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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1. 나는 전업주부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Ah

나는 전업주부다. 얼마 전 보험 가입을 위해 통화를 하던 중 설계사가 “전업주부시고요.”라고 얘기해줘서 새삼 깨달았다. 회사원에서 전업주부가 된 지는 이제 1년 반 정도 됐다. 퇴사를 한 후 나는 당분간 살림을 하며 앞으로의 삶을 도모하고자 했었다. 다시 일을 할지,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기 위해서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싶었다. 나는 ‘시한부’ 전업주부였고 그렇게 ‘집’은 나의 두번 째 직장이 되었다. 나는 나의 두 번째 직장을 매우 좋아했다. 나는 집을 좋아하는 사람, 말하자면 프로 집순이였다. 하루 종일 집에서 뒹굴대며 몇 시쯤 어느 방에 해가 가장 잘 드는지를 알아두고 느지막이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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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집에 없어요

김돌

한 때 주 90시간을 일한 적이 있었다. 간혹 새벽에 술 한 잔을 하고 퇴근하기도 했는데, 와이프가 기다려서 먼저 들어가겠다는 과장님에게 상무님은 "네가 이 직업을 선택한 이상 가족들은 희생하는 게 맞는 거야!" 라며 호통을 쳤다. 그렇게 일하다가 하루는 침대에 쓰러져 자면서 이대로 난 결혼도 할 수 없고 아기도 가질 수 없겠지 , 생각했다. 그 회사에 아기 엄마들은 극히 드물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아기 엄마들더러 다들 독하다고 했다. 그 드문 아기 엄마 중 한 분 밑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이사님은 회의실에서 아이와 통화를 하고 돌아오면서 "난 정말 나쁜 엄마야" 라고 한숨을 쉬었고 나는 아니라고, 나는 밤 10시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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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3. 지옥의 수유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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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라고들 했었다. 나는 완벽한 천국을 맞이하고자 휴가지 호텔을 찾는 심정으로 지역 산후조리원들을 폭풍검색했다. 푹신한 침구와 맛있는 식단으로 유명한 곳을 예약했고 남편과 나는 임신 기간 동안 ‘밥이 그렇게 맛있대’, ‘우리 셜록 몰아보자!’같은 얘길 하며 낄낄대곤 했다. 정바당을 낳고 2박 3일을 보낸 산부인과에서 퇴원하던 날, 우리는 몹시 들떠 있었다. 조리원에 도착해 입소 서류를 쓰는 동안 한 대학병원의 간호사 출신이라던 원장이 처음 건넨 말은 “병원에 있는 동안 수유했죠? 가슴 좀 볼까요?”였다. 나는 브래지어를 내렸다. 원래의 나라면 조금 생각해보는 척 하고 싫다고 했을테지만 이미 산부인과에서 다른 산모들과 둘러앉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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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12. '여아선호'라는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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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바당이 남자아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엄습했던 막막함과 두려움에 대해서는 이미 2화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 싶다. 배 속 아이가 아들이라는 걸 알렸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반응들도 한 몫 했다. 대부분 짧은 탄식이거나 위로였다. 어떡하냐고, 힘내라고, 괜찮다고,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면 이백점짜리라고. 그런 말들이 나를 더 막막하고 자신없게 만들었다.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도 비슷한 에피소드들이 추가됐다.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가서, 병원에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서, 수리센터에 핸드폰을 고치러 가서 아이 얘길 하다보면 대부분 개월 수와 함께 성별을 제일 먼저 물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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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7. 동화책도, 동요도, 나도 다 빻았다

