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가 갖고 싶어? 유행을 쫓는 생명경시자들에게

생각하다반려동물동물

스타가 갖고 싶어? 유행을 쫓는 생명경시자들에게

송베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새로운 계절이 되면 앞 다투어 여러 분야에서 트렌드를 다룬다. 트렌드는 각종 매체를 타고 전파되어 대중들에게 닿는다. 뷰티, 의류, 헤어, 액세서리, 하다 못해 ‘색깔’까지 그 범위는 넓고 다양하다. 특히 유명 연예인의 ‘픽(Pick)’이라고 홍보되거나 인기 방송 프로그램에 노출된다면 유행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유행하는 생명

생명에도 ‘만들어진 트렌드’가 있다. 유기동물 입양을 위한 사이트나 어플을 둘러보다 보면 특정 동물, 혹은 특정 품종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많이 올라오는 때가 있다. 그렇다. 유행했다가 버려진 동물들인 것이다. 반려동물의 보호자들은 우스갯소리로 “반려동물의 유행을 알고 싶다면 휴대전화를 들어 유기동물공고를 보라”고 말할 정도다.

놀랍게도 반려동물의 종류뿐만 아니라 유기 방식에 대한 트렌드도 알 수 있다. 동물 보호소 앞에 유기하는지, 길거리에 유기하는지, 휴가철에 유기하는지, 산책하는 척 유기하는지, 동물병원에 유기하는지…….

최근에는 유기동물 공고에 하네스(산책용 가슴줄)나 목줄을 찬 고양이가 많이 보인다. 소위 ‘산책냥’, 즉, ‘산책하는 고양이’가 유행했다는 소리다. 물론 이것은 유기라기 보단 보호자의 무지와 안일함에서 일어난 실종과 구조 및 보호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다시 보호자를 만나지 못하면 결국 유기동물이 된다. 때문에 이 역시도 유기동물공고를 보고 알 수 있는 ‘생명 관련 유행 현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일러스트 이민

“나도 갖고 싶어!”

TV나 SNS를 보다 보면, 유명 연예인들의 반려동물이 소개되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는 방송 프로그램 내에 ‘캐릭터’처럼 동물을 끼워 출연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어김없이 포털 사이트의 인기검색어에 해당 연예인, 방송 프로그램과 더불어 반려동물, 출연동물이 올라온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동물들의 ‘품종’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SNS에서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동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똑똑해서, 예뻐서, 귀여워서, 멋있어서……. 온갖 이유로 유명세를 탄 동물들(의 보호자)의 SNS 댓글에는 꼭 하나씩 달리는 질문들이 있다.

‘얘는 품종이 뭐예요?’
‘얼마 주고 샀어요?’
‘어디서 데려왔어요?’

해당 보호자들은 그 질문에 대한 불쾌감이나 우려되는 점을 호소하지만, 그뿐이다. 정작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보호자들이 호소하는 부분을 외면하기 일쑤다.

정말 최악의 경우는 얼마 안 있어 그 질문자의 SNS에 유명세를 탄 동물과 같은 품종의 반려동물이 생겼을 때다. 그보다 절망스러운 경우는 “그 유명한 애랑 똑같은 종이고, 최대한 비슷한 생김새로 샀는데, 얘는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반려동물을 유기할 마음을 먹거나 실제로 유기한 뒤에도 당당한 모습을 봤을 때다.

이 외에도 유기동물의 트렌드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믿기 싫을 만큼 다양하다. TV에서 전문가가 나서서 종의 긍정적인 특성을 강조할 때(이 종은 똑똑하다, 말을 잘 듣는다, 충성심이 좋다, 집을 잘 지킨다, 키우기 쉽다 등), 반대로 전문가가 종의 부정적인 특성을 강조할 때(이 종은 기본적으로 사납다, 사냥본능이 있다, 멍청하다, 병에 잘 걸린다 등. 이는 함께 하던 반려동물을 버릴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된다. 혹은 유기 및 파양의 죄책감을 더는 훌륭한 자기합리화의 근거가 되어준다), 타인과 다른 자신의 특별함을 강조하며 특이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례가 등장했을 때,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할 때의 이점만을 강조했을 때 등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생명 역시도 마치 물건이 유행하고 유행이 지나 폐기되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아래부터는 트렌드에 따라 동물을 집에 데리고 오고 싶어하거나 이미 데리고 온 사람들(이하 통칭 ‘생명경시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다. 오해하지 말라.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아래 이야기를 참조해 제발 구구절절 말려주길 부탁 드린다.

