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9. 나도 내가 이런 엄마가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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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9. 나도 내가 이런 엄마가 될 줄 몰랐다

Ah

일러스트레이터: 해일

현명하고 우아한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엄마가 된다는 걸, 아니,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어떤 엄마가 될 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었다.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해 아이의 기질과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양육자가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되 아이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존중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자신있었다. 나는 내가 아주 현명하고 우아한 엄마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아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돌발 상황에도 허둥대지 않고 침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나와 아이의 투샷은 매우 평화로웠다. 만삭의 배로 동네 도서관에 산책을 다니던 시절, 산책로에서 마주친 엄마가 대여섯살 정도 되었을 법한 아이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앞에 잘 보고 걸어. 자꾸 물어본 거 또 물어보고 그러지 말고 앞을 잘 보라니까.”라고 하는 걸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너무하다고 생각했고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 영상 속 당혹스러워 하던 엄마

로버트 켈리 교수의 BBC 인터뷰 영상을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이 영상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역시 많은 서양인들이 아이들의 엄마를 (아시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모라고 단정한 것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타임라인 한 쪽에서는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대응이 올바르지 못했고 아이들이 그런 상황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는데 그걸 보고 재밌다고 웃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들 또한 오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이야기들을 처음 봤을 때 약간 당황스러웠다. 나 역시 그 영상을 보고 딸 매리언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그녀를 보며 엄청 웃었기 때문이다. 매리언의 스웩에 감탄하다가 8개월 아들이 보행기를 타고 등장했을 땐 세상에나, 했고 그 때부턴 감상포인트가 조금 달라지긴 했다. 내 상황이 상황이라 그랬는지 빛의 속도로 방문을 열고 들어와 거의 바닥과 한몸이 되어 아기들을 데리고 나가던 엄마 김정아씨에게 눈이 갔다.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녀는 거실에서 방송을 보고 있다가 화면에 아이들이 나오는 걸 보고 너무 놀라서 방으로 뛰쳐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전세계로 나가는 방송, 집에서 편하게 입고 있던 티셔츠 차림, 매만지지 않은 머리와 얼굴, 그런 것들이 모두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어쨌든 김정아씨는 정말 번개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한 손으로는 아들의 보행기를 밀고 한 손으로는 침대에 앉아 스웩을 뽐내던 딸 아이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직 8개월인 아들은 영문을 모르는 채로 순순히 나왔지만 매리언은 달랐다. 침대에 앉아 있다가 바닥으로 끌 려내려왔을 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들었을 그녀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 버텼고 그럴수록 엄마는 더 세게 잡아당겼을 것이다. 결국 매리언은 “엄마 왜 그래에에에 싫어어어어”하고 울먹이며 퇴장했다.

매리언의 입장에선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고 속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 하던대로 가볍게 몸을 흔들며 아빠 서재에 들어갔을 뿐인데, 게다가 그냥 얌전히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들이닥쳐 거칠게 잡아당겼으니 이런 날벼락이 또 어딨겠는가. 그런 대신에 몇몇 사람들이 지적했던 대로, 로버트 켈리 교수가 난입한 아이들을 쳐다도 보지 않으면서 팔로 밀어내는 대신 자연스럽게 안아 무릎에 앉혔다면 근사했을 것이다. 김정아씨가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써서 매리언이 방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했다면 내가 상상했던 침착하고 우아한 엄마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내가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글쎄,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걸까. 아니 꼭 일어나야만 하는 일인 걸까. 나는 뭐라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나라면?

그 영상과 일련의 논란들을 지켜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너무 놀라서 어떤 방법이 좋을까 고민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고 반사적으로 최대한 신속하게 아이를 데리고 나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의도치 않았더라도 아이가 폭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아이가 명백하게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뭐가 재밌냐던 말들은 그래서 더 아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다. 내가 김정아씨와는 다르게 모든 폭력과 좌절의 가능성이 배제된 방식으로 아이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올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지적들이 무의미 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어른들의 사정때문에 아이에게 어떤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이 입장에선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런 상황을 경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남편과도 이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 우리가 내린 결론은 이런 의식을 갖고 노력하려는건 매우 중요하고도 당연한 양육자의 의무다. 하지만 매 순간 그렇게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내가 실수를 했을 때 어떻게 할지를 준비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 한 번도 아이를 상처입히지 않고 좌절시키지 않을 수 있는 양육자는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아할 수 없어서

