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시대의 국민 스포츠, 섹스

생각하다퀴어

욕망 시대의 국민 스포츠, 섹스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어때? 좋아?

좋았다. 섹스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이 좋았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는 그 순간이 좋았다. 언제나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있던 그라서 나에겐 그 순간이 매우 소중했다. 그래서 대답했다.

응, 좋아. 너무 좋아.

나는 섹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누군가는 운동이 일상이고 취미일 수 있지만 나는 좀 부담스럽다. 집이 아닌 곳에서 옷을 갈아입거나 씻는 게 불편하고, 함께하는 거면 사회성을 발휘하기가 피곤하고, 혼자 하는 거여도 땀이 나서 찝찝한 기분이 가뿐함을 압도한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무섭고 다음 날 더 피곤해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고 운동을 해본 적 없는 건 아니고, 수영도 배우고 복싱도 다녔었다. 겨울이면 스키도 타러 가고, 체육대회에서는 계주 선수로 뛰기도 했다. 걷기도 운동이라고 친다면 도보로 삼십 분 이내는 버스 안 타고 걸어 다닌다. 하지만 운동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냥 하는 것과 좋아서 하는 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이라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효과를 원해서 운동한다. 건강해지려고, 친구들과 어울리려고, 혹은 일상에 활기를 얻으려고 굳이 결심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가기로 정하는 건, 버스를 타기가 걷기보다 싫어서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삼십 분을 걸으려고 일부러 집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이건 좋아하는 독서와 비교해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나는 지식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그냥 서점에 가서 책을 보면 군침이 돌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충동적으로 책을 사서 읽기도 한다. 책을 읽는 순간이 즐겁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데에 엄청난 결심이 필요하지도 않다. 운동과는 다르다.

그리고 이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안다. 내가 운동을 좋아서 하는지 독서를 좋아서 하는지 남이 알게 뭔가? 그런데도 이렇게 구구절절 쓴 이유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늘 여러 말들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너 저번에 걔랑 섹스한 적 있잖아.’, ‘저번 그 섹스는 좋다고 말했잖아.’, ‘너 근데 왜 섹스토이 샀어? 섹스하려던 거 아니야?’ 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말했듯이 운동을 싫어하지만 운동할 수 있고, 운동을 싫어한다는 말이 앞으로 평생 안 하겠다는 말이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운동 싫어하는 나는 어제는 재밌더라는 말도 못 하나? 요즘은 클라이밍 짐을 다니려고 알아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운동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동안 그런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귀담아듣느라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 질문들을 똑같이 스스로 던지며 고민했다.

‘그러게? 나는 왜 섹스를 하지? 왜 어떤 섹스는 좋았던 거지?’

처음에 나의 섹스는 쾌락이라기보다는 실험에 가까웠다. 지금 말하기엔 또 한세월인 사연들로 인해 나는 내가 이성애자인지 어서 알아보고 싶었고, 섹스로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실험은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기 시작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자꾸 나에게 부치인지 펨인지 성향을 물었고, 그건 전적으로 섹스로 결정되지는 않더라도 섹스와 무관하지는 않아 보였다. 어느 쪽에도 정확히 들어맞지 않았던 나는 자꾸만 실험해봐야 정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즐겁지 않지만 계속 섹스했다.

그 뒤로도 나의 섹스는 취미보다는 자기계발이었다. 내가 발을 들인 커뮤니티는 자유로운 섹드립에 웃음이 터지는 분위기였고, 경쟁이라도 하듯 섹스경험과 테크닉을 자랑했다. 얼마나 많은 상대와 어떤 섹스를 했는지는 술자리의 단골 화제였으며 섹스에 관한 경험과 능력은 곧 인기와 매력이 되었다. 커뮤니티에 속하는 건 정체화 중이었던 나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섹스가 그리 즐겁지 않아도 즐거운 척하곤 했다. 그리고 역량을 키우려고 기회가 될 때마다 연습하듯 섹스를 했다. 마치 문란하게 열심히 섹스하지 않으면 레즈비언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

그래, 섹스를 꼭 하고 싶어서 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여전히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 걸로 결론 내리기엔 부족했다. 즐거운 섹스의 기억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섹스들은 억지로 한 것만은 아니고, 분명 쾌락이 있었다. 그 즐거웠던 섹스들을 하나씩 꺼내놓고 비교해보자 마침내 나는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의 부속품들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면, 섹스를 하기 위해 단둘이 있는 시간과 공간, 내가 상대의 욕망 대상이 되며 가치 있게 느껴지는 감각, 그리고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그 ‘섹스’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 우리는 젊고 행복하고 정상적인 커플의 안에 들어가 있다는 안도감,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친밀한 관계라는 확신, 우리는 지금 좋은 것을 나누고 있다는 환상 같은 것 말이다.

