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이끈 여성들: 배후는 없다, 서로가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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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을 이끈 여성들: 배후는 없다, 서로가 용기다

신한슬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서프러제트 운동을 이끈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다. 집단으로서 한국 여성들은 한 해 내내 정치‧사회적 담론의 주요 생산자였다. 2016년, 세상을 이끌어가는 여성들의 힘이 드러났던 주요 장면들을 짚어본다. 2017년을 마주하며,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문장을 조금 바꿔보았다. 

“여자들은 이길 때까지 싸울 것이다.”

3월, 필리버스터와 여성들

2월23일부터 3월2일까지, 9일에 걸쳐 192시간 동안 테러방지법 의사진행 방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진행됐다. 세계 최장기록을 세운 필리버스터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은 3월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192시간의 민주주의는 말과 기록으로 남았다.

선거 때만 말이 많은 줄 알았던 국회의원들의 연설을 이토록 귀 기울여 들은 적은 없었다. 192시간 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강연, 증언, 설득, 논쟁,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특히 여성 의원들이 빛났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그렇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야당 의원 38명 중 17명이 여성이다. 더불어민주당 은수미, 유승희, 최민희, 김현, 배재정, 전순옥, 추미애, 진선미, 박혜자, 서영교, 이언주, 임수경, 박영선 의원, 국민의당 권은희 의원, 정의당 김제남, 심상정 의원, 무소속 전정희 의원이다. 19대 국회의원 전체 중 여성은 15.7%지만 필리버스터 참여 전체 의원 중 여성은 44%로 절반에 가깝다.

진선미 의원은 “국가의 의심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입니다”라고 말했다.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말의 힘을 보여줬다. 은수미 의원은 고문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10시간 18분 동안 발언 투혼을 이어갔다. 전순옥 의원은 고 전태일 열사의 동생으로서 직접 겪었던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의 감시와 사찰을 증언했다.

여성 시민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192시간 동안 필리버스터 내용을 중계했던 한 언론사 페이스북 계정은 후에 분석해보니 해당 기간 동안에만 유독 1~20대 여성 구독자가 많았다. 실시간으로 SNS를 통해 필리버스터를 지켜본 사람 중 젊은 여성의 비율이 상당했으리라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필리버스터의 기억을 적극적으로 간직한 사람들도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국회 필리버스터 속기록 전문을 엮은 책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역사, 인권 자유>(이김출판사) 판매량 4000부 중 2800부를 맡은 알라딘 집계 결과, 구매자의 78.8%는 여성이었다. 연령별로는 20대 여성(37.5%)이 가장 많이 구매했고, 다음은 30대 여성(30.9%)이었다. 여성들은 2016년을 여는 역사적인 ‘말의 혁명’을 이끌었고, 지켜봤고, 기억한다.

5월, 강남역 살인사건과 #살아남았다

5월17일 0시33분, 33세 남성 김모씨가 22세 여성을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살해했다. 김씨는 그 화장실에 숨어 있었던 34분 동안 들어온 남성 6명을 그냥 보냈다. 그는 여성을 기다렸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여자들 때문에 힘들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무시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김씨가 여성에게 구체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례는 없다고 밝혔다.

여성들은 이 사건의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에너지로 전환시켰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사건 다음날인 5월18일 아침부터 추모의 메시지를 담은 포스트잇이 붙었다. 포스트잇이 빼곡하게 들어찬 강남역 10번 출구는 장례식장처럼 숙연했다. 국화와 촛불도 등장했다. 누가 가져온 것인지 펜과 포스트잇이 바닥나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느끼는 두려움과 성차별, 성폭력을 털어놓는 거리 필리버스터도 열렸다. SNS에는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내용의 해시태그가 폭발적으로 퍼졌다.