Ah

연재 초반에 정바당을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키워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그 일이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느냐면… 총체적 난국 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미소지니’의 영향력은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도 건재했다. 동화책을 읽다 착잡해졌다 처음 불편함을 느낀 건 동화책이었다. 정바당에게 태담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 전까지는 동화를 그저 ‘아이들이 읽는 책’이라고 여겼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어른이 된 내가 읽기에도 좋은 책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사노 요코의 <백만 번 태어난 고양이>는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 어린이도서관에서 처음 읽던 날은 초등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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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2. 내 아들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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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20주, 어느 덧 임신 기간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몸은 가벼운 와중에 태동이 느껴져 아기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게 드디어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의 성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6주 정기검진 때, 담당 의사는 이 쯤부터 성별 판별은 가능하지만 정확도가 조금 떨어진다고 했었다. 그래도 한번 보자던 선생님과 나의 의기투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바당은 잔뜩 웅크린채로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그 날이 온 것이다. 이번주에 보는 정밀초음파는 일반 초음파에 비해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했다. 심장이나 폐와 같은 장기들이 정상적으로 형성되고 있는지 체크하고 손가락, 발가락,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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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10. 노키즈존을 찬성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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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바당은 제주 출신이다. 그러니까, 정바당은 내가 병가 끝에 결국 퇴사를 하고 앞으로의 삶을 도모해보리라 굳은 결심을 하며 단기이주를 떠났던 제주도에서 생긴 아이다. ‘바당’은 제주말로 ‘바다’라는 뜻이다. 남편과 나는 그 시절에 매일매일 바다를 봤다. 기분 내키는대로 아무 바다나 가서 피크닉 매트를 펼치고 그 위에 누워 뒹굴거리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셀카와 바다와 구름사진을 이백장씩 찍었다. 그 좋은 시절을 알아차린 정바당이 늘 기특했다. 덕분에 제주는 더욱 각별해졌고 정바당과의 첫 여행지도 당연히 제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나는 일찌감치 에버노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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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개념맘과 맘충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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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시절 얘기를 좀 해보자면, 나는 개념녀였다. 언젠가 타임라인을 휩쓸었던 그 해시태그처럼 꼭 그랬다. 게다가 나는 대부분의 그룹에서 명예남성이라는 작위를 받는 쪽이었다.내 머리가 숏컷이고,, 담배를 피우고, 힐보다는 운동화와 로퍼를 즐겨 신고, 결혼 전에 꼭 취업을 하고 싶어했고, 소위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리본이나 레이스같은 장식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함께 딸려오는 ‘외모와는 다르게 털털하다’, ‘## 출신 같지 않다.’ 같은 평판이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여성스럽다’는 수식어는 거추장스럽고 어떤 상황에서든 나에게 도움이 되는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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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9. 나도 내가 이런 엄마가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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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된다는 걸, 아니,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어떤 엄마가 될 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었다. 아이를 세심하게 관찰해 아이의 기질과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는 양육자가 되고 싶었다.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되 아이가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존중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자신있었다. 나는 내가 아주 현명하고 우아한 엄마가 될 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아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돌발 상황에도 허둥대지 않고 침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나와 아이의 투샷은 매우 평화로웠다. 만삭의 배로 동네 도서관에 산책을 다니던 시절, 산책로에서 마주친 엄마가 대여섯살 정도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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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4. 예쁜 건 예쁜 거고 힘든 건 힘든거다

Ah

정바당을 낳은 후론 어쩐지 모든 대화가 결국 비슷하게 흘러간다. 내가 정바당이 너무 예쁘다고 하면 “그래도 힘들지?”가 돌아오고 정말 힘들다는 얘길 하면 “그래도 예쁘지?”가 돌아오는 식이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정바당은 예쁘다. 육아는 힘들다. 사람들은 종종 이 두 가지 문장이 어떤 상관관계에 있다고 믿는 것 같은데, 아니다.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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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마치며 - '다시' 페미니스트

Ah

이 연재를 시작하고 열 다섯개의 글을 쓸 때마다 매 번 떠올렸던 일이 있다. 아이를 낳기 전의 일.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실 수 없나요?” 친구와 나는 둘다 이직 제의를 받은 상태였고 우리는 조용한 곳에서 진지한 얘기를 나누길 원했다. 일부러 프랜차이즈가 아닌 차분한 분위기의 동네 카페를 찾았다. 삼십분 정도 있었을까. 우리는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제 두 살 정도 됐을 법한 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아이는 계속 돌고래 소리를 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맘대로 되질 않아 짜증을 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엄마와 친구들이 달래면 그게 또 재밌는지 까르르 웃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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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페미니스트의 육아 일기: 8. 좋은 아빠 그냥 엄마

Ah

정바당 인생 9개월 차, 우리도 드디어 하드보일드한 문센(문화센터)의 세계에 입성했다. 보통 이 맘 때쯤 시작하는 아이들이 많다고들 했다. 아기가 안정적으로 앉아서 놀고 호기심이 많아지는 시기. 그렇다는 건 주양육자가 하루종일 아이를 밀착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이니까 아이에게도 양육자에게도 시간을 보내는 새로운 방법들이 필요해지는 때다. 정바당의 도전이기도 했지만 이 시기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이, 사실은 나의 도전이었다. 아이와 둘이 처음하는 모든 것이 그랬듯 이번에도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했다. 아이가 입고갈 옷을 꺼내두고 가방에 모자, 기저귀, 가제수건, 간식, 물, 제일 좋아하는 동요 장난감, 지갑 등을 챙겨두었다. 언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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