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본다 10. 양육가설

생각하다육아

엄마, 본다 10. 양육가설

Ah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내가 가이드가 맞긴 한 걸까

불과 몇 개월 전에 "육아서는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이라 잘 읽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새에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가 두 돌이 지난 후부터 꽤 긴 문장을 구사할 줄 알게 되면서 아이와 나의 관계가 급변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기분을 정확히 표현하는 아이를 대하는 일은 그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아이는 내 말을 완벽히 이해했고 거기에 적절한 대꾸를 했다. 무슨 말이냐면, 이제 아이는 내 말을 거의 듣지 않는다! 얼마나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냐면 잘 자다 말고는 “싫어! 싫어요!!!”라고 잠꼬대를 할 정도다.

오랜만에 아기 발달과 관련된 책들을 독파했고 25개월이 ‘떼쓰기’의 서막이라는, 그러므로 아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단계에 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가이드라인들을 참고해 아이에게 허용할 것과 금지할 것을 분류하고 각각을 어떤 사인으로 구분할 것인지를 정했다. 원래는 이 정도면 대략 정리가 되고 아이와의 의사소통도 원활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아이는 나의 분류와 사인들을 명확하게 거부했고 본인의 주장을 고수했다. 

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아이의 말이 (아이의 입장에선) 굉장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이가 그대로 따라오고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이 잘못된 건 순진했던 건 아닐까. 양육이라는 이 거대한 여정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정말로 깃발을 든 가이드가 맞는건지 의문이 들었다. 양육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부모는 아이의 인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의 <양육가설 : 부모가 자녀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탐구>는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책이었다. <양육가설>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실 부모는 아이의 인생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문장이 양육자에게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저자는 아예 “부모들에게 지워진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힐 정도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사실 내가 육아서를 기피해왔던 건 많은 책들이 지나칠 정도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였다. 양육이란 아이와 양육자의 상호작용임에도 오로지 양육방식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력만을 강조하는 듯 했다. 또, 개별 양육자와 아이의 특성, 사정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원리원칙만을 얘기하며 ‘하면 된다!’식의 논리를 개진한다는 인상도 컸다.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며 단호하되 감정이 섞이지 않은 훈육을 하고 언제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많은 양육서들이 양육자에게 권고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양육자로서 올바른 자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아이가 올바르게 자란다고 얘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후자까지 얘기한다. 그러다보니 양육자들은 끊임없이 ‘내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긴장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나 역시 부모의 전지전능함을 믿던 시기가 있었다. 주변을 보면 대체로 만 1세 부근을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그저 신화에 불과했음을 깨닫는 것 같고 나 역시도 그랬다. 아이의 삶에 부모가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는 시기가 분명 있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이후로 아이는 다양한 사람들과 사회를 접하게 되고 부모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걸 깨닫게 되면서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라면 내가 완벽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떨칠 수 있었다. 내가 정해둔 원칙을 벗어나는데 조금씩 관대해졌고 아이가 자라는만큼 ‘융통성’을 부려야 할 상황이 늘어나기도 했다. 아이는 이제 두 돌을 막 지났지만 커가는 아이를 보면서 ‘또래’와 ‘미디어’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면에서 나는 <양육가설>의 주장을 이미 꽤 수용하고 있는 양육자였던 셈이다.

환경까지 나의 몫인가

하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양육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고 봤다. 저자는 좋은 ‘또래집단’을 만날 확률을 높이기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얘기한다. 하지만 또래집단 이야말로 운과 우연의 영역 아닐까. 물론 저자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사실 최근의 양육 트렌드는 이미 아이에게 부모가 ‘얼마나 좋은 (집 밖에서의)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왜 부모들은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고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사립초등학교를 보내길 원하는걸까. 양질의 보육환경, 아카데믹한 분위기, 대입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조건들. 거기에 좋은 또래집단과 어울릴 수 있다는 기대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최근의 부모들은 ‘또래집단’을 비롯한 ‘환경’마저도 최선으로 제공하는 역할까지 추가로 떠안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이를 키울수록 느끼는 것은 양육자 개인의 한계다. 부모가 좌우할 수 있는 건 애초에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커가면서 점점 더 내 그늘을 벗어날 것이다. 내 성장과정을 돌이켜봐도 그렇다. 그 과정들을 떠올려보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디어나 기성문화에 만연한 악습과 차별을 철폐하는 데 힘을 보태는 일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지금,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적 특수성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또래문화’는 점점 더 성인들의 문화를 모방하고 답습하고 있고 사실상 기성세대와 아동,청소년세대가 누리는 문화가 애초에 엄격하게 구별되지도 않는다 .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내 아이를 내가 잘 키우려는 노력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까. 아이들의 또래집단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점점 더 확장되고 있고 미디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이를 완벽히 통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운에만 맡기고 있을 수도 없다.

사회의 과업

결국 양육이란 양육자 개인이나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과업’이라는 것을 모든 구성원들이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양육자분들에게는 ‘양육’이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길 제안드리고 싶다. 아이에게 내가 어떻게 했고 또 무엇을 해주지 못했다는 책임감에 짓눌리기 보다는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길을 큰 틀에서 고민했으면 좋겠다.

아이를 막 만났을 때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내가 여태껏 지켜온 가치관들, 기준들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곳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여태껏 전혀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미션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울 수록 내가 잘 살아가는 것과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결코 다른 일이 아님을 알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양육자로서 내가 바라는 사회를 만들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것이다. 여러분들에게도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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