“내 건 왜 달라?”

걔랑 똑같은 종, 최대한 비슷한 생김새로 샀는데 얘는 왜 이렇게 다른지 모르겠어요.

TV나 SNS 등 각종 매체에 등장한, 귀엽고 똑똑해서 보기만 해도 마냥 즐거운 동물들. 그 동물과 함께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울까? 남들에게는 얼마나 부러움을 살 것이며, 끊임없이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줄까? 이 생명경시자들은 생각만으로도 짜릿한 설렘을 느끼며 내 마음에 든 동물과 같은 종의 최대한 비슷한 생김새를 한 동물을 ‘골라’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데려온 동물은 내가 본 동물과는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이기 시작할 테다. 분명 TV 속 그 동물은 몇 번 가르치지 않아도 온갖 명령어에 척척 따르는데, 그들이 데려온 동물은 학습능력이 영 떨어질 수도 있다. SNS 속 동물은 먹는 양도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들이 데려온 동물은 먹는 양이 엄청날지도 모른다. 배변실수를 여기저기에 하고, 더러는 물건을 망가뜨리기도 하며, 사람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비단결 같은 피부나 털은 온데간데없이 푸석하고 어딘가 더러운 꼴을 할지도 모른다. 불쾌한 냄새가 폴폴 날 수도 있다. 사람에게 살갑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괴로우리만치 사람에게 집착을 할 수도 있다.

그때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왜 얘는 걔랑 다르지? 품종도 똑같은데?’

어쩌면 직접 보호자의 SNS에 가 따지거나 물을 수도 있다.

댁네 동물 보고 따라 샀는데 영 딴판이네요. 별 수 없이 보호소 보내거나 다른 집에 보내려고 합니다. 종이 같다고 다 댁네 동물 같진 않은가 봐요.

이렇게 멍청하고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이런 사람들과 굳이 시선을 맞춰, 물건으로 예를 들어보겠다. 공장에서 같은 틀로 찍어내는 물건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는 조금씩 다르다. 비단 외형뿐만이 아니라 사용감 따위의 미묘한 느낌도 다를 수 있다. 기계로 최대한 똑같이 찍어내는 물건, 무생물조차 말이다.

하물며 생명체다. 모체와 부체의 유전자가 혼합되어 새로 태어난, 각기 전혀 다른 존재. 한날한시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도 어딘가는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다 그렇다. 동물들도 예외는 아니다. 유명세를 탄 동물들의 형제자매를 데려온다고 해도 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동물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란 이야기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해 볼까? 형제자매가 있는가? 없다면 가장 친한 친구를 보라. 황인종이라는 같은 종에 동일 성별, 동일 나이, 동일 문화권임에도 다른 구석을 아마 몇 십 개, 몇 백 개는 댈 수 있을 것이다. 형제자매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교육자 밑에서 자랐음에도 아주 많은 것이 다를 것이다. 혹 재혼가정이라고 해도 그렇다. 크건 작건 아주 많은 부분이 다르다.

이처럼, 모든 생명은 고유한 특징이 있어 닮고 비슷한 부분은 있을지언정 완전히 서로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똑같은 게 갖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가? 그럼 그 동물의 보호자가 올려주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라고 말해주자. 그들이 원하는 것 중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간혹 이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혹시 새끼 뺄 계획 없으세요? 새끼 빼면 한 마리 주세요.”라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잔인하고 멍청한 것은 물론이요, 무례하고도 끔찍할 정도로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발상을 떠올릴 정도로 동물을 물건처럼 취급 하는 사람들은 부디 조용히 입 다물고 스스로의 부모를 보길 바란다. 부모가 잘났다고 나도 잘났는가? 아니다. 부모가 못났다고 나도 못났는가? 아니다. 부모와 나의 생김새는 물론이고 성격, 체질, 적성, 취향 등 그 모든 것이 다르다.

