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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9일 <Pinch Clip>: 천천히 조금씩 고통스럽게 나아간다

입을 열었다

신입생이었던 시절, 동아리 남자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행사장에서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는데, 사진사가 치마 속이 보이는 포즈만 집요하게 요구했다.
같은 작품을 파던 사람과 오프라인으로 교류하러 갔다가 강간 당했다.
'로리취향'을  근거로미성년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성적으로 착취하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알렸다.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에 수많은 생존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겪었던 폭력의 증언 앞에 수많은 이들이 연대와 지지, 응원을 보냈다. 묻힐 뻔한 성폭력, 성추행, 강간 및 2차 가해의 기억들이 공론화되고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면서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생존자들의 용기로부터 출발했다.

이제서야, 겨우

이제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적 폭력과 착취가 ‘오타쿠’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지는 동인계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인해 그 문화 속 깊은 곳에 깔려 있는 여성혐오가 드러났음을 인정하고 더욱 주목해야 한다. 비교적 폐쇄적이고 좁은 집단 안에서 오랫동안 개인의 기억으로만 꼭꼭 감추어져 왔던 피해 사실들이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탓하는 목소리보다, 그들에게 ‘주작’이나 ‘검증’을 해보라고 요구하는 목소리보다도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가 더욱 큰 지금은 이전보다 조금은 진보했을까. 그렇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진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소라넷 사태 등을 겪으며 한국 여성들은 고통스러운 진실 앞에 마주했었다. 여성이란 게 살해당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 여성이기에 자신의 신체가 아무렇게나 성적으로 소비되고 확산되는 것을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을 마주하고 나서야 논의는 꽃피었고 조금씩이나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공론화된 가해 사건들의 향방은 매우 중요하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합당한 도의적·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최소한의 정의일 뿐이다. 사건을 기억하고, 이에 대해 꾸준히 논의하며 목소리를 내어 또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 앞에서 입을 연 목소리들에 대한 진정한 지지이자 연대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승리 혹은 패배하지 않는다

한편, 이 더딘 진보에조차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적 퇴화를 거듭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해시태그로 촉발된 사건의 공론화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읽히는 듯 하다. 소위 ‘트위터 페미니스트’라 일컬어지는 이가 ‘몰락’하고 ‘패배’하는 과정을 즐기며/소비하며 그들은 당당히 선언했다. ‘페미니즘의 패배다.’

그 인지의 미개함에 대한 조소를 감출 수 없다. 페미니즘은 단 몇 사람에게 의지하여 움직이는 팬덤이 아니다. 승패를 따지는 게임도 아니다. 페미니즘은 2016년의 한국 여성이 택한 생존 전략이자, 목소리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승리하지도, 패배하지도 않는다. 천천히, 조금씩, 하지만 고통스럽게 나아갈 뿐이다. 

2016.10.19 13:09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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