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리니까 아름답고, 예쁘니까 사랑하며

생각하다연애관계

팔리니까 아름답고, 예쁘니까 사랑하며

유의미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나는 보여지는 것에 신경 쓴다. 

그러나 예쁘면 다 되는 사회, 못 생기면 안 되는 사회에 반대한다. 여성의 몸을 함부로 판단해 등급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지만, 아름다운 외모가 곧 자원과 권력인 시대에, 부지런히 몸을 가꾸고 관리하라는 요구를 외면할 만큼 용감하지는 않다. 사회가 요구하는 미의 기준이 남성의 시선인 것도 알고 있다. 일하거나 싸우기에 좋은 활동적인 몸이 아니라 공주처럼 얌전히 있기에만 적합한 몸이 유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뒤바뀐 이갈리아에서 힘센 남자보다 키 작은 남자를 예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도 이 절망적인 사회의 일원이기에 내 눈에도 그게 더 예쁘다는 게 문제다. 나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 새로운 미적 기준을 만들어보고 싶어도, 반사적으로 예쁘다고 느끼며 마음이 움직이는 쪽은 따로 있다. 그래서 아마 내가 지금 레즈비언 만남 사이트에 글을 올린다면, 예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쓸 것이다. 모든 여성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연애 상대는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모순덩어리 선언

좋든 싫든 함께 생활하고 부딪히는 사이에서는 성격이나 취향 같은 다양한 면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외모 이외에도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고, 특별한 시너지가 있어 유독 나와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관계를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연애를 염두에 두고 누군가를 새로 만난다면, 생전 처음 본 상대를 대체 어떤 이유로 사랑해야 할까? 시간을 두고 알아온 친구라면 근황을 나눌 수도 있고 함께 얘기할 추억이나 관심사도 있지만, 처음 본 사이에는 망원동의 어떤 카페가 분위기가 좋다거나, 주말에 샤로수길에서 오므라이스를 먹었는데 맛있더라는 직장 동료와의 점심시간 같은 대화밖에 할 수 없다. 이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고 오히려 수고스럽다.

그러나 의외로 처음 보는 상대가 궁금할 때도 있다. 바로 외모가 마음에 들 때다. 나에게 레즈비언이라는 건, 어느 정도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여성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니까. 이 말은 선언하는 즉시 모순덩어리가 된다. 나는 늘 충분히 낯선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고, 지긋지긋한 나와 내 주변에서 벗어나 색다른 삶과 구원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한다. 그럼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성별을 감지하여 여성만 골라서 사랑하는가? 당사자의 성별정체성도 아니고 그냥 ‘내가 보기에’ 여성이라서 여성이라고 판단하는 건, 염색체와 생식기와 호적만큼이나 불완전할 뿐 아니라 심지어 무례하다.

그렇다고 한때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던 ‘나는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하고 보니 여자였다.’는 말이 나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수많은 퀴어들이 각자의 맥락을 갖고 있겠지만, 나는 대체로 단호하게 여성성으로 읽히는 특징들에 매혹된다. 긴 생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사람, 카랑카랑한 높은 목소리에 긴 속눈썹을 가진 사람, 짙은 눈 화장과 하이힐이 잘 어울리던 사람에게 사랑에 빠졌고, 다정하거나 애교가 많거나 섬세하다는 점을 사랑했다. 때로는 주눅 들지 않고 할 말을 다 한다거나 자신감 있는 태도를 사랑했지만, 그런 태도는 상대가 여자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나는 대체로 자신감 있는 태도의 남성을 아니꼬워하고, 그 반듯한 자아가 길러진 환경이 부러워 마음에 거슬릴 때가 더 많다.

아름다움의 정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성이 정치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름다움마저도 다분히 정치적이다. 고대에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풍만한 체형이 선호되었다는데, 왜 내 눈에는 하필 마른 체형이 예뻐 보일까? 우리는 미적 기준과 안목을 장착한 채 태어나지 않았고, 사회에서 채택하고 찬양하는 외모를 아름답다고 배운다. 풍만한 체형은 노동력이 귀하고 먹을 게 없던 시절 다산과 풍요를 드러내서 선호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예쁜 사람도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아름다움의 이상을 가능한 한 가깝게 재현한 여성이다. 잘 관리된 외모나 트렌드를 따라가는 패션 감각은 그럴 여유가 있는 계급임을 과시한다. 사랑이라는 본능적이고 순수해 보이는 활동에도 이렇게 가부장제로 얼룩진 여성성과 미적 위계가 개입된다. 나는 다른 모든 가치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 사람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욕망하는 사람’을 원하고 사랑한다. 사회적으로 선호되어 높은 가치를 지니는 귀중한 사람일수록 더 매력적으로 느낀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내면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보이는 것도 사람을 꽤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스트라면서 ‘여성스러운’ 사람의 예쁜 외모에 반해 사랑을 말한다.

