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1. 대중탕에 가다

생각하다예술

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1. 대중탕에 가다

허윤

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대중탕에 가다

지금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부산을 대표하는 작가 방정아의 <믿을 수 없이 무겁고 엄청나게 미세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6월 9일까지). 방정아 작가는 회화를 기반으로 한 민중미술을 선보인 것으로 잘 알려졌다. 이번 전시회는 ‘일상’ 시리즈를 통해서 여성의 삶과 성장을 그림으로 옮겼다. 이십대의 한 여성이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종부가 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회화와 설치 작품 120여 점은 오랫동안 활약해온 작가의 저력을 보여준다.

특히 전시장 곳곳에 목욕탕과 관련된 사진, 구조물 등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목욕탕의 샤워 시설을 설치한 뒤 칸마다 영상 작업을 송출하고, 관람객은 목욕 의자에 앉아 샤워기 앞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형태다. 작가가 목욕탕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보여주는 지점이다.

방정아는 목욕탕을 통해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급한 목욕>(1994)은 방정아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는 프레임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온몸에 멍이 든 채 급히 목욕을 하고 있는 중년 여성과, 그녀를 뒤로 한 채 목욕탕 청소를 하고 있는 여성. 관람객은 이 두 여성을 보면서 그 사이의 공간에 눈이 멈춘다. 

<급한 목욕> , 방정아, 1994

이 그림에는 작가의 짧은 설명이 붙어 있다. 상습적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남편을 살해한 후, 언론이 이웃들과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참 조용한 사람이었는데, 공중목욕탕에서 한 번도 못 봤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방정아는 사람들이 모두 떠난 폐점 시간에 맞춰 대중탕에 와서 급히 목욕을 하는 여성을 상상했다. 시퍼렇게 멍든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조용하고 착한 여자는 결국 계속되는 폭력에 시달리다 남편을 죽이고 말았다.

방정아의 그림은 거대 서사의 바깥에 있는 여성을 상상한다. 역사의 주체도 아니고, 모성의 상징도 아닌, 한 인간을 그려내는 것이다. 아침에 구로공단에 출근하기 위해 찬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여성들(<아침버스를 기다리는 구로공단의 여성들>(1991))이나 둑에 앉아 있는 세 여성(<아무말 하지 않아 좋았어>(2016)) 등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다. 중차대한 의미는 없는 우리의 일상은 커다란 화폭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된다. 그렇기에 그 일상과 가장 맞닿은 공간인 대중탕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

일요일 아침, 동래 온천장

그리하여 대중탕에 갔다. 지금은 해운대 온천에 밀려 손님이 별로 없다던 동래 온천장. 그렇지만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가득했다. 젊은 여성이 대중탕을 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드문 일이다. 대중탕에는 중장년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조그맣게 잘라진 비누와 얇은 수건을 한 장 준다. 크고 작은 다양한 몸들이 30cm도 되지 않는 간격으로 즐비했다. 여름 해운대 바다도 이 정도의 인구밀도는 아닐 듯싶을 만큼 많은 여성들이 모여서 저마다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있었다. 쉽사리 몸을 담글 수도 없는 냉탕 샤워기 아래에서 마사지를 받는 백발의 여성들도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나라시’(세신)가 진행 중이었다. 벌겋게 익은 얼굴에 간 오이를 붙이고, 몸을 맡긴 채 엎드려 있는 여자들! 아로마오일이나 고급 팩 없이 이루어지는 전 과정에 여성들의 기술과 힘이 있었다. 예쁜 속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들은 자신의 기술로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다. 김이 서린 욕탕에서 한눈에 예약한 고객을 알아보는 눈썰미, 때를 벗겨내는 기술 등은 몸을 자산으로 일구어낸 자기만의 세계다.

뽀로로, 헬로키티 등이 그려진 방수 방석을 챙겨 와 앉아서 몸을 밀고 있는 여성들도 있었다. 부황 자국과 주름이 가득한 몸들을 헤치고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열탕을 즐기고 있자면, 목이 타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준비하는 것이 얼음이 가득한 감식초와 커피였다. 뚜껑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얼음을 넣어서 탄 감식초는 목욕을 마칠 때까지 한 시간 내내 시원했다. 모든 것은 여성들이 원하는 대로! 목욕탕에는 여성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여성의 몸을 가리고 숨겨야 할 것으로 이야기하는 한국문화에서 대중탕은 매우 예외적인 공간이다. 교복 속에 속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검사하고,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단속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거리낌 없이 타인에게 보여주며, 모르는 여성들이 서로 때를 밀어주고, 샤워공간을 양보하면서 말을 섞는다. 그렇기 때문에 목욕탕은 사는 지역, 경제적 계급, 정치적 지향 등에 관계없이 가장 평등한 공간이 된다.

<아무말 하지 않아서 좋았어>, 방정아, 2016

특히 목욕문화가 일상에 자리잡혀 있는 부산에서는 더욱 그렇다. 흔히 부산을 ‘우리가 남이가’의 남성적 도시로 재현하지만, 사실 부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여성들의 생명력이다. 바다와 몸을 매일 돌보는 여성들을 각종 시장에서, 목욕탕에서 만날 수 있다. 민중미술 화가로 알려진 작가 방정아가 부산의 여성들과 목욕탕을 배경으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부산시립미술관에 가서 자신의 일상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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