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보도하는 원칙을 버린 어떤 비극 앞에서

생각하다저널리즘

죽음을 보도하는 원칙을 버린 어떤 비극 앞에서

이그리트

그룹 샤이니의 김종현씨가 강남의 오피스텔에서 중태에 빠진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긴급하게 이송되었지만 끝내 숨을 거두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 타임 보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팀을 다룬 드라마 <뉴스룸> 중에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미국의 한 하원 의원이 연설 도중 총격을 맞고 쓰러졌다는 겁니다. 프로듀서들은 소식의 출처를 확인합니다. 첫 번째 취재원이 사망을 말합니다. 경쟁 언론사들이 속보를 줄줄이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취재원이 사망을 말합니다. 기다리던 다른 언론사들마저 의원의 사망을 속보로 내보냅니다. 하지만 <뉴스룸>의 팀은 속보를 내보내지 않습니다. 세 번째 취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두 취재원 중 누구도 의원이 실려간 병원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팀은 기다립니다. 사장이 제작실에 내려와 다그칩니다. 당장 이 소식을 다루지 못해요? 프로듀서는 대꾸합니다. 사망 선고는 의사가 내리는 거지, 우리가 내리는 게 아닙니다. 

의원은 결국 죽지 않았습니다. 의사의 발언을 확인하고 나서야 팀은 속보를 내보냅니다. 총격 사건이 있었지만 의원은 죽지 않았습니다.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원래 엄정하고 복잡합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뉴스 생산 과정의 수많은 안전핀들은 속보 경쟁과 이를 기반으로 한 트래픽이 언론사를 먹여살릴 유일한 방법처럼 강조되는 시대에 손쉽게 뽑히곤 합니다. 취재 원칙 중에는 흔히 '삼각확인' 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의 팩트를 보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명의 취재원의 이야기가 일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언론사의 기자들이 하나의 기사를 내보낼 때 몇 명의 취재원을 만나는지 <언론비평>이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10년이 조금 더 된 이야깁니다. 미국의 기자들은 한 기사에 평균 열 명의 취재원을 만납니다. 한국의 기자들은 한 기사에 평균 2.16명의 취재원을 만납니다. 이렇게, '모름지기 뉴스를 만든다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수많은 실수와 오보, 후회, 사죄를 거쳐 다져진 원칙들은 쉽게도 사라집니다. 무시하는 건 쉽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은 티조차 나지 않습니다. 다른 기자가 보도하면 그 기자가 사실을 확인했겠거니, 하고 베끼면 (흔히 '우라까이'라고 합니다) 그만입니다.

그렇게 대충대충 만들어진 뉴스는 사람들의 주목도가 높은 이슈인 경우, 새로운 제목을 1분에 서너 개씩 달고 주요 포털에 다른 기사인 것처럼 여러 번 송고됩니다.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뉴스의 껍데기들이 그대로 검색창에 나열됩니다. 기사의 크레딧에는 기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고 '온라인 뉴스팀' 등으로 명기되어 있는 경우가 태반, 내용 한 글자 바뀐 것 없이 통신사가 보낸 뉴스를 그대로 복사해 올리는 경우가 태반, 심지어는 '1등'을 차지하기 위해 내용도 없이 일단 제목부터 기사를 보내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잊은 것은 없나요?

누군가가 물어볼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 동참하는 뉴스 생산자 중 한 명 이라도. 오보의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은 채 일단 기사부터 보내 '낙종'한 기자, 보도준칙을 어겨가며 사건의 디테일을 과다하게 집어 넣은 기자, 그 기사를 복사-붙여넣기 해 끄트머리에 통신사의 크레딧만 넣은 채 자신의 이름을 크레딧에 함께 올린 다른 기자, 그 기사를 받아 포털에 보내는 편집자, 이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데스크 중 한 명이 말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게 사실인지 확인하는 걸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마 모두가 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면서. 일단 속보는 치고 봐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자극받는 내용은 다 넣어야 한다면서, 일단 트래픽이 몰리는 기사는 자체 홈에 얼른 올려야 한다면서, 그리고는 포털에 빨리빨리 보내 클릭수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다른 곳보다 뒤쳐지면 안 된다면서.

아이히만을 본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습니다. 거대한 악 안의 개인은 판단력이 마비된 채 체제를 움직이는 충직한 관료라는 겁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이히만은 단순히 관료주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충분히 능동적으로 사고했으며 다양한 동기에 의해 자율적으로 움직여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모두의 동기와 이유가 충분한 한국의 뉴스생산자들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다루는 기사에서 존엄도, 품위도 팽개친 폭력을 낳은 건 그 아이히만들입니다. 그 능동적인 아이히만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곤란한 상황을 눈 감고 움직여 가해를 실천하는 사람들.

수없이 쏟아지는 노골적이며 무의미한 그의 사망에 관한 기사를 보며 드라마 <뉴스룸>과 아이히만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와 실망을 보고 그들이 부끄러워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예상컨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초단위로 경쟁하는 속보 위주의 뉴스 생산 체계에서 생산자 그 어느 누구도 '반성'할 시간은 없습니다. 대신 값을 치르는 것은 언론의 가해에 피해를 입은 사회의 구성원이 됩니다. 그래서 아프고 슬픕니다. 미디어가 갖추어야 할 것을 더 이상 내팽개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죽음이 가졌어야 할 최소한의 존엄이 훼손당한 것에 애도를 표합니다.

덧붙임: 어떻게 다뤘더라면 좋았을까?

1. 린킨파크의 체스터 배닝턴의 사망을 다룬 ABC의 기사. 

2. 가수 크리스 코넬의 사망을 다룬 BBC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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