외모에서 오직 계급만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화를 즐겨 신는 여성이 하이힐을 신는 여성보다 활동성을 중시하는 사람일 것이고, 화장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보다 화장품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드러난 것 외에 나눌 얘기가 거의 없는 사이에서 외모는 서로 더 알아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또한, 사람은 보이는 모습대로 기대되고 이에 맞춰 행동하면서도 형성되기에, 차림새에 따라 어느 정도의 성격과 가치관을 예상할 수도 있다. 짧은 머리에 후드티를 입고 에코백에 페미니스트 배지를 주렁주렁 단 사람이 가부장제를 대하기로 한 방식과 스커트를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한 사람이 택한 전략은 다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섹시한 이미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오늘 아침에 집어 든 옷과, 발랄한 이미지를 추구하는 사람이 입고 나온 옷은 디자인이 매우 다를 것이다. 강요되는 이미지와 내 주체적인 욕망 사이에서 얼마나 타협하고 얼마나 저항할지 고민한 결과를 그 사람의 스타일이 말해준다.

비슷한 사람을 찾는 연애에서 외모를 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하게 여성성을 수행하며 규범을 학습한 사람의 행동 방식이 덜 불편하다.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은 부드럽고 조용한 사람을 좋아하고, 그게 ‘여성스러움’이라면 다르게 부르면 더 좋겠지만 일단은 맞는 말이다. 삶의 큰 부분인 외모관리에 관해서도 나랑 비슷한 전략과 고민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관심사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 나와 삶을 섞고 합칠 사람이 비슷한 계급이거나 좀 더 여유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인생계획이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범위가 특별히 신경 써서 배려할 필요 없이 비슷했으면 좋겠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취향이 완전히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매력적인 외모가 이런 요소들을 모두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서로가 좋아할 요소들을 가졌을 거라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관계를 시작할 계기가 될 수는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상대를 알아가고 나면 외모가 그 사람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걸 쉽게 깨닫게 되고, 더는 외모가 그의 매력을 좌우하지도 않는다. 사실 외모로 많은 걸 파악하려는 시도는 누군가를 더 깊이 알아갈 여유가 없어 간단하게 짐작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다. 나는 늘 일일이 비교해보지 않고 광고를 대충 보다가 좋아 보이는 걸 사고, 실제로 세균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라도 눈으로 봐서 깨끗해 보이면 안심되고, 올라간 휘핑크림이 예뻐야 카페모카가 맛있는 비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말이다.

나는 한때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의 외모를 언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게나 외모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무엇이 예쁜지 계속 느끼면서 그저 입 밖에 내지만 않는다는 건 뭔가 불충분했다. 상대방의 면전에서 외모를 품평하지 않는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예쁨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싶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획일화된 남성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지만, 어차피 겉으로 매력적인 사람을 사랑하며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면, 대안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시선을 되찾는 일은 활력과 자신감을 준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외출하기 전이면 늘 자주 접속하던 패션 커뮤니티에 입고 나갈 옷을 올려 투표를 받았다. 내 안목과 코디 능력을 믿지 못해서였다. 당연히 미리 계획한 약속만 참석할 수 있었고, 외출 전에는 여러 코디를 사진으로 찍어 글을 올리고 누군가 충분한 숫자의 사람들이 투표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기준이 타인에게 있다는 건 이토록 번거롭고도 불안한 일이다. 그런 절차 없이 외출할 수 있게 되자 얼마나 뛸 듯이 기뻤는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던 옷이어도 대다수의 사람이 반대하면 금세 초라해 보이곤 했다. 그럴수록 점점 더 내 안목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의 투표에 따라 내 눈에 비치는 아름다움이 달라진다는 건, 아름다움이 변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고 유동적이다. 입술에 접시를 넣는 게 아름답다고 여기는 무르시족이나 목에 링을 끼우는 카렌족의 위험한 외모관리까지 얘기할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 유독 선호되는 브이라인의 작은 얼굴이라거나 일자 눈썹 메이크업 등만 봐도 유럽이나 미국의 미의 기준과는 다르다. 절대적이고 공통적인 아름다움은 없고, 그렇다면 나와 다른 여성들도 충분히 새로운 아름다움을 제시할 수 있다. 사회가 인정하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에 일조할 수 있고, 더 건강하고 해방적인 방식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시선으로 꾸준히 바라보고 새롭게 해석하자. 그리고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조금 다른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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