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본다 6. 엄마는 페미니스트 (상)

생각하다육아

엄마, 본다 6. 엄마는 페미니스트 (상)

Ah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여성 양육자 페미니스트

최근에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오랜만이라 그랬는지 구구절절 말이 길어졌는데 집에 돌아와 곱씹어보니 ‘여성’, ‘양육자’, ‘페미니스트’라는 세 단어로 요약됐다. 아이를 기르면서 내가 가장 고민하고 또 몰입해 있는 정체성들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엄마는 페미니스트>는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필독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출간 직후 펼친 책에서 나를 사로잡는 구석은 많지 않았다. 다른 페미니즘 서적들처럼 나를 심란하게 하지도,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하지도 않았다. 그때만 해도 “엄마”와 “페미니스트”라는 각각의 역할 사이에 어떤 모순도 없다고 생각했었고 내가 바로 “엄마”이자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별 다른 혼란 없이 “페미니스트 엄마"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가 커가면서 일은 점점 복잡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빠방' 사랑

이제 22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요즘 자동차에 푹 빠져있다. 가끔 사방이 조용해 아이가 뭐하고 있나 보면 자동차가 든 장난감 수납장을 꺼내서는 혼자 ‘부릉부릉’, ‘뛰뛰빵빵’, ‘붕붕’하며 신나게 놀고 있다. 산책을 나가서도 ‘붕붕’을 쫓아다니느라 바쁘고 어쩌다 포크레인이나 래미콘같은 ‘특수차량’을 만나는 날에는 가던길을 멈춰 관람에 들어간다. 아이는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아서 <로보카 폴리>나 <타요>같이 탈 것이 주인공인 콘텐츠들을 본 적이 없다. 보육시설도 아직이다. 적어도 남편과 나는 자동차에 특별히 가중치를 둔 적이 없다. 

아이의 빠방 사랑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모를일이다. 그렇지만 뭐, 아이가 좋다면 좋은거지. 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 별 일 아닌 일을 별 일로 만드는 건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이다. 아이가 자동차에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는 걸 지켜본 이들 대부분이 “역시 남자애라 그렇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이가 자동차에 관심을 갖는 게 약간 못마땅해졌다. 아이는 자동차 만큼이나 주방놀이와 장보기 놀이에도 시간을 할애하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선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능이라 불리는 것들에 의구심 갖기

최근에 트위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작은 한 페미니스트 엄마의 고뇌였다. 절대 자신의 딸을 핑크 공주로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자기 딸도 그랬고 여자아이들이 3~4세에 무조건 “핑크”를 선호하는데 그런걸 보면 아무래도 여자아이가 핑크를 좋아하는 건 ‘본능’같단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럽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트윗을 작성한 분의 복잡한 심경은 약간 이해가 가면서도 이 이야기가 많은 이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물론 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자동차는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그걸 알 수 있을까. 그건 그저 타고난 취향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무결한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나 유아용품조차 성 고정관념과 성역할을 재현하고 답습하는 현실을 인식한다면 "여자아이가 핑크를 좋아하는 건 본능인 것 같다"는 말에 의구심을 갖는 것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의무가 아닐까. 모든 게 어쩌면 여자아이가 핑크를 좋아하도록 설계된 것 아닐까라는 음모론이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0개월 짜리 아이옷에도 남아용은 파란색에 자동차, 여아용은 핑크색에 꽃무늬인데 말이다.

정작 내가 못마땅하고 심란했던 건 이런 일들이 결국 ‘‘페미니스트’와 ‘양육자'의 역할갈등 상황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뾰족한 답이 없어서다. 나는 내 아이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를 제시함으로써 성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편향을 축소해나가고 싶은데 ‘자아'가 생기는 시기에 양육자가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위험하지도 않고 중대하지도 않은 일이라면 웬만한 것은 아이의 뜻대로 하게 해라.”다.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아이에게 성역할에 관련된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미봉책이지만 기계적 균형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이가 이른바 “남아완구”로 분류되는 자동차와 공구놀이에만 관심을 쏟지 않도록 “여아완구” 코너에 있는 주방놀이소품과 인형으로 아이를 끊임없이 유도했다. 늘 여자애냐는 말을 듣고 때로는 일부러 여자애처럼 입혔냐는 타박을 들으면서도 부지런히 아이에게 메리제인을 신겨 나갔다. 옷을 고를 때면 이렇게 어린 아이들 옷조차 성별에 따라 분류해놓는 게 마음에 안들어서 괜히 '베이비 걸' 카테고리도 유심히 보곤 했다. 그림책을 살 때도 주인공이 여자아이인 책들을 일부러 더 챙겨두었다. 워낙 많은 책이 남자아이가 주인공이라 그렇게 해야 겨우 성비가 맞았다.

그런데 이제 곧 아이가 그것들을 거부할 것이다. 그 ‘취향’과 ‘호오'가 어떤 바탕에서 생겨났든간에 “싫다”고 하는 아이에게 내가 억지로 메리제인을 신길 수는 없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양육자로서 매우 나쁜 태도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건 어떻게 하는걸까. 핑크색은 여자색이라서 싫다고, 나는 남자니까 예쁘다고 하지 말고 멋지다고 해달라고 얘기하는 아이에게 내가 어떤 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성차별, 편견, 여성혐오, 가부장제 이런 핵심어들을 빼고 내가 아이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방법이 있긴 있는 걸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이 단어들이 아이들에겐 너무 추상적이므로 오히려 너무 자주 사용하지 말라고도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이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동수를 맞추려 애쓰는 이 시도들이 진짜 의미가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저 분류가 잘못됐는데 누구보다 그 분할선을 열심히 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쪽에서 한 번, 저쪽에서 한 번 그냥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하는 걸로 충분한걸까. 아닌가. 그것들을 성별과 연관시키지 않고 아이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해준다는 면에선 어쨌든 의미가 있는걸까. 정말 잘 모르겠다.

남자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란

어쩌면 나는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내게 바이블이 되어줄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작가가 딸을 가진 자신의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딸을 페미니스트로 키울 수 있는지 얘기하는 책이다. 그러다 보니 아들을 키우는 데 있어 구체적인 지침서로 삼기에는 애초에 적당치 않았다. '결혼을 업적처럼 얘기하지 말라’, '아이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정확히 할 수 있도록 하라’, '아이가 존경했으면 하는 자질을 가진 여자들에 둘러싸여 자라게 하라'는 조언은 딸아이에겐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남자아이에겐 별 다른 의미가 없는 말들이었다. (이미 한국 남자들은 결혼을 무덤이라 생각하고, 상대방의 기분이나 생각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너무 자신의 의사표현만해서 문제이며 여자들의 손을 빌려 자랐음에도 그 여자들을 모욕하고 있지 않던가.) 

성차별은 당연히 여성, 남성 양쪽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간주되어 사회경제적으로 배제 당할 때 남성은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음에도 오직 남성이라는 우월성을 담보로 채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나에게는 남자아이를 키웠거나 키우고 있는 페미니스트 엄마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 글은 엄마 본다. 7 엄마는 페미니스트 (하)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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