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12. '여아선호'라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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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12. '여아선호'라는 판타지

Ah

일러스트레이터: 이민

정바당이 남자아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엄습했던 막막함과 두려움에 대해서는 이미 2화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 싶다. 배 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걸 알렸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들도 한 몫 했다. 대부분 짧은 탄식이거나 위로였다. 어떡하냐고, 힘내라고, 괜찮다고,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면 이백점짜리라고. 그런 말들이 나를 더 막막하고 자신없게 만들었다.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도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추가됐다.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가서,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서, 수리센터에 핸드폰을 고치러 가서 아이 얘길 하다보면 대부분 개월 수와 함께 성별을 제일 먼저 물어온다. ‘아들’이라고 하면 으레 ‘힘들겠다.’거나 ‘남편 분이 아쉬워하겠다.’ ‘딸이 키우는 맛이 있는데.’ 같은 반응들이 돌아온다. 내 기분이야 둘째치고 확실히 우리 사회는 이제 아들보다는 딸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짜 여성상위시대가 와버린 거야?

모두들 알고 있듯이 우리 나라는 대표적으로 남아 선호에 의한 ‘여아 살해’가 이뤄진 나라다. 그게 뭐 수십년 전의 일도 아니다. 한국의 출생성비(여아 100명 당 남아 수)가 최대인 116.5를 찍은 건 1990년이다. 말하자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읽고 있는 당신들은 아주 운이 좋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과 30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들’을 갖기 위해 아들 가진 엄마의 속옷을 빌려입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자세로 섹스를 하고 그러다 낳은 아이가 막상 ‘딸’이면 온돌도 깔리지 않은 냉골바닥에 그냥 던져두고는 그 아이가 죽지 않으면 ‘그래도 지 명줄 하나는 타고 났다’면서 그제야 젖을 물리던 나라였는데 말이다. 2017년 맘까페에는 아직 성별 감별 이전인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올려두고 아들인지 딸인지 봐달라는 글들이 난무한다. ‘딸이면 어떡하죠?’ 라는 글들도 간혹 눈에 띄지만 ‘아들이면 어떡하죠?’, ‘딸이 너무 갖고싶은데요’, ‘아들인 것 같다는데 성별 반전 없을까요?’ 같은 글들이 더 많이 보인다. 세상에, 그 사이에 뭔가 대변혁이라도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면 이것이 바로, 그 말로만 듣던 ‘여성상위시대’?!

딸 키우는 재미

그럴싸해 보이기도 한다. 분명 ‘남성’보다 ‘여성’이 ‘선호’되고 이런 마음들을 거리낌없이 표현하니 말이다. 여전히 베이비 부머 세대 이상의 장년층, 노년층에서는 ‘손자’가 더 예쁨을 받지만 내 주위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 많은 이들이 아들보다는 딸을 원한다. 그 이유는 거의 비슷비슷한데 가장 많이 하는 얘기들은 역시 ‘딸 키우는 재미’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딸이 애교를 부리고 ‘여우짓’을 떨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특히 아빠들은 껌뻑 죽는다고 했다. ‘딸바보’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다는 개인적 소망을 공공연히 털어놓기도 한다. 거기에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딸이 부모와 가족을 더 애틋하게 생각하고 잘 챙긴다는 것도 늘 나오는 얘기다. 나도 아들이지만 아들 자식 키워놔봤자 아무 소용 없단다. 딸 가진 부모가 비행기 탄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고 덧붙이기도 한다. 아빠들이 딸바보에 대한 로망이 있듯이 엄마들에게는 딸과 친구가 되어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한 여성 잡지에서는 50대 여성의 행복 조건으로 돈, 친구, 딸을 꼽기도 했단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아들보다는 딸이 키우는 데 경제적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다. 아들이면 아무래도 나중에 결혼할 때 전세값 정도는 해놔야 할테지만 딸은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 거다.

자, 그러니까 요약해보면 ‘딸’이란 어린시절에는 애교를 피우고 아양을 떨며 부모를 기쁘게 해주고 성인이 된 후에는 가족과 부모 돌봄을 성실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친구라는 정서적 역할까지 채워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뭐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인가. 아니, 오히려 아주 익숙한 패턴이다. 유독 여자 아이에게 애교를 보여달라고 하고 그 여자아이가 자라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명절이나 제사, 누군가의 생일 등의 가족행사에서 참여해 일손이 되는 것을 당연시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간병자로는 대부분 딸이 소환되고 부모의 환갑, 칠순 등을 맞아 가족여행을 기획하는 것도 딸(과 며느리)의 몫이 된다. 이게 정말 과거의 남아선호라는 세태와 같은 층위에 있다고 이야기할만한, ‘여아선호’라는 상황인걸까? 