한 번 더 말하지만, 그 동물의 보호자가 올려주는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원하는 것 중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다. ‘오로지’ 말이다. 아, 덧붙이지자면 그 사진과 동영상들도 당연히 보호자의 허락 하에 저장을 해야 한다. 무단으로 유포까지 했다면 의도가 무엇이든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 이민

“내가 봤는데? 별로 안 힘들던데?”

TV나 SNS를 통해 보는 것은 연출된 단면일 뿐이다. 생명경시자들도 그건 알 것이다. 왜냐면 본인도 그럴 테니까. TV나 SNS는 나의 행복한 모습, 재밌는 모습, 사랑스러운 모습 등 내가 보여주고 공유하고 싶은 부분만 편집하여 보여주는 매체다. 다시 말하면, 대중이 아는 그 동물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란 소리다.

우리는 그 동물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보호자가 어떤 노력을 거쳤는지 모른다.

아닌데? 걔네가 사고 친 것도 알고 보호자가 힘든 것도 가끔씩 올려줘서 아는데? 보여주던데?

생명경시자들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 잊지 마라. 그 부분마저도 보호자가 선택해서 올린 일부분에 그친다는 것을. 24시간 밀착취재를 보여준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편집을 거친 결과물이다. 행여 편집 없이 보여준다 한들 고작 하루다. 하루 봤다고 그 동물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보호자가 반려동물을 양육하기 위하여 얼마의 돈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어떤 케어를 해 주는지, 어떤 훈련을 하는지, 어떤 환경을 조성해주는지, 반려동물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보호자와 반려동물 사이에 얼마나 두터운 유대감이 쌓이고 쌓였는지, 본인이 아니라면 100% 알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혈육이라고 해도 내 생활을 오롯이 다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게다가 일반 대중은 그 보호자나 동물의 친한 친구도 혈육도 아니지 않은가.

만약 생명경시자들이 그저 비슷한 동물이 아닌, ‘스타’로 취급받는 해당 동물 자체를 데려다 키운다고 생각해 보자. 굳이 실제로 해 볼 거 없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그 동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과 상태를 보일 것이다.

TV나 SNS에서는 마냥 똑똑하고 순하고 털과 피부에 윤기도 흘렀는데, 생명경시자들이 도맡은 며칠 후 별안간 사람을 공격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외면의 상태도 왠지 빛을 잃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들지 모른다. 동물이 원래 사용하던 제품들과 먹던 음식들을 똑같이 사용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솔한 생명경시자들이 직접 그 동물의 집에 가 산다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 장담할 수 있다.

당연하다. 동물은 같지만 보호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저 그 유명한 동물의 좋은 면이 탐나서 갖고 싶은 태도부터가 이미 다름의 시작이다. 생명경시자들은 아마 그 동물이 변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 동물에 대한 소유욕이 확 사라질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다름의 문제 원인은 대상 동물이 아니다. 사람이 다르다. 동물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과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이 차이 자체가 시발점이다. 외면하지 말고 잘 알아둬야 할 점이다.

캘리그라퍼가 쓰는 펜을 쥔다고 똑같이 쓸 수 있을까? 화가가 쓰는 물감을 쓴다고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 쉐프와 똑같은 칼을 쥔다고 같은 모양으로 당근을 썰 수 있을까? 광고에 나온 모델과 같은 옷을 입는다고 옷매가 같을까? 좀 더 가까운 예로, 친구가 잘 사용하는 프라이팬을 따라 샀다고 나도 잘 쓰는가? SNS에서 강력 추천 후기가 쏟아져 나오는 물건을 샀다고 그게 나에게도 큰 만족을 가져다주는가?

자꾸 동물을 물건으로 비유하는 게 불쾌할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렇다. 쓰면서 불쾌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근본적으로 동물을 물건처럼 갖고 싶어하는 그 마음가짐 자체가 문제이다보니,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들이 동물을 얼마나 물건처럼 보고 있는지 빨리 깨닫길 바랄 뿐이다. 아니라고? 아닌 사람은 생명을 단순히 부럽고 갖고 싶다는 마음으로 보지 않는다. 반려동물은 생명이다. 탐욕의 대상이 아니다.

