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17. 풍경 사이를 가만히 걷다

생각하다문학

다시 줍는 시 17. 풍경 사이를 가만히 걷다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얼마 전 무척 스트레스 받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나는 속으로 끝없이 되뇌었다.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건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문제의 원인을 외부 혹은 내부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둬야 한다. 문제의 심각성과 그로 인한 파장을 낱낱이 느끼며 괴롭고 슬픈 마음이 되는 것도 지금은 그만해야 해. 오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고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여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야 해. 그게 내가 살 길이다.’ 이번 기회로 나는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저 문제로부터 벗어나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 뿐. 또한 나의 위기 상황 대처 방식이 이전과는 다른 지점으로 변화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내 생에 최초의 위기 상황 대처 방식은 폭식이었다. 학교 끝나고 학원 끝나고 남동생의 조그만 손을 붙들고 낡은 재개발 아파트로 돌아가던 저녁 어스름. 아파트 상가에 있던 마트에 들러 엄마가 쥐어 준 몇 천원으로 온갖 과자와 음료수를 샀다. 한아름 안고 집에 돌아온 나는 동생과 함께 무한정 티비를 보며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셨다. 별다른 목적도 이유도 없는 습관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우리는 자정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매일을 살았다. 

어린 나는 어떤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고통받고 있다는 것도 내가 고통을 피하거나 달래기 위해 특정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이해하지 못 했다. 아빠는 나와 동생이 과자를 먹고 음료수를 마시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살이 찌고 건강을 망친다는 이유였다. 아빠는 걱정되는 마음을 폭력적인 언행으로 표현했다. 밥상머리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젓가락을 던지거나 하는 방식으로. 그게 정말 무섭고 싫었다. 그렇지만 나는 폭식을 멈추지 못했다. 그저 서러운 마음이 되어 남은 쓰레기들을 열심히 치웠을 뿐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난 위기 상황 대처 방식은 수면이었다. 새벽부터 봉고차에 실려 학교에 가서 종일 수업 듣고 공부하고, 친구들과 지지고 볶다가 야자까지 하고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던 청소년 시절. 틈만 나면 나는 잤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고개 돌리시면 자고, 쉬는 시간에 종이 치면 팔을 베개 삼아 자고, 점심 시간에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잤다. 하루를 잘 보내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시험을 망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시달릴 때면 도망치기 위해 더 잠에 들려 했다. 나는 내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자꾸 잠에 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기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참고 버티며 시간을 견뎌내는 길 말고는 몰랐다. 그렇게 잠 속으로 도망치면 그곳에는 끔찍한 꿈들이 가득했다. 매일 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시험에 늦는 일이 반복되는 꿈, 누군가로부터 쫓기며 도망치는 꿈. 늘어난 잠으로 불어난 꿈은 현실로 기어 들어와 나를 괴롭혔다. 그래도 현실보다 꿈이 나았을까. 나는 계속 잠을 청했다.

그리고 나타난 위기 상황 대처 방식은 하소연이었다. 대학에서 나는 사랑하고 신뢰하는 친구들을 몇몇 사귀었다. 힘들고 괴로운 마음이 들 때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염없이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며 서로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가끔 우리의 대화는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심각하고 진지한 골몰에만 머무르거나, 문제가 내게 남긴 상처를 들춰내기만 하는 집착에 빠져 버리기도 했다. 친구들과 한바탕 통화를 하고 나면 그 문제가 실제보다 더 크고 막막하게 느껴지기 일쑤였다. 당연히 마음은 더 심란하고 조급해졌다. 그때 우리들 사이에는 이상하고 끝없는 우울이 떠돌아다녔다.

언어를 잃은 풍경

먹는 것으로도 자는 것으로도 그리고 말하는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일기를 썼다.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떤 느낌과 기분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적었다. 또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를 또박또박 적었다. 어떤 날은 힘든 일이 7개였고, 또 어떤 날은 힘든 일이 16개였다. 그래도 일기를 쓰고 나면 스스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고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며 살아갈 용기가 조금은 생겼다. 그렇지만 완전한 혼자가 되어 일기장에 무엇인가 쓰면서 살아갈 때에, 나는 내 안에 완전히 갇혀버리고 말았다. 미모사처럼. 한 번 갇히고 나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는 깨달았다. 어떤 고통은 언어를 잃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에 대해 느끼거나 표현할 수 없는 상황도 생긴다는 것을. 가까스로 어떤 불가능 자체만을 감지하고 있는 상태.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 느끼고 생각하기보다는, 살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 어떤 풍경 하나가 세워졌다. 아주 커다란 바위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그리고 다시 저곳에서 이곳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풍경.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송승언의 『철과 오크』를 처음 읽었던 때를 생각해본다. 당시 내게 시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언어로 표현해 낸 세계를 의미했다. 그래서 송승언의 시집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토록 의미와 감정이 없는 풍경을 그려내는 일이 가능한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란 응당 의미와 감정으로 가득 찬 격동의 세계인데. 그러므로 나는 그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의 풍경을 닫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에는 의미도 감정도 없는 어떤 풍경 하나가 서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시인은 마음 속에 유형지의 풍경을 세워 두고 그 풍경 사이를 가만히 거닐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을 어물어물 시로 그려내 본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견디며 걸어보는 일

작품 <유형지에서>에는 알 수 없는 해변에 버려진 사람이 등장한다. 바다 생물의 사체와 돌의 먼지가 빛으로 너울대는 곳에서, 그는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생을 연명해 나간다. “살았다가/죽는 것처럼/죽게 되고/살게 되듯이” 눈이 날리고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리는 곳에서, 그는 모든 것이 망각되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모든 것이 뚜렷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위기감과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는 유형지에 자신을 버린 것이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고 유형지에서의 탈출을 꿈꾸지도 않은 채 그저 걷는다. 그렇게 풍경 사이를 걷는 가운데 어딘가로부터 침묵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송승언의 시집을 다시 읽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세워져 있을 어떤 풍경에 대해 생각해본다. 당연히 나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세워진 어떤 풍경이 존재할 것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대처하거나 해소할 수 없는 고통의 풍경. 송승언의 시집을 읽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세워진 어떤 풍경 사이를 가만히 걷는 일의 가치를 생각한다. 나와 당신의 마음 속에 세워진 고통의 풍경을 찢거나 덮지 않고 가만히 견디며 걸어보는 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도 이 풍경을 시로 그려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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