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후천적으로 레즈비언 되기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남들과 다른 이름으로 나를 규정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동안 외면할 수 있던 수많은 문제에 눈을 떠야 했다. 교과서의 이성 교제를 설명하는 대목을 가만히 응시해야 했고, 동성애자의 이름을 써내라는 담임의 설문지를 뚫어져라 바라봐야 했다.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동성애에 관한 편견이 튀어나올 때면, ‘그거 아니래.’ 하며 레즈비언의 대표라도 된 것처럼 변호하곤 했다. 집에 돌아가서는 각종 자료를 긁어모아 논리를 만들고 공부했다. 그렇게 그 이름을 가지는 대신 그 이름의 무게를 떠안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건 일종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무거운 이름을 원한 적은 없었다. 그냥 사랑하고 섹스하는, 즐겁기만 할 수도 있는 얘기였다. 수험생활을 다시 할까, 대출을 받을까 말까, 회사를 그만둘까 같은 일생일대의 고민보다는 오늘은 무슨 옷을 입을까, 이태원에 갈까 홍대에 갈까,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까 하는 정도의 즐거운 고민과 더 어울리는, 정말로 청바지를 입고 벗는 가벼운 선택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 그런 선택지는 없었다. 레즈비언을 하려면, 저 무거운 것들도 같이 가져가야만 했다.

2017.07.13 15:58 발행

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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