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앞길 막는 사회 7. 여성을 내모는 성폭력

알다커리어여성의 노동성차별

여자 앞길 막는 사회 7. 여성을 내모는 성폭력

사월날씨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대학의 성평등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어렴풋이 알던 것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회가 눈치 보고 보호하는 대상은 언제나 여자보다 남자라는 점이 그랬다. 조직의 결정권자-주로 남성-무리는 성폭력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감정이입 하는 데 능하며, 그로 인해 사건은 정의롭지 못한 해결을 맞는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조직생활, 대인관계, 과제수행에까지 어려움을 겪는다. 조직은 피해자의 회복보다 사건 처리에 급급하고, 웬일인지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다. 그리하여 조직이 내치는 존재는 가해자 남성이 아니라 피해자 여성이 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위계

성폭력이 비단 조직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 곳곳에서,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성폭력의 위험은 존재한다. 그러나 조직 내 성폭력이 악질적인 이유는 위계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에서의 권력 관계는 이미 성별로 인해 한쪽으로 기울어있다. 거기에 조직 내 위계가 더해지는 것이다. 나이 권력이 더해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문제를 인식하기도, 말하기도, 항의하기도 어렵게 되어버린다. 회식에서 상사가 내미는 술잔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사의 무리한 부탁이나 개인적인 심부름을 거절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면서 유독 성폭력에 있어서만큼은 상사의 행동을 왜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았냐고 피해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사람들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점심을 먹으려 식당 앞에 줄을 서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남자 과장과 남자 대리, 나 셋이서 한 줄도 아니고 두 줄도 아닌 삼각형 모양으로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 안을 들여다보며 거의 다 먹어가는 사람들이 있는지 살피는 중이었다. 그때 남자 과장이 남자 대리에게 말했다. “저 여자 맛있겠다. 저렇게 생긴 애들이 맛있어.” 대사를 그대로 옮기기도 끔찍하다. 나는 온몸이 굳어 그대로 바라보던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대리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들려요.” 했지만 과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한테 들리든 말든 상관없었겠지, 어쩌면 내가 듣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고.

회사에 다니는 동안 두려워하고 싫어하고 또 인정받으려 했던 사수, 업무 중에도 전화기를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는 미성숙한 분노 표출을 자신의 위세로 여기고, 일을 가르치겠다며 뒤에 서서 내가 앉아 있는 의자를 발로 툭툭 차던 그 사람에게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했어야 좋을지 지금도 모르겠다. 내가 과장에게 그렇게 쫄아있지 않았다면, 좀 더 능글맞게 굴 수 있었다면, 살짝 웃으면서 “과장님, 그거 성희롱이에요.” 할 수 있었을까?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지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 말을 듣고 웃을 자신이 없다.) 표정을 굳히고 눈이라도 맞추어야 했을까? 그것도 어렵다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놀라는 표현이라도 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식당 앞에 줄 서 있던 풍경, 그날 과장이 입었던 옷, 대리의 안경테가 이렇게 생생하게 남아있지 않을까. 지금의 나라면, 그러니까 과장에게 쫄아있지 않은 상태라면, 무표정으로 “그런 말 하면 큰일 나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대리의 협조를 받아 성희롱 증거로 모아놔야지, 일단은. 분명 증거들이 쌓일 테다.

일러스트 이민

산업재해

그런데 충분히 증거가 쌓였다고 판단했을 때, 회사 인사팀 혹은 회사 밖의 기관에 신고를 하려면 나는 얼만큼의 용기를 내야 할까. 회사에는 나보다 과장과 오래 알고 더 친밀한 관계를 쌓아온 사람이 많고 사람들은 나를 보며 수군댈 것이다. 신고내용을 알고 나서는 뭐 그런 걸로 신고를 하냐고, 나를 예민하고 튀는 사람으로 여기겠지. 몇몇은 나를 응원할 테지만 그것도 너무 두드러지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회사 안의 연민과 동정은 내가 아니라 과장을 향할 것이고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인식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떠오를 것이다.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부서에서는 정당한 해결보다는 빠른 해결을 원하며, 둘 중 누군가가 자리를 이동해야 할 때 업무 경력이나 중요도 등을 들이대며 은근히 내게 이동을 종용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나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더디게 되고 다른 사람과의 협업에서 위축된 상태로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세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테고 처벌이 약하면 스스로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나를 충분히 돕지 않는 조직에 대한 실망이 남을 것이다.

직장내 성희롱이 산업재해라는 주장에 나는 완벽히 동의한다. 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에 관해 깊이 연구한 여성학자 최윤정1은 직장내 성희롱을 업무 과정에서 인간(직장 동료 및 상사 등)에 의해 정신적・신체적 부상을 당하는 산업재해라고 말한다. 우울증, 불안, 대인기피와 같은 정신적 증상과 두통, 위장 장애, 수면 방해와 같은 신체적 증상을 모두 아우르는 ‘성희롱 후유증’이라는 이름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성희롱 피해자 중 1/10, 많게는 1/3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동일한 증상을 보이며, 증상은 평균 11년 동안 지속된다. 동시에 최윤정은 직장내 성희롱의 피해가 실제로 가시화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에 피해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음을 지적하며, 무엇보다 피해자 비난하기를 멈추고 피해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폭력은
성차별이다

사회학자들은 직장내 성희롱의 본질이 성차별이라고 분석한다2. 개인의 일탈적 행동이나 단순한 희롱이 아니라 여성을 지배하고 위계적 특권을 강화하기 위한 남성 우월적 권력행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희롱을 예방하고 억제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조직에 만연한 성차별 문제를 없애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시각으로 접근하여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힘써야 하며, 합리적이고 투명한 인사제도와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성희롱의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고무적인 소식과 여전히 힘겨운 소식이 있다3. 최근 3년간 직장내 성희롱을 산재로 신청한 건수 32건 중 30건이 산재로 인정받았다. 인정률이 높기는 하나 직장내 성희롱 상담 건수가 2년간 300건이 늘어난 것에 비하면 신청 자체가 매우 적다. 산업재해의 법적 기준에 성희롱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산재로 인정되지 않을 위험이 커 섣불리 신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작년에 조배숙 민주평화당 의원이 직장내 성희롱・성폭력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자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아직 위원회 심사에 머물러 있다.

직장내 성희롱은 여성이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침해한다1.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일터에서도 여성은 안전하지 않다. 여성은 왜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빼앗겨야만 하는가. 성별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여성으로 존재한다. 여성을 동료가 아닌 생물학적 여성으로 보는 모든 인식과 행동이 여성을 조직 밖으로 내몬다.

<여자 앞길 막는 사회>는 잠시 휴재 기간을 가지고, 10월에 시즌 2로 돌아옵니다!

 

참고

1. 최윤정 (2003). ‘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 김수한, 장인식 (2017). 조직문화와 여성관리자의 성희롱 피해 경험. 여성연구, 94(3), 3-35.

3. 차민지, 김태헌 (2019). ‘미투’로 성폭력 상담 느는데 ‘산재 신청’은 저조, 왜? 노컷뉴스, 8월 11일.

 

사월날씨님의 글은 어땠나요?
1점2점3점4점5점
SERIES

여자 앞길 막는 사회

이 크리에이터의 콘텐츠

커리어에 관한 다른 콘텐츠

여성의 노동에 관한 다른 콘텐츠

성차별에 관한 다른 콘텐츠

콘텐츠 더 보기

더 보기

타래를 시작하세요

여자가 쓴다. 오직 여자만 쓴다. 오직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플랫폼

타래 시작하기오늘 하루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