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누구에게 얼마나 이야기할 것인가

생각하다독립여성의 삶

서바이벌 게임: 누구에게 얼마나 이야기할 것인가

진영

지난 글에서 거듭 말한 바와 같이, 가족과 인연을 끊는다고 해서 추가로 어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단절을 계기로 많은 고통이 해소된다. 게다가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 비율이 최초로 25%를 넘어섰다고 하고 이들의 수가 520만에 이른다는 소식 또한 단절을 꿈꾸는 생존자들에게 꽤 긍정적인 팩트로 작용할 것 같다. 어쨌거나 이런 '환경 설정' 단계를 여차저차 통과해 가족 없는 시즌의 새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또 그 나름대로의 자잘한 과제들이 생기게 된다. 문제는 아니고 과제여서 기준과 방침을 정해 놓으면 슥슥 해결되는 수준의 것이다.

문제는 아니고 과제

20대 중후반을 통과하던 당시 나에게 연애를 걸어 오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였고 대체로 결혼을 원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어머니를 깊이 사랑하였다. 나도 함께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여야 한다면 차라리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나는 도저히 나의 어머니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녀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자기 부모들을 사랑하여, 그 면전에 대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부모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라는 인간이 나의 부모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괴롭기도 했다.

사실 나의 내면은 이보다 조금 더 복잡했다. 나는 '우리 가족은 화목하지 못해. 그런데 이게 부끄러우니까 애인에게는 사실대로 말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은 이만하면 화목해!' 하고 생각해버리기로 한 것이다. 애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쁘지만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괜찮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깨달은 바에 의하면 전혀 괜찮지 않았다. 

스스로를 속이면 필시 마음의 병을 얻는다. 나의 경우 싸우는 것을 못 보는 병에 걸렸다. 멀쩡하지 않은 가족을 멀쩡하다 멀쩡하다 하면서 억지로 끌어안고 지냈더니 갈등 회피형 인간이 된 것이다. 갈등 회피형 인간인 나는 경쟁도 회피했다. 이를테면 사탕이 하나밖에 없으니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먹는 걸로 하자는 제안을 받으면, 이겨서 사탕을 먹게 될 경우의 기쁨을 평가절하하고 져서 좌절하게 될 경우의 비탄만을 확대했다. 그리고는 '져서 좌절하느니 우아하게 양보한다'면서 사탕을 포기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가위바위보도 안 했는데 사탕을 먹게 되어서 좋아한다. 그러면 이 경쟁 회피형 인간은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착각하기에 이르고, 호구는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생존자 여러분, 그러니까 스스로를 속이지 마라.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없기 위해, 우리의 가족이 조금도 화목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 지점에까지 도달했다면 대체 누구에게 얼마나 이야기할 것인가가 우리의 과제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변호사와 정신과 전문의에게 말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하지만 돈이 든다.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나는 내 이야기 하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인간이어서 변호사와 의사는 물론이고, 사적인 관계를 맺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가족 이야기를 알고 있다. 덕분에 남녀의 교제가 얼마간 지속되면 당연히 양가의 어른이 인사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추석 명절이면 고향을 방문하여 차례를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곁에 잘 안 오게 되었다. 마치 미세 먼지를 포함한 공기를 필터로 걸러 들이마시는 것처럼, 내게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전부 걸러내진 것이다. 운이 좋았는지 필터를 통과해 나에게 닿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구축한 소중한 커뮤니티는 가족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나에게 김치를 보내 주는 사람도 있다! 지면을 빌어 말씀드립니다만 그 묵은지는 정말 맛있더군요. 올해부터는 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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