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7. '퀴어 판타지'를 발명하는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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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 오혜진의 백일몽 7. '퀴어 판타지'를 발명하는 영광

오혜진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백일몽 [day-dreaming, 白日夢]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비현실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것.

 

* 이 글은 필자가 무지개책갈피 주최 <퀴어문학 포럼>(성공회대, 2019. 11. 9)에서 발표한 「구겨버린 입장권(2)─퀴어문학의 독자성readership 구성에 관한 메모」의 일부를 축약・재구성한 것이다.

퀴어미학 연구방법론의
창안을 제안하며

이성애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서사를 소개해달라거나, 특정 소설이 이성애 중심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작가가 퀴어이므로 그럴 리 없다고 반박한다거나, 어떤 영화의 레즈비언 섹스신은 남성감독이 찍어서 관음증적이라는 식의 코멘트들을 들을 때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논리적 비약・왜곡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페미니즘’ ‘퀴어’ 서사임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본질론적 전제들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단언들은 늘 미심쩍다.

‘퀴어문학’이 이성애규범성과 본질주의적 사유를 거절하기 위해 구성된 전략적・임의적 범주로서가 아니라, 마치 낱낱이 폭로되고 탄로나고 규정돼야 할 어떤 정체의 비밀을 내장한 이름처럼 간주될 때 감지되는 것은 또 한 번 퀴어(queer)를 ‘식별’의 대상으로 번역함으로써 그것을 인종화・규범화・안정화하려는 의지다. 

퀴어문학이 지향하는 정치적・미학적 비전, 이를 묘사하기 위해 시도되는 재현의 기술 및 장치들이 지닌 특유의 성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퀴어문학’이라는 범주에 들어맞는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작가의 자질과 재현의 문법이 있다고 규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여타 ‘비-퀴어문학’(사실상 ‘비-퀴어문학’이란 없고, 그저 ‘덜-퀴어문학’ 정도가 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과 철저하게 분리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1. 모든 분리주의는 필연적으로 본질주의를 경유한다.

특정 작가의 커밍아웃은 특정 작품이 지닌 ‘퀴어문학’으로서의 ‘진정성’을 재단하기 위한 절대적인 근거인가? 누차 지적된 바, ‘정체성’은 특정 맥락에서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허구(necessary fictions)’*2일 뿐, 폭로나 누설, 상실의 대상이 아니며, 특정 작품에 대한 상품보증서일 리도 만무하다. 

작가의 커밍아웃은 해당 작품을 비평하는 데에 유효한 참고자료reference의 지위 이상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특정 재현의 장치 및 기술(skills)은 본질적으로 남성 중심적이거나 이성애 중심적인가? 예컨대, 특정 소설에 등장하는 “보갈”이나 “뒷보지” 같은 단어는 그 자체로 해당 작품의 여성혐오를 증빙하는가? 여성의 신체를 관음하듯 천천히 응시하는 카메라워크는 반드시 이성애자 남성의 욕망을 반영하는가?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정보는 그 카메라를 든 사람의 젠더인가? 길게 기른 머리, 분 바른 얼굴은 반드시 가부장제가 강요한 패션체계에 대한 복속을 뜻하는가?

퀴어서사의 드라마틱한 부상 이래, 퀴어미학의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거의 부재한 것은 꽤 기이한 일이다. 1990년대 캠프(camp) 미학부터 그에 대한 치열한 논박과 ‘전형화(stereotype)’ 논쟁에 이르기까지 문학・영화・연극・뮤지컬・드라마・미술 분야를 망라하는 (서구) 퀴어미학 연구사의 한 축은 분명 근대 페미니즘・탈식민주의・반인종주의・반국가주의적 진영의 미학비평 교본이 제공하는 부주의한 가이드를 경계하면서, ‘퀴어적인 것’을 사상시키지 않는 퀴어미학의 방법론을 모색・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는 특정 작가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혹은 특정 재현의 문법이 선험적으로 해당 작품의 ‘퀴어성’을 보증하거나 그 반대라는 식의 게으른 본질주의적 비평에서 벗어나려는 지적 시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 퀴어서사의 퀴어적인 것, 그 ‘특이성’을 보존할 수 있는 비평적 언어가 2019년 한국에서도 여전히 긴요하다. 요컨대 ‘퀴어서사’를 ‘퀴어’하게 읽기.

일러스트 이민


작가가 퀴어라면
'퀴어 문학'이 되는가?
무엇이 '퀴어 문학'을 '퀴어'하게 만드나?

퀴어미학의 핵심이 섹슈얼리티를 인위적・수행적(performative)・조형적(plastic)인 것으로 간주하는 아이디어에 있다는 것은 널리 합의된 바다. 퀴어미학 연구의 많은 작업은 주류 서사를 ‘퀴어미학’에 입각해 재독해(re-reading)하거나, 이성애자-남성의 것으로 과잉젠더링된 ‘플롯(plot)’ ‘응시(gaze)’ 같은 개념들이 내장한 퀴어성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완전무결한 ‘페미니즘 이미지’ 혹은 ‘레즈비언 이미지’를 창안하기 위해 일부 퀴어/페미니스트들이 내건,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그리고 여성에 대한’이라는 문구가 일종의 “봉인”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는 안나 마리 스미스의 비판적 독해*3 는 깊이 음미될 만하다. 그는 “진정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여성만의 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말할 필요, 즉 자신을 스스로에게 재현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며 두 개의 의문을 제시했다. 

