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릴 때 읽은 동화는 모두 그렇게 끝났다. 나중에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결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던 신데렐라는 파티에서 왕자님을 만나 팔자를 폈고, 독이 든 사과를 먹은 백설공주도 왕자의 키스로 목숨을 구한다. 아, 인어공주는 이웃 나라 왕자님을 사랑하다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녀들에게는 모두 왕자님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교롭게도 다들 이성애자였나보다. 동화뿐만이 아니다. 영화 속 여주인공은 모두 남자를 사랑했다. 노래 가사에서도 애니메이션에서도 소설에서도 심지어 학교 교과서에서도 당연히 여자는 남자와 연애를 했다.
나는 그 한정된 이야기 안에서 로맨스를 배워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남자와 여자인 것이 그 이야기들의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성애 서사의 로맨스는 대부분 여자가 가만히 있는다. <파리의 연인>에서 남자는 ‘애기야, 가자!’하고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고,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남자는 ‘나랑 밥 먹을래, 나랑 죽을래!’하고 호통을 친다. 그럴 때 여자는 뭘 했나?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자는 늘 예쁘기만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건 동화 속 공주들도 마찬가지다. 위기에 처했지만 대처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여자를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가 구원해준다.
로맨스 각본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
살다 보니 나에게도 로맨틱해질 필요가 있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자, 일단 나는 여자니까 가만히 있는 공주 역할인가? 그러기엔 지금 내가 반한 저 사람도 여자로 보인다. 그럼 내가 유혹하려는 쪽이니까 편의상 남자 역할을 잠시 맡기로 하자. 그러면 위기에 처할 때를 기다렸다가 멋지게 구해줘야 하나? 그런데 일상에 그런 위기 상황은 별로 없다. 그래서 수많은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차가 올 때마다 여자를 인도 쪽으로 끌어당기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로맨스들은 전통적 성역할을 답습하고 강화하는 이성애로 오염되어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도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는데, 나는 로맨틱해지고 싶었다. 레즈비언인 것도 서러운데 로맨스마저 박탈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달콤하고 설레는 연애를 하고 싶고, 사랑에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싶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에 밤잠을 설치고 싶고, 날 그렇게 만드는 그 여자를 유혹하고도 싶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로맨스를 추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커플링은 자유를 속박하는 족쇄 같았고, 촛불 이벤트는 노동력 낭비에 환경오염 같았다. 사실 처음부터 글러먹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부터가 이미 존재하는 로맨스 중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게 없는데, 누구를 꼬시고 유혹하고 한단 말인가. 시중에 시판된 로맨스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성별만 바꿔서 대입해봐도 어딘가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사실은 원래부터 이상한 건데 성별을 바꾸니까 그게 더 확연히 드러날 뿐이었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그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저 여자를 유혹하고 싶은데 박력 있게 벽으로 밀치는 건 너무 폭력적이고, 분위기를 잡았다고 해도 명확한 소통 없이 스킨십을 시도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그 여자의 무릎에 내 가디건을 덮어주기엔 개성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건 보호주의인가 싶다. 페미니즘 앞에서 세상 모든 연애 조언들은 다 쓸모가 없어졌다. ‘누난 너무 예뻐!’처럼 예쁘다고 고백하기엔 무슨 외모품평인가 싶고, ‘내 꺼 하자.’ 하기엔 얼마나 주체성 무시인가?
싫은 건 싫은 거야
나는 이전까지는 무례하게 내 경계를 침범한 사람과 관계가 진전되곤 했다. 먼저 다가가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냥 선택의 여지 없이 다가온 사람과 연애했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외모를 단장하고 있으면 누군가 와서 로맨스를 청했던 꼴이다. 누군가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다가온 건 물론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아프다고 했더니 예고 없이 약을 사다 준다거나, 약속도 잡지 않고 학교나 직장으로 찾아와 기다린다거나, 부탁도 하지 않은 내 개인적인 일을 자진해서 도와준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들은 의도가 좋았고 나를 생각하는 마음도 느껴졌지만, 늘 거기엔 잘못 배운 로맨스가 섞여서 날 불쾌하게 했다.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열어줄 준비가 채 되지도 않은 내 영역에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건 싫다. 자기 일들보다 우선순위에 나를 둔 거로 보아 좋아하는 마음은 참 알겠는데,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그들의 문제는 언제나 어설프게 로맨스를 섞으려 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배운 로맨스가 불균등한 젠더 권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헛것이어서, 우리는 로맨틱해 보려고 할수록 관계를 망치게 된다. 여성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형성된 로맨스 이외의 것을 상상하기 어렵고, 존중과 배려의 언어는 어딘가 로맨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니까 말이다. 로맨틱해야겠다는 욕심을 버린 채 그저 담백하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고 상상해보면 답이 나온다. 아플 땐 어련히 알아서 병원에 갔을 거고, 적절한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을 것이다. 힘들어서 누구를 만나기도 싫을 텐데 약을 사다 주고 어쩌고 하기보단 그냥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편안한 휴식을 응원하는 게 타인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가 아닐까?
그러나 나는 동시에 전통적 로맨스에 잘 세뇌되어 있었다. 의견을 묻지도 않고 미리 정해둔 맛집으로 데려간다거나, 내가 결정할 일을 강압적으로 대신 정해줄 때 상대가 박력 있어 보이고 설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얼른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떠올렸지만, 그렇게 낭만이라는 감정은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다. 무엇에 감동하고 무엇에 설렐지 이미 가부장적인 기준 안에서 학습한 탓이다. 비단 로맨스뿐 아니라 가부장제는 전반적으로 이미 해로운 사회를 만들어놨고, 페미니스트라고 해서 우리만 무균 상태의 외딴 섬에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로맨스이긴 하지만, 그걸로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고 하루가 활기찰 수만 있다면 그게 뭐 어떤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게 이데올로기라는 걸 알고 나면, 모를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 로맨스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사랑하니까’ 해야 했던 것들을 거부할 힘이 생긴다. 사랑한다고 섹스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해도 희생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니까 좋은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서 나를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그 새끼의 오지랖을 참아주지 않아도 된다. 나는 여전히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그런 사람과 연애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 관계가 나를 파괴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찾아온 설렘은 필요한 만큼 즐기기만 하고, 지속적 관계는 서로를 건강하게 하는 사람과 맺는 거다. 어차피 몸에 안 좋은 로맨스, 단물만 쪽 빨아 먹고 뱉으면 된다.
어차피 학습되는 로맨스라면 새롭고 대안적인 걸로 다시 학습하는 건 어떨까? 나 또한 존중받는 감각에 익숙해지고 나서는,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헤아려주고 사소한 일상에 주목해주는 게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따뜻하고 말랑해져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다. 그러고 나니 이제는 꼭 맞는 퍼즐 조각처럼 누군가에게 강렬하게 끌릴 때는 오히려 제동을 걸게 된다. 그 사람이야말로 온전한 나를 반 토막 퍼즐 조각으로 만드는 사람이 아닐까? 아직도 나만의 ‘페미답고 안전하고 괜찮은 로맨스 판타지’를 완전히 구상하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사는 것보다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를 외치는 게 더 행복할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