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프릴의 딸>과 디스토피아적 세대 착취

알다여성 주인공영화

<에이프릴의 딸>과 디스토피아적 세대 착취

명숙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에이프릴의 딸> 2017, 미셸 프랑코

이것은 모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디스토피아적 가족 해체 후에 펼쳐지는 성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안토니아스 라인>(마린 고리스, 1995, 2009년 재개봉)과 같은 가부장제 해체 이후 유토피아적 대안을 상상한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지 마라. 또한 <케빈에 대하여>(림 랜지, 2011)처럼 진지하게 '본능적 모성'에 관한 성찰을 기대한 사람도 보지 마라. 실망할 것이다.

<에이프릴의 딸>은 <투문 정션>(잘만 킹, 1988)처럼 여성의 욕망을 그리려했으나 그조차 실패한 영화다. 가족이 해체된 후 남는 것은 구성원들의 욕망뿐이며, 가족이 해체되어도 여전히 경제적 능력을 가진 자가 여전히 자식세대를 착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듯하다.

* 이하 영화 <에이프릴의 딸> 내용 누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신화 깨기와 세대 착취

<에이프릴의 딸>의 줄거리는 이렇다. 10대에 아이를 낳은 딸 발레리아(안나 발레리아 베세릴). 육아능력이 없어 어머니 에이프릴(엠마 수아레즈)에게 기대려 한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손녀에 대한 양육 의지를 보이다가 애를 입양시킨다고 빼돌리고서는 아이의 아버지인 딸의 남자친구를 유혹해 따로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머니는 결국 딸에게 들켜 도망치고, 딸은 자기 아이를 다시 찾아 혼자 어디론가 떠난다는 이야기다. 스토리만 보면 그야말로 '막장'인 영화다. 아기를 둘러싼 이야기가 주되므로 모성신화를 깨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 영화가 모성신화를 깨는 영화라기보다 가족신화를 깨는 영화라고 본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아들이나 딸, 즉 자녀들의 구조 요청을 거부했다. 그저 젊은 아내와 여유로운 삶을 즐길 뿐, 자신의 경제력이나 감정을 자녀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들은 모두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젊은 자녀들을 욕하거나 귀찮아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차가움을 녹이고 따뜻함으로 보듬는 가족애는 없다. 각자의 삶을 각자가 알아서 책임지며 살 뿐이다. 누군가의 삶을 걱정하고 돌보는 가족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주인공 에이프릴도 매몰찬 아빠들과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일 수 있다. 에이프릴도 처음부터 딸인 발레리아의 남자친구를 탐하지는 않았다. 도움을 구하러 전 남편의 집에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을 때, 문틈으로 목격한 젊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과 단란한 생활! 그녀는 전 남편의 삶을 보고 그것을 욕망했는지 모른다. 물론 육체적 경제적 능력을 갖춘 남자들에게 젊은 여성과의 재혼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똑같이 육체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에이프릴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임신해서 충분히 만끽할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새로 만들 기회일 수도 있다. 그녀는 선택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런데 이러한 가족의 해체는 반가운 것인가? 수많은 세월 동안 여성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가족을 비판했던 이에게 가족의 해체는 반가운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들을 비롯한 아동,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들은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혈연이나 이성애 중심의 가족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구성을 꿈꾸고 시도해왔다. 앞서 언급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구성원들을 존중하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유토피아적 가족의 재구성을 그린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딸>은 이미 혈연이라는 온정조차 없이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가고 있는 해체된 가족을 극단으로 밀어붙일 뿐이다. 어쩌면 가족 해체 후 남는 것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를 착취하는 것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에이프릴이 딸의 남자를 전취할 수 있었던 힘은 관능적 육체만이 아니라 부와 경제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스토피아적 신자유주의의 가족의 미래상이라 할만하다.

그녀의 욕망은
진짜 여성의 욕망인가

무엇보다 이 영화가 불편했던 것은 가족의 해체 그 자체가 아니라 가족이 해체되는 방향과 방식 때문이다. 에이프릴의 행동은 그녀의 전 남편과 다르지 않다. 경제적 능력으로 딸의 남자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묻게 된다. 혹시 남성 감독의 시선에서 나이 든 여성의 욕망은 나이 든 남성의 욕망과 완전히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 것은 아닐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하지만, 베니스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처럼,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욕망을 그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에이프릴의 딸>의 서사는 여성도 육체적 경제적 능력만 된다면 언제든 젊은 남자들을 유혹하고 딸의 남자를 유혹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성의 욕망을 가부장적 남성(전 남편)의 욕망에 가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독은 아예 자식과 경쟁하는 모습을 보며 영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세대 간 경쟁 또는 세대 착취는 영화 서사에 주요한 부분이다. 세대 간의 경쟁 또는 세대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욕망조차도 매우 나이 든 남성의 욕망과 동일하다. 성별만 바뀌었을 뿐 새로움이 없다. 그러한 점에서 <투문 정션>에서 그린 여성의 욕망에도 미치치 못한다.

전 남편을 따라하는 에이프릴로 인해 엄마와 딸의 관계는 무너진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그렸던 4대에 걸친 여성의 연대나 어머니와 딸들의 우정 같은 인간애는 없다. 그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딸들이 사는 집까지도 처분하려는 비정한 엄마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애 없는 욕망은 소리 없이 재가 되어 날아갈 뿐이다. 자매애나 여성들의 연대라는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람이라면 질색할 영화다.

무음의 엔딩 크레딧

소에게 고기사료를 주는 듯한 불편한 서사지만, 탄탄한 구성이나 연기력 등 영화의 완성도는 매우 높다. 특히 에이프릴을 연기한 엠마 수아레즈는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다.

영화의 첫 화면과 엔딩 크레딧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신음소리라는 청각에 의존해 성적 욕망을 상상하게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엔딩 크레딧에는 그 어떤 음악이나 배경 영상도 깔리지 않았다. 마치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욕망의 끝을 상징하는 듯하다. 텅 빈 욕망의 소리는 무음이라는 것처럼! 나아가 무음은 욕망의 끝을 숨죽여 바라봐야 하는 관객의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을 고조시킨다. 숨죽인 관객들은 디스토피아에서 서둘러 떠나고 싶어진다. 빨리 영화관의 불이 켜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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