여성들은 조직자가 없는 거대한 공동체였다. 모두가 생각했다. “너는 나다.” 늦은 밤에 길을 걸으며, 공중화장실이나 탈의실을 이용하며, 음식을 배달시키며, 술을 마시고 귀가하며 여성은 생존의 공포를 느낀다. 남성은 그런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를 ‘과잉 반응’으로 몰아가고, 개인의 범죄를 일반화한다며 성차별을 외면하려는 사람들과 싸워야 했다. 여성혐오자들은 모욕과 협박으로 여성들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여성혐오자와 언쟁을 하는 여성들의 사진이나 비디오가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에 퍼지면서 사이버 모욕 피해를 입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이러한 피해자들을 모아 공동 법적 대응을 도모할 정도였다.

여성들은 보복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방식은 다양했다. 한국여성의전화나 한국여성민우회와 같은 시민단체를 후원하기도 하고, 직접 ‘강남역 10번 출구’ ‘페미당당’ 같은 단체를 만들기도 했다. 2016년 올해의 책으로 수많은 언론이 꼽은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의 저자 이민경 작가가 집필을 결심한 것도 강남역 살인사건이 계기였다. 출판계는 페미니즘 책의 강세가 일 년 내내 이어졌다. 스스로의 생존과 존엄함을 위해, 여성들은 지금도 끈질기게 싸우고 있다.

8월, 이화여대 86일간의 투쟁과 승리

교육부 사업을 따기 위한 학과통폐합이나 단과대 신설을 추진하는 사립대학은 제법 많았다. 지원금을 미끼로 ‘취업 되는 학과’의 정원을 늘리고 나머지를 축소하라는 정부의 적극적 압박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의 ‘평생교육 단과대학 미래라이프대학 사업’도 이런 맥락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화여대 학생들은 전무후무한 학내 투쟁 방식을 보여줬다. ‘극단적인’ 민주주의다.

학교 측은 처음부터 세게 나왔다. 무려 국가 폭력을 동원했다. 7월30일 오전 11시15분, 무장 경찰 1600여명이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건물을 둘러쌌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기 전, 이화여대 학생들은 다 같이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만 눈앞에 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그날부터 86일 동안 학생들은 본관 점거 농성을 이어갔다. 중심은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이화이언’과 본관 내 난상토론에서 이루어지는 외부인에게는 철저하게 배타적이고 내부인에게는 완전하게 개방적인 소통이었다. 본관에 들어가려면 학생증으로 이화인이라는 것을 인증해야 했다. 대신 이화인끼리는 학번도 나이도 묻지 않는 ‘벗’이었다. 시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운동권’이나 정치적 맥락은 배제됐다. 대신 무명의 동문들이 자발적인 봉사와 기부금으로 호응해 효과적으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했다. 언론에 노출되는 메시지는 전체 토론을 거치기 전까지는 ‘노 코멘트’였다. 개별적인 목소리는 자제시켰다. 익명화된 개인들이 모여 통일된 목소리를 추구했다.

이런 독특한 시위 방식은 늘 여성혐오에 시달려야 했던 이화여대 학생들이 극단적으로 ‘공동 행동, 공동 책임’을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개인일 때 그들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집단적 정체성(이대생)을 빌미로 공격당했다. 그러나 함께일 때 그들은 두렵지 않았다. 공동의 이슈에 여럿이서 머리를 맞대고 토론과 투표를 통해 최선의 결과를 추구했다. 그들은 교과서 같은 민주주의자들이었다.

9월12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교육부 등 주무부처와 국회 상임위원회에 학교 관련 의혹을 감사해달라는 민원 1939건을 제기했다. 2주 뒤인 9월27일, <한겨레>가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 특혜 의혹을 보도했다. 의혹이 구체화되면서 정치적 부담이 겹친 최경희 전 총장은 결국 10월19일 사퇴했다. 언니들의 끈질긴 투쟁이 나라를 구했다.