물론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설명을 하고 잘 타이르고 달래서 상황을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 상황에 따라 아이가 느낄 부정적인 기분, 좌절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어떤 행동을 제재해야 할 때도 있고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이를 얼른 달래야 할 수도 있다. 가령 아이들은 옷을 입기 싫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지러지게 울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 아이에게 '아이의 의사에 반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옷을 입히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좀 우악스럽게 아이를 붙잡아 물리력을 가하게 되기도 한다. 순간만 보면 폭력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기를 망설인다. 설령 그렇게 했을지라도 그런 행동 후에 양육자가 아이를 안고 토닥여주고 잘 설명해줄 거라는, 선의를 전제한 믿음이 있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든 의도가 무엇이었건 내가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는 것. 상황 핑계나 변명을 대지 않고, 아이가 이해할 때까지. 그리고 다음부터는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할지 생각하고 의논하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 하는 것. 이걸 제대로 하는 것도 아주 어려운 일이고 이걸 제대로만 해낸다면 그래도 꽤 괜찮은 부모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로버트 켈리 교수와 김정아씨의 대처가 ‘폭력적’이었다고 저 영상속의 아이들은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된 거라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어떤 것들은 아이에게 당연하지 않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어떤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서 조금 괴롭다. 3화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바로 그 무시무시한 6개월 급성장기 때의 일이다. 낮시간엔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웃고 잘 안기는 정바당이 새벽에 자다 깨기만 하면 오로지 나만 찾았다. 친정엄마나 남편이 안으면 더 자지러지게 울었고 그 울음을 달래는 데는 시간이 갑절로 들었다. 새벽마다 일어나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두세 시간씩 안은 채로 걸어다니고 노래를 불러주고 그런 일들이 몇 주 째 반복된 날이었다. 나는 정말 미쳐버리기 직전이었고 무슨 수를 써도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보며 순간적으로 정말 더 이상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바당을 안고 있던 아기띠의 버튼들을 있는 힘껏 눌러 빼면서 “됐어! 너 정말 안 잘 거지? 그럴거면 그냥 여기 누워서 놀아! 자지 마! 자지 말라고!!!” 짜증을 내며 정바당을 캄캄한 거실 매트위에 매몰차게 내려놓았다. 정바당은 가뜩이나 울던 와중인데 바닥에 내려 놓기까지 하자 더 악을 쓰며 울었고 나는 그 울음소리에 바로 정신을 차렸다. 다시 아이를 안기까지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일을 너무나 후회한다. 아직까지도 그 때가 떠오를 때면 아이에게 혼잣말로 미안하다고 얘기한다. 할 수만 있다면 정바당을 낳던 날로 돌아가 그 날부터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다. 그럼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텐데, 아이게 화풀이 같은 걸 하진 않았을 텐데.

그날이 떠오를 때마다 나에게는 당연한 규칙들이 사실 아이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린다. 아이 입장에서야 대체 밥을 던지면 안 되고 콘센트 구멍을 만지면 안되고 소리를 지르면 안 되고 신발을 씹어먹으면 안 될 일이 뭐가 있겠나. 그 아이 알 바가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가르치는 일이 나의 일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누구보다도 이 아이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이는 언제나 약자다. 내가 감정이 있는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지만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언제나 더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그 말로 숨기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어떤 엄마가 굳은 얼굴로 아이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앞만 보며 걷고 있다고 해도, 아이의 팔다리를 꽉 붙잡고 아이에게 옷을 입히다가 아이를 울린다고 해도 나는 그녀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고작 내가 본 한 장면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를 기르기 전에 내가 가졌던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한 엄마’라는 이미지는 모성이라는 고정관념과 경험의 부재에서 온 판타지였다. 아이를 기르고 있는 입장에서 내가 어떤 엄마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경험이 주는 편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와 정바당의 관계가 사랑하는 엄마-아들 사이임과 동시에 양육자와 피양육자라는 권력관계이며 이 관계에서 당분간, 그러니까 꽤 오랫동안 절대적 강자는 나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많은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양육자 분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해 오래 또 깊이 생각해보시길, 당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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