“저 평가기준에 맞는 이미지가 성차별주의적이지 않은 결과를 낳도록 보장하는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그리고 여성에 대한’이라는 이상은 실제로 가능한가?” 

안나는 저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매매춘을 가부장제의 볼모로 묘사하는 사례, 반대로 남성포르노의 약호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마돈나의 뮤직비디오 <Justify My Love>의 사례(다만 이 텍스트는 인종주의의 각본을 전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는다)를 들어, 저 두 가지의 의문을 스스로 반박한다.

그런가 하면, ‘레즈비언 관객성(spectatorship)’을 탐구한 탬신 윌튼*4 이 보기에, 레즈비언 영화이론에서 진짜 문제는 감독이나 배우의 젠더정체성이나 성적 선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레즈비언의 욕망을 위한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레즈비언이 자신의 관람위치를 구성함으로써 등장인물이나 관음증적인 카메라에 대한 동일화를 즐길 수 있는 영화의 부재.

그는 주류 영화나 게이영화를 관람할 때, 레즈비언 관객인 자신이 그 서사와 카메라에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기울였던 “해석노동”(김미정)을 복기하는데, 이때 강조점은 그 영화들을 ‘반여성적’ ‘반레즈비언’ 영화라고 낙인찍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영화를 관람하면서 해당 텍스트를 끊임없이 레즈비언 욕망과 관련된 것으로 ‘번역’하는 ‘노동’을 기울인 덕에 결국 그가 그 영화들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즉 그는 ‘가변적’이자 ‘수행적’인 것으로서의 관객성(문학이라면 독자성readership*5)에 대해 말한다. 

그가 보기에, ‘퀴어미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제작자의 젠더나 특정 재현기법의 젠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그것을 둘러싼 컨텍스트가 제공하는 서사적 약호들을 적극 활용하고 그것과 “투쟁”함으로써 퀴어관객이 스스로에게 설득력 있는 ‘환상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순간에 있다. 그렇게 할 때, 그는 레즈비언(특히 ‘다이크’)을 오직 “거세된 남성”이거나 “물신화된 남근적 여성”으로만 재현하는 주류 영화에서조차 레즈비언 욕망을 투영할 장소를 찾아낸다.

그렇다면 레즈비언의 커밍아웃과 자살 문제가 등장하는 최은영의 소설 「고백」(<내게 무해한 사람>, 문학동네, 2018)은 어떨까? 이 소설이 ‘퀴어문학’인지 아닌지 따지는 것은 그리 생산적이지 않다. 특히 극중 레즈비언 인물이 자살한다는 설정 자체나, 작가가 퀴어가 아니라는 것(작가가 퀴어인지 아닌지 알 방법은 없다) 등을 이유로 이 작품을 퀴어문학이 아니라고 진단하는 것은 꽤 게으르고 부주의하다. 

다만, 레즈비언 인물의 커밍아웃과 자살의 의미는 후경화된 채, 이 사건들이 그저 살아남은 두 친구의 경쟁적인 도덕적 각성에만 소용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제시하는 두 개의 구조화된 ‘고백’ 서사에 레즈비언 욕망을 투영할 장소는 극히 비좁다. 즉 이 소설은 레즈비언 독자성(readership)에 어필하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서사는 아니었다. 물론 그것이 모든 서사의 목적일 필요는 없지만 말이다.*6

한편, ‘보는 주체로서의 남성’과 ‘보여지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고전적 테제에 기댄 로라 멀비의 ‘남성 응시(male gaze)’*7 가 과도한 규정력을 발휘하게 된 상황을 우려한 캐롤라인 에반스와 로래인 감먼의 견해*8 도 경청할 만하다. 

멀비는 ‘응시’의 근저에 ‘권력’이 있다는 푸코의 정신분석학적 모델에 기대, ‘영화에서 여성이 어떻게 보이는가’, 즉 ‘남성에 의한 여성의 대상화’를 쟁점으로 제시했다. 그는 고전영화 관람시 이루어지는 ‘보기 관계’에서, 관객의 ‘보기’가 카메라의 ‘보기’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관음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에반스와 감먼은 ‘남성쾌락을 위한 볼거리로서의 여성’이라는 구도가 ‘응시’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는 멀비의 논의에 반박한다. 멀비의 시각모델은 “레즈비언이나 게이의 욕망을 정신분석학 담론의 이성애적 용어로 설명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에반스와 감먼의 결론은 “본질적인 ‘레즈비언’ 응시 같은 것은 없지만 통용되는 레즈비언 심상이 있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여성을 위해 여성을 성애화하는 비디오를 많은 레즈비언이 즐긴다는 명백한 사실은 그 서사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응시’가 작동해서라기보다는, “레즈비언 영화감독과 레즈비언 수용자가 레즈비언 심상의 생산과 소비를 담지하는 다른 문화적 능력을 낳았”음을 증빙한다. 