2007년, 우리 나라의 출생성비는 105로 정상 수치가 되었다. 많은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여전히 성비 불균형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그 이후로 정상 범위의 출생성비를 유지하고 있는데 학자들에게 이는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해석됐었다고 한다. 생물학적 요인이나 근대 사회에서나 유효했던 재산 축적 등의 이유로는 전혀 무관한 현대의 남아선호라는 악습이 사라졌다는 신호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인식의 진보’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알고보니 1.08명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생률의 결과였다.첫 임신에서 태아의 성별로 낙태를 하는 케이스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저 ‘아들 딸 구별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는 시대가 되었던 것 뿐이다. 1980년대 성 감별이 한창일 때에도 첫 아이의 성비는 104로 정상 범위에 있었다고 한다. 즉, ‘남아선호’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아선호’ 역시 ‘남아선호'라는 유령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여아 살해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거에 행해졌던 ‘아들 골라 낳기’를 남아 선호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 그 단어가 실제로 벌어진 일을 아주 작은 일로 축소시키며 은폐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중대성과 끔찍함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여아 살해(femicide)’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야 한다. 이는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진 대량 학살이다. ‘선호’라는 말은 이 엄청난 일의 무게를 결코 다 담지 못한다. ‘선호’란 말 그대로 무언가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옵션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옵션이 더욱 애정을 받는 것이다. 지금의 ‘여아 선호’라는 ‘경향성’에 잘 어울리는 단어다. 아들보다는 딸을 더 원하지만 그렇다고 딸만을 고집하지 않으며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도 태아 살해를 저지르지 않는 지금의 상황 말이다.

흥미롭게도 여자아이가 선호되는 듯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남자아이가 키우기에 속은 편하단 얘기들을 많이 한다. 흔히들 막 키워도 된다고 한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에 비해 손도 많이 안 가고 외출해서 정 안되면 그냥 유모차에 태운 채로 기저귀도 갈고 옷도 갈아입힐 수 있다고 말이다. 흉흉한 세상, 그나마 그래도 남자아이라서 마음이 좀 놓인다고들 말이다. 이 말들을 입 속에서 가만히 굴려보고 있자면 마음이 점점 더 복잡해진다. 여자 아이들은 아동임에도 그들의 생물학적 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발가벗은 몸을 드러내는 게 끝의 끝까지 꺼려진다는 것.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흉악한 범죄의 타깃이 될 확률이 남자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다는 것. 이 사회가 여전히 여성에게 훨씬 더 위협적이며 또한 불합리하단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선호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다보면 머리까지 아파온다. 부모의 기쁨이 되고 부모의 친구가 되고 부모의 정서적 부양자가 되길 기대받는 딸들. 부모들이 그들의 생(生)에서 ‘딸’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대해왔는지를 되짚어보며, 한 명의 ‘딸’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기대 됐던 많은 역할들을 떠올려보자면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여아 선호라는 블랙 코미디

<남성 과잉 사회>의 저자 마라 비슨달은 세계적으로 만연한 ‘여성 혐오’의 원인을 과거에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여아살해’로 인한 성비 불균형에서 찾는다. 인구통계학자들은 자연 출생 성비가 유지되었다면 아시아에서만 약 1억 6,300만 명의 여성이 더 살고 있을 것이라고 산출하는데 이는 곧 그만큼의 남성들이 잉여 남성(*결혼 가능한 모든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는 가상의 모델에서 남겨질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잉여 남성들이 ‘선택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고 이것이 미소지니로 나타난다는 것이 마라 비슨달의 주장이다.

한 학자의 주장을 수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태아 성감별과 여아살해가 결과적으로 수많은 잉여 남성을 만들어냈다는 인류통계학적 분석만큼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들 나름대로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선택들이 결국 그 선택의 결과물들을 여분의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니, 이보다 더한 블랙 코미디가 또 있을까. 결국 우리 사회의 여아 선호란 여성상위시대 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소리다. 무엇보다 여아가 선호된다는 이유들을 곱씹어 보고 있자면 더욱 그러하다. 진짜 여아선호 사회, 그리고 여성상위시대가 되려면 적어도 ‘딸’이 아무런 이유없이, 과거에 많은 ‘아들'이 그러했듯이, 그저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갓 지은 밥을 상석에서 먹고, 두 개 뿐인 닭다리를 양 손에 쥘 수 있고, 설거지나 전 부치기 따위와는 평생을 아무런 상관없이 살 정도는 되야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여기 누가 그런 사회를 바란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그저 늘 그래왔듯이 그저 나답게, 나로서, 존중받으며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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