다룬 영화, 팔레스타인의 상황과 난민 의제를 다룬 영화, 아일랜드의 동성결혼 법제화 과정을 다룬 영화 등이 상영되었다. 모든 영화가 중요한 의제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트랜스를 다룬 영화 중 단편 영화 <첫 외출>(김혁 감독, 2018)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정말 그렇게 자르게요?

영화 <첫 외출>은 태어날 때 여성으로 지정받았지만 자신을 ftm/트랜스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주인공 진수가 머리를 자르기 위해 외출을 하고, 그 과정에서 오랜 친구 나영을 만나면서 겪는 일을 다루고 있다. 진수는 몇 달을 집에 머물며 외출을 거의 하지 않다가 미용실에 가기 위해 외출을 결정한다.

진수의 머리 길이는 숏컷보다는 단발에 가까운 길이였는데, 진수가 타고 있던 버스의 기사는 그런 진수를 보고 “아가씨”라고 부르며 당연히 여성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미용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용사는 진수에게 여성용 헤어스타일 샘플 사진을 보여주며 어떻게 자를 것이냐고 물었다. 진수는 남성용 헤어스타일 샘플 사진을 요청한 뒤 자르고 싶은 스타일을 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용사는 여러 번 남성용 헤어스타일로 자르는 것이 맞냐고 확인한다.

이 확인은 미용사가 진수에게 머리를 자른지 얼마나 되었느냐는 질문과 연결된다. 진수는 넉달 정도 되었다고 답하고 미용사는 놀라워한다. 머리를 넉 달 만에 자른다는 점에서, 또 4개월 전에도 머리를 매우 짧게 잘랐을 것이라는 점에서.

남자친구에게 허락 받으셨어요?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미용실에서 머리 길이, 헤어스타일과 관련한 미용사의 부정적 반응은 ftm/트랜스남성이나 젠더퀴어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겪어본 적 있는 일이다. 태어날 때 여성으로 지정받은 사람이 머리카락 길이를 매우 짧게 자르는 일은 투쟁이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이 머리를 짧게 자르기 위해 미용사와 싸운 경험이 있는데 ‘여성’이 머리를 짧게 자르면 안된다는 이유에서다. 한 친구는 숏컷을 하기 위해 미용실에 갔는데 그때 미용사에게 “남자친구에게 허락 받으셨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고, 겉보기에 ‘여성’으로 통하는 사람은 당사자의 젠더 범주가 무엇이건 당연히 여성이어야 하고,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그리고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여성이 ‘속해 있는' 남성(아버지, 남편, 남자친구)의 소유라는 인식 등 한국 사회에 만연한 지배 규범을 압축하고 있는 대단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여성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 남자친구와 이별을 해서 그렇다는 식의 오래된 통념 또한 이성애 규범과 여성성 규범이 긴밀하게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머리 자르는 값의 정치

머리를 자르며 겪는 불쾌함은 미용사가 머리를 어떻게 잘라 줄 것이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진수는 카운터 앞에서 당황하는데 “Man 12,000 / Woman 15,000”이라고 적힌 문구 때문이다. 진수는 잠시 고민을 하다 12,000원을 낸다. 미용사는 15,000원이라고 말하고 진수는 지금 이 머리 길이를 보고도 그러냐고 항의한다. 미용사는 서비스의 가격을 머리 기장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 영화에 나온 대사지만 실제 듣기도 하는 이 말은 정확한 근거 없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금액을 요구받는 부당한 가격 구조를 폭로한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이 부당한 가격 구조는 젠더 범주와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가격 구조에서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 어느 쪽으로도 정체화하지 않는 트랜스젠더퀴어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이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재생산하는 가격 구조는 트랜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 모두를 이 사회의 부적절한 구성원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로 만든다. 그럼에도 머리를 자르고 나면 결제를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어느 한 쪽의 금액을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은 트랜스젠더퀴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미용사의 판단에 더 많이 의존하고, 트랜스가 직접 선택한 것일지라도 그 선택이 자신의 정체성을 배신할 때가 많다. 진수는 자신이 남성이기에 혹은 여성이 아니기에 12,000원을 지불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미용사는 15,000원을 지불하라고 요구한다.

젠더 범주는 자신의 정체화 과정을 통해 구성되지만 그 정체성은 타인에 의해 자주 부정된다. 미용사의 이 태도는 진수의 젠더 범주를 결정할 권한은 진수가 아니라 미용사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진수의 정체성을 모르는 친구 나영이 대신 3,000원을 지급하며 어쨌거나 미용실에 벗어날 수 있게 되는데, 진수에게 나영의 행동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위다. 미용실의 가격 구조는 ‘여성’에게 부당하게 과중한 비용을 부담짓는 구조이자 트랜스젠더퀴어를 비롯한 비규범적 젠더 범주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화 장치다.

미용실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곳이 아니라 이 사회에 적절한 젠더 규범을 재생산하고 규범에 벗어난 존재를 관리하는 공간이다. 미용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공간이 미용실처럼 젠더와 무관한 것처럼 존재하지만 젠더 규범을 첨예하게 감시하고 규율하는 곳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는 지속적 비판을 통해 해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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