“레즈비언 관람자는 특정 텍스트를 독해할 때 특정한 하위문화적 경험과 지식을 끌어온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는 어떤 본질주의적 레즈비언 응시모델도 거절하면서, 레즈비언 미학의 핵심이 역사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레즈비언의 “문화적 역량”을 유도・활용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퀴어 ‘관객성/독자성’ 구성 문제와 상통한다.

이런 예를 떠올려보자. 김봉곤의 소설 「라스트 러브 송」(<여름, 스피드>, 문학동네, 2018)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형’의 부음을 듣고 장례식에서 애도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다. 혹자는 이런 설정이 여느 서사에서 흔히 발견되는 장례식 풍경 및 슬픔의 정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길지 모른다.*9  이 소설을 ‘게이’ 작가가 썼다는 사실만 잊는다면, 이 소설이 묘사하는 정동은 ‘보편’의 그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독해방식은 당연히 아니다. 어떤 독자는 “문득 형의 사인을 단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8)라는 ‘나’의 언급, 그리고 그 자각 뒤에도 여전히 그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문장들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쩌면 이 모든 정황이 HIV/AIDS로 사망한 수많은 게이 장례식의 풍경에 대한 묘사임을 예감할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짧은 연애’와 ‘별도의 확인 절차를 요하는 애인의 신상’, ‘어떤 사인이나 병명도 밝혀지지 않은 채 전해지는 갑작스러운 죽음’ 등의 화소들에서 숱한 게이서사에서 별도의 주제군을 이룰 만큼 축적된 HIV/AIDS와 퀴어 장례식 재현의 전통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즉 이 서사에서 ‘퀴어적인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전자에게 「라스트 러브 송」은 굳이 퀴어문학으로 정의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게이종족지’라는 하위문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작품을 감상하는 후자의 독자에게 이 소설은 영락없는 ‘퀴어문학’이다.

작가의 정체성으로 '보장'되는
퀴어 서사는 없다

이성애-가부장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퀴어 서사는 없다. 작가의 정체성이나 특정 재현문법이 무조건 ‘퀴어 프렌들리’한 서사의 산출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떤 본질주의도 거절하는 퀴어미학과 근본적으로 불화한다. 

그러니 ‘퀴어문학은 퀴어가 읽고 써야 할까’ ‘퀴어인 내가 읽는/쓰는 것은 퀴어문학일까’ 같은 지루하고 재귀적인 물음은 잠시 접어두고, 좀 다른 질문을 해보자. 이를테면, 당신은 어떤 미적 경험을 할 때 당신의 퀴어 욕망・문화・지식을 소환하는지? 당신의 퀴어 판타지는 어떤 미적 계기에 의해 촉발되고 표현될 수 있는지? 아,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판단하는 것은 좀 나중에 해도 된다. 나는 당신의 도덕의지가 아니라, 욕망, 즉 ‘판타지’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올바른’ 것만 욕망하지 않으며, 대체로 욕망은 규범보다 우선한다. 레즈비언 소설의 성패는, 그것이 얼마나 ‘이성애자-남성’의 미학으로부터 자유로운지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강렬하고 능숙하게 레즈비언 욕망을 창안하고, 발견하고, 조율하고, 억압하고, 암시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남성에 대해 환상을 가지는 것처럼, 여성에 대해서도 (어리석고 사악하고 미친 것처럼 보이는) 환상을 가진다. 그 환상을 만들고 유지하고 조절하고 폭발시키는 일에 아주 요긴한 형식이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레즈비언소설의 영광이리라.

*1 자세한 내용은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 중 4부 「한국 퀴어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 참조

*2 시우, <퀴어 아포칼립스: 사랑과 혐오의 정치학>, 현실문화, 2018, 165쪽

*3 안나 마리 스미스, 주진숙 역,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에 대한’이라는 규칙은 괜찮은 것인가?: 시가적 독백의 불가능성」, 바바라 해머 외, 주진숙 외 역, <호모 펑크 이반: 레즈비언, 게이, 퀴어 영화비평의 이해>, 큰사람, 1999

*4 탬신 윌튼, 이순진 역, 「맥베스 부인이 되지 않기에 대하여: 레즈비언 관객성에 대한 몇 가지 골치아픈 생각」, 바바라 해머 외, 위의 책.

*5 ‘독자성readership’에 대한 연구로는 Janice A. Radway, Reading the Romance: Women, Patriarchy, and Popular Literature, Univ of North Carolina Press, 1991.

*6 오혜진, 앞의 글 참조.

*7 Laura Mulvey, “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1973. 쇼히니 초두리, 노지승 역, <페미니즘 영화이론>, 앨피, 2012 참조.

*8 캐롤라인 에반스・로래인 감먼, 「다시 보는 퀴어 응시 또는 다시 보는 퀴어의 관람」, 바바라 해머 외, 앞의 책.

*9 김녕・안지영・이지은・한설, 「소복한 밤과 우정의 동상이몽」, <문학동네> 94, 2018년 봄, 569쪽 중 김녕의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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