TV나 SNS에 없는 이야기

그래도 어쩌면, ‘이왕 데려온 거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잘 살아보자!’라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반려동물에 대한 환상이 있을 테다. 이상향을 포기했다고 나의 선입견과 고정관념, 기대가 무너진 것은 아니니까. ‘쟤랑은 달라도 어쨌든 같은 종이니 비슷한 무언가는 있겠지!’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비슷한 부분이, 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헛짖음의 문제나 식분증(자신의 대변을 먹는 것), 예민함과 공격성, 특정 질병에 대한 노출도 등 부정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혹은 ‘동물을 키우면 정서에 좋다니까! 마침 나는 우울증이 좀 있으니 도움이 되겠지!’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부분은 나의 경험을 이야기 해 보겠다. 참고로 나는 현재 개 한 마리와 6년째 함께 살고 있다(이전에는 또 다른 두 마리의 개와 13년을 살았다).

나는 몇 년 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길거리를 거닐 때도 별안간 눈물이 뚝뚝 날 정도로 우울증이 심했다. 그때 나는 개에게서 구원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커다란 짐 한 덩어리가 내 등에 더 얹혀 있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혔다.

나는 이토록 우울하고 힘든데 개의 분변을 치워야만 했고, 산책도 가야 했으며, 내 밥은 굶을지언정 개의 끼니를 위해 고기를 삶아야만 했다. 한 번은 개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 의무감과 부담감에 짓눌려 구토를 한 적도 있다. 내 상태가 어떻든, 그 모든 과정을 울면서도 해야만 했다. 내가 울면 개는 어김없이 장난감을 가져와 놀자고 했다. 그것이 이 개의 위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서 더 고통스러웠다. 개에게는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개의 위로를 받는 순간엔 늘 죽고 싶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하등 위로가 안 되는 위로방법은 오히려 더 큰 상처와 짐이 되는 법이다. 상대가 말이 안 통한다면 더욱 그렇고, 내가 상대의 세상 그 자체라면, 그리고 그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당신에게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 되는 의무와 책임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반은 우스갯소리로, 반려동물의 보호자들은 늘 말한다.

우리는 아프면 안 돼요.

전적으로 공감한다. 보호자는 몸이든 마음이든 건강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것도 어쩌면 보호자로서 의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 반려동물을 내 삶에 들이는 순간, 이런 것조차 의무가 된다.

어쨌든, 어느 정도 증세가 호전이 되고 난 뒤에야 개가 건네는 위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우울 증세를 덜게 한 것은 개가 아니었다. 운 좋게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한 덕이었다. 앞서 말했듯, 개는 오히려 내 우울함을 깊게 만들었다.

당신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만큼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삶이 꼭 행복 가득한 나날들이나 힐링 포인트만이 될 수는 없다. 이 부분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마찬가지로 동물들마다 차이가 있다. 사람 역시 각자 위로의 방식이 다르듯, 동물들도 그 방법이 각기 다르다. 또한 동물들이 건네는 행동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게 나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되어 다가올 수도 있다.

TV나 SNS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본 적이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당연하다. 나도 이 이야기는 내 SNS에 올린 적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TV나 SNS에서 보이는 면만 봐서는 안 된다. 여전히 그 부분만 보고 싶다고 말한다면? 세 번째 말한다. 그럼 보호자가 올려주는 사진과 동영상만 봐라. 반려동물을 맞이하는 순간 생명경시자들의 환상은 깨질 것이고 불쌍해지는 것은 그들에게 끌려온 동물뿐이다. 그들이 “내가 불행한 게 아니면 됐지, 뭐.”라는 말을 하는가? 그럼 더욱 더 그들에게는 동물을 데려올 자격이 없다. 그들의 반려동물은 휴대전화 속에만 있어야 한다.

반려동물이 위로가 안 된다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너만 그런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나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나도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나의 반려견의 위로를 받고 죽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인생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다.

물론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게 고통만 있다거나, 고통이 행복보다 상대적으로 더 크단 소리는 아니다. 반려동물과의 삶이 주는 분명한 행복이 있고, 그들의 애정이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안정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 누릴 수는 없다. 내가 그 행복을 얻고 누리려면, 외면하고 싶은 것들 역시 겪고 안고 가야만 한다. 행복에는 공짜가 없다.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지만 정말 그렇다.