10월, #00_내_성폭력,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10월 중순, 트위터에서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로 시작된 #00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문화계, 미술계, 운동권, 문단, 교회, 가족, 영화계로 퍼졌다. 남성이 존재하는 일상의 모든 분야에 끔찍한 성폭력이 존재한다고, 피해자들은 직접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증언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증언을 보고 다른 사람이 또 용기를 냈다. 한 번 시작된 폭로는 걷잡을 수 없었다. ‘내가 예민한 걸지도 몰라’ ‘얘기하면 나만 손해일 거야’라는 두려움으로 피해자들의 가슴 속에만 꾹 담겨있던 성폭력 사회의 민낯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왔다. 트위터의 140자 제한에 다 담을 수 없어, 에버노트에 적거나 메모장에 적어서 캡처한 증언에는 빠짐없이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는 특히 파장이 컸다. 박범신 소설가를 비롯해 박진성, 이준규, 배용제, 백상웅, 김요일 시인 등의 실명이 언급됐다. 이들 중 일부는 의혹을 시인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피해자는 시인 지망생, 문창과 학생, 출판사 편집인, 신인 작가 등으로 ‘을’의 입장이었다. 성폭력을 당했을 당시 미성년자였던 피해자도 있었다. ‘예술가의 자유로움’을 빙자해 성적으로 접근하거나 희롱하고, 데이트 폭력을 저지르고, 이를 자기 작품에 사용하기까지 했다. 출판사들은 해당 작가나 시인의 책을 출고 정지했다. 문학과지성사가 주최한 문학 강좌는 성폭력 발생 장소로 알려져 폐쇄됐다.

여성들의 연대는 폭로에서 멈추지 않았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위해 움직였다. 문학계 성폭력, 위계폭력에 반대하는 작가모임 ‘페미라이터’가 만들어졌다. “나는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약서에 서명 671개를 받았다. 한국작가회의는 성폭력징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영화계에서는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가 결성됐다. 영화 <걷기왕> 남순아 작가는 촬영 전 모든 스태프를 상대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됐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은 영화계 성폭력 방관을 사과하며 조합 내에 특별기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이 정말로 ‘무서워서 말도 못하는’ 세상이 될 때까지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되고 지지대가 되어 줄 것이다.

11월, 소수자혐오 없는 촛불집회를 요구하다

남성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그 남성의 잘못이다. 그러나 여성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여성 전체의 잘못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각이 여성혐오를 정당화해준다고 착각하는 여성혐오자들이 너무 많다.

그 중에는 선출직을 맡은 사람들도 있다.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지원 의원은 11월9일 KBS라디오 공감토론에 출연해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대단히 미안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말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참 자랑이다. 대한민국 첫 번째 남성 대통령이 선거 조작으로 하야했을 때나 세 번째 대통령이 측근에게 총격당했을 때는 앞으로 200년 내로 남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왜 안했는지 모르겠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촛불시위에서 최순실씨를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라고 말했다. 최씨가 문화계, 체육계, 의료계, 기업계에 전횡을 휘둘렀다는 의혹이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세상에 왜 그가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만약 그의 전남편인 정윤회씨(‘직책’을 맡은 적이 있는 ‘남성’)가 그런 전횡을 저질렀다면 문제가 안 되는가? 남자였으면 하지 않았을 모욕을 하는 것이 성차별이 아니면 무엇인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여성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가수 DJ DOC는 <수취인불명>이라는 신곡을 11월26일 촛불집회 무대에서 부르려고 했으나, 주최 측은 여성혐오적 가사에 대한 지적을 수용해 출연을 취소했다(그러나 DJ DOC는 이후 12월10일 본 무대가 아닌 서울광장 무대에서 해당 노래를 불렀다). “잘가요 미스 박 세뇨리땅 역대급 삥땅 멘붕 쎄뇨리땅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 빵빵”이라는 가사다. DJ DOC는 ‘미스 박’의 의도는 ‘미스테이크(mistake) 박’의 준말이라고 말했다. 어떤 언어권에서 그런 줄임말을 사용하는지 모르지만 의도는 그랬다고 한다. 그래도 이런 변명은 ‘미스 박’이 성차별적 표현이라는 건 그나마 인정하는 셈이다. 미스 박이나 미스터 박이나 뭐가 다르냐고 우기는 사람들도 많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고 엄정한 수사를 원하는 것과 그가 미혼이고 여성이라는 점을 공격하는 것은 아무 관련이 없다. 정의를 원한다면서 저열한 혐오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여성들은 경고를 줬다. 광장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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