섹스가 주는 만족 중에 육체적인 쾌락은 별로 없었다. 아니 섹스는 몸의 쾌락이 가장 주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그 좋다는 쾌락을 나도 좀 느껴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섹스를 즐기기 위한 노력도 많이 해봤다. 담배를 처음 피울 때 연기를 목 뒤로 넘기는 법을 몰라 기침을 하듯, 섹스도 처음에만 떨떠름하지 결국 익숙해지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낯선 것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두 달 정도 억지로 때맞춰 담배를 피운 뒤에야 흡연자가 될 수 있었기에 섹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네가 제대로 된 섹스를 안 해봐서 그래.’ ‘좋은 상대를 못 만나봐서 그래.’와 싸우기 위해 그에 필적할 만큼의 경험을 쌓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렇게 환상적인 쾌락을 경험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몸을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육체적 쾌락을 맡기는 행위가 비효율적이다. 자극은 기대보다 조금 더 거칠거나 부드러웠고, 타이밍은 조금 더 늦거나 빨랐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니까 당연했다. 그건 더 잘 맞는 혹은 더 잘하는 상대를 만난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아니다. 섹스에 무슨 대단한 테크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섹스가 어떤 건지 알고 웬만큼 배려할 줄 아는 상대와 섹스를 한다면 그냥 대체로 비슷하다. 기본에 충실하게 서로 잘 소통해서 맞춰간다면 어느 정도의 쾌락을 얻는 거고, 당연히 그게 그렇게 드라마틱하거나 판타스틱하지는 않다. 나에게 그 ‘어느 정도의 쾌락’은 그렇게 귀찮은 섹스를 감수할 만큼 크지 않았다. 삽입은 대체로 아팠고, 지루해하며 끝나기를 기다렸고, 멋진 섹스를 연출하기 위해 스스로 즐겁다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물론 섹스가 순전히 몸의 쾌락만은 아니다. 내 몸에 비슷한 자극을 준다고 해도 상대와의 관계나 분위기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정도는 달라지고, 각자의 복잡한 욕망과 판타지의 이미지도 맥락적으로 작용해서 그 쾌락을 만든다. 결정적인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내가 육체적 쾌락을 증폭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폭력의 한 장면과 비슷했다. 물론 실제로는 안전한 상황을 전제하고, 상대방이 어느 정도 내 의사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강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때 더욱 섹시하게 느껴졌다.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나의 의사를 묻는 사람보다 그 반대가, 편안한 장소보다 위험한 장소에서 더 성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불편하지 않다면 섹시하지도 않았고, 섹시하다면 불편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섹스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나는 불편하지 않다면 섹시하지도 않았고, 섹시하다면 불편한 마음으로 섹스에 임했다. 그래서 집중하기 어려웠고, 조금은 덜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물론 섹스와 폭력이 닮아있어도, 지혜로운 합의를 통해 그 경계를 오가며 줄타기를 하듯 폭력이 되지 않는 선에서 쾌락을 취할 수 있다. 욕망과 성적 실천을 무조건 억압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쾌락이 크지도 않고 섹스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폭력에 익숙해지는 감각에 두려움과 불편함을 안은 채 굳이 섹스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섹스를 해도 난 불편할 뿐인데, 왜 계속 섹스를 해야 하나? 섹스가 쾌락적일 거라는 믿음으로? 그 욕망도 결국 만들어진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결국 섹스를 하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젊은 시스젠더 헤테로의 일대일 섹스만 권장하는 주제에, 섹스를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비정상으로 여기는 유성애 중심 사회에서 섹스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게 오히려 내 삶에 의미를 더하는 일이다. 페미니즘을 알고 이런 결심이 구체적으로 언어를 만나긴 했지만, 사실은 페미니즘도 나를 오래 헷갈리게 했다. 지금은 안다. 내가 성녀-창녀 이분법의 성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고, 성 엄숙주의도 아니고, 그냥 섹스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그게 다라는 걸 말이다.

무성애 스펙트럼에서 논의되는 그레이섹슈얼, 데미섹슈얼로 정체화해본 적도 있다. (앤서니 보게트는 저서 ‘무성애를 말하다’에서, 성욕을 느끼지만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경우와 감정적으로 끌리지만 성욕은 느끼지 않는 경우, 감정적으로 끌리고 성욕도 있지만 섹스를 원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성에 관심이 없는 경우 등을 무성애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름들을 끌어와 나를 더 잘 설명할 수는 있지만,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어떤 면은 나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면은 나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성욕이나 끌림이라는 게 굉장히 불명확하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 수치화해서 비교해볼 수도 없어서 판단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확실한 건 사람이 섹스하는 데에는 성욕과 함께 여건, 신념 등 다양한 이유가 있고, 우리가 모두 꼭 섹스라는 취미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혹시 섹스가 아무리 맛있어도 케이크 한 조각이 더 달콤하다면, 우리 이제 솔직해지자. 욕망에 충실해 보자. 가짜 욕망 말고, 내 진짜 욕망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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