일러스트 이민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이거 하나 키우는 데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곳은 자본주의 사회이다. 모든 것에는 돈이 든다. 어쩔 수 없다. 하다못해 숨만 쉬어도 실시간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세상이다.

반려동물은 당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다. 게다가 반려동물은 모든 분야에서 아직 사람처럼 연구가 깊고 다양하게 이뤄지지 못했고, 시장이 상대적으로 작다. 돈이 많이 드는 게 당연하다. 나의 반려동물에게 효과가 있는 치약, 샴푸, 최소한 그들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 간식, 주식(主食), 정기적인 검진 비용, 장난감, 케이지나 보금자리, 산책이 필요한 반려동물이라면 산책용품……. 이 모든 것들이 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하고 비쌀 수밖에 없다. 만약 반려동물이 아프다면? 동물들은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니 말 할 것도 없다.

생명경시자들이 보고 반한 TV, SNS 속 동물들의 반짝이는 모습들도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여 얻은 결과다. 거짓말 같은가? 한 번 그 동물에게 들어가는 평균 비용을 물어보라. 입이 떡 벌어질 것이다. 동물들의 건강상태는 사람보다 더 노골적으로 외부에 드러난다. 동물들의 눈동자, 코, 피부, 털 등이 유독 반짝이고 촉촉하고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건 그 만큼 보호자가 반려동물의 건강을 위하여 엄청난 금전적 투자를 했다는 방증이다. 몰랐다고? 다시 말하겠다. TV나 SNS가 반려동물 양육의 모든 면을 보여주진 않는다.

생명경시자들이 알기 쉽도록 물건에 비유를 해 볼까? 장난감 로봇도 주기적으로 건전지 값이 들어가고, 충전하는 전기세가 들어간다. 그렇다면 생명경시자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동물한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하면 그게 터무니없이 싸네요?

맞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애완로봇을 키우면 된다. 그보다 더 추천하는 것은 애완 돌(石)이다. 돌은 로봇에 비하면 건전지 값이나 전기세도 안 들어갈 테니까.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커질 줄 몰랐어요.”
“나이 들더니 역변했어요.”
“애기 때보다 안 예뻐요.”
“제가 보고 산 애랑 다르게 컸어요.”
“늙으니까 병 들어서 돌보기 힘듭니다.”

이 말들이 어떻게 들리는가? 잔인하게 들리는가? 아니면 공감이 되는가?

공감이 된다면 지금 당장 본인의 어렸을 때 사진을 봐라. 이왕이면 공평하게 돌 전후가 좋겠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봐라. 그때와 똑같은가? 그때보다 귀엽고 예쁘단 소리를 자주 듣는가? 크기는 또 어떤가? 그때에 비해 당신은 얼마나 건강한가?

동물들의 시간 역시 착실하게 흐른다. 당신의 시간이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생명체는 인간과 짐승에 상관없이, 동물과 식물에 상관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고 늙고 병들기 마련이다. 살아서 시간의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불쾌한 비유이지만, 지나치게 수준을 낮춰 설명한다면, 하다못해 무생물조차 시간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녹이 슬기도 하고 부식되기도 하며 낡아 고장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생물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고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무생물도 그렇다. 그나마 그것들이 생명경시자들의 관점에서 더 나은 점이 있다면 크기가 더 커지지 않고 외형적으로 늙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

쓸수록 정말 스타 동물에게 혹해 동물을 키우려 드는 생명경시자들에게는 애완로봇과 애완 돌이 정말 딱인 것 같다. 강력히 추천한다. 어쩌면 그들이 원하는 트렌디한 동물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고 큰 만족감을 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재수가 좋으면 그들이 트렌드를 주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 번 시도해보길 바란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다

TV나 SNS 속 동물들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다. 또한 그 반려동물들의 매력을 끌어올린 보호자도 역시 하나다. 우리 모두 각자 이 세상에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 반려동물이 탐나고, 반려동물의 보호자 자리가 탐난다 한들, 그건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생명은 탐욕의 대상이 아니다. 아니, 탐욕을 가질 수는 있다. 개인의 생각을 막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을 꼭 알아두길 바란다. 이상은 이상으로만, 생각은 생각으로만 남겨두어라.

나보다 작은 몸집을 가졌다고 더 가벼운 생명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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