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17: 대만 현대사의 주역,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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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북클럽 & 살롱 17: 대만 현대사의 주역, 페미니즘

주연

이번 시간엔 한국이 아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페미니즘 운동을 공부한다. 대만,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를 중심으로 발제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해 힐러리의 선거 승복 연설은 멋졌다. 하지만 서구 여성 페미니스트를 볼 때의 동경은 곧 ‘저 사람의 맥락이 나의 것과 같을까’라는 의문과 연결된다. 대만의 여성주의 운동을 다루자고 제안한 참여자의 동기는 거기에 있었다.

“내 페미니즘은 어디쯤 있을지 궁금하고, 한국이 아닌 아시아 국가에서 성공한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만나보고 싶다.” 

대만 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는 페미니즘 운동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20세기 대만역사'를 개괄했다. 대만의 근대화/민주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대만의 근/현대사와 페미니즘 운동사는 긴밀하게 엮여있다.

중화민국 건국(1911) 후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타이완 의회 설립운동 등 민주화 운동이 전면적으로 일어났고, 당시 타이완 여성주의 담론과 근대역사 최초 자주적인 여성운동 또한 함께 시작됐다.

특히 1920년대는 타이완이 일제에 할양된 뒤 일제에 기여한다는 전제 하에 정치,문화적인 자유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던 시기였다. 또 중국 본섬이나 일본으로 고등교육을 받으러 떠난 여성 유학생들이 서구 페미니즘을 들여오면서 대만 본토의 페미니즘이 최초로 유입된 시기이기도 하다. 1920년대부터 대만에서 자주적인 여성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던 이유다. 관료적인 단위에서도, 개인적이고 자주적인 단위에서 진행된 여성운동도 있었는데 전자는 일제에 기여할 여성을 길러내기 위해 정책 수행인으로서 여성을 바라보았고 후자는 수입해온 서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권 신장과 여성 지위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며 당연히 후자의 운동이 대만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다.

1931년 일제 패망 직전 대만에 대한 단속과 검열이 강화되면서 활발했던 자주적 여성운동은 잠시 사그러들기도 했다. 일본의 패전 후에도 한국과 비슷하게 식민 지배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국가의 통제가 강력해지며 여성운동도 잠시 경직되었지만, 계엄령이 해제된 87년 이후 언론과 출판계가 출판의 자유를 가지며 다시 대만 페미니즘의 부흥기가 온다.

대만의 여성 운동가 1:
대만 여성주의의 대모 뤼슈렌

이 시기에 활약했던 대만 여성주의의 핵심 인물로 ‘뤼슈롄(Hsiu-lien Annette Lu)’이 있다. 그는 소위 대만의 페미니스트 대모로 후에 대만의 부총통으로 당선되어 재임까지 했던 인물이다.

뤼수롄의 자서잔.
“나에게 있어서 페미니즘은 타인과 경쟁하거나 누군가를 물리치는 개념이 아니다.”
“대만은 수십년간 지속돼온 중국과의 긴장을 완화시킬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 경쟁보다는 존경, 갈등보다는 협력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외교정책’이 적절하다.”

87년 이후의 대만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끈 뤼슈렌은 1944년에 태어나 일리노이대, 하버드 법대를 거쳤고 석사논문으로 낙태 합법화를 다뤘다. 유학 후 다시 대만으로 돌아온 그는 2000년 여성 최초로 대만 부총통에 당선된다. 당선 직후 “나는 꽃병처럼 구석에만 조용히 서있는 정치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다. ‘활동적인 부총통’이 될 것이다”라고 밝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초반 대만엔 중요한 사건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1971년도에 남성에 대한 수능 가산점 처리로 국가에서 남성이 여성과 경쟁하는 일을 피하도록 도운 사건, 이어 1972년 아내의 바람을 의심하고 살해한 남성에 대한 재판이다. 두 사건 모두 남성에 온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럴 수 있지’라며 쉽게 넘어가는 듯 했다. 국가의 성차별과 미온적 재판 결과에 페미니스트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뤼슈롄은 ‘편견 없는 재판이 필요하며 남성에게 가중처벌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칼럼을 쓰며 성차별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곧 언론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는데, 뤼슈롄은 당시 공격한 사람들과 글 내용을 모두 꼼꼼히 기록해두었다가 훗날 차별적인 문화의 증거로 자서전에서 공개했다. 이후에도 그는 여성 페미니스트의 활동과 정보를 아카이빙하는 <시대 여성협회>를 발족시키는 등 페미니스트로써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만의 페미니즘 운동이 현대사, 민주화 운동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주역이기 때문이다. 뤼슈렌은 한국의 5.18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메이 리 다오 사건’으로 투옥된 8인 중 한 명이다. 메이 리 다오 사건의 8인은 타이완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들로, 당시 투옥된 이들 중 두 명이 여성이었는데 한 사람이 뤼슈렌이고 또 다른 여성은 현재 가오슝시의 시장을 역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 과정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기록을 접하기 힘든 만큼, 두 명의 여성이 당당히 새로운 역사를 견인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한국과 비교해 새로운 지점이다.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여성 민중’이 아니라 실제 당당한 영웅,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화 운동에서 여성이 주역으로 등장했던 모습을 본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보면서 한국 현대사와는 비슷한 듯 정말 다른 경험이겠구나 생각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나오는 이미지에 대해 분석한 논문을 읽어본 적이 있다. 남성의 자리는 열사, 전사 등 운동하고 움직이는 주체들이다. 여성의 자리는 오로지 어머니, 딸, 누이, 운동의 조력자로만 그려진다.”

대만의 여성 운동가 2:
낙태법을 막은 위안 첸 리

이어 대만의 여성주의 잡지 ‘어웨이크닝Awakening’ 창간 멤버인 위안 첸 리Yuan-chen Li를 꼽을 수 있다.

위안은 ‘아이도 낳았으니 시댁으로 들어가자’는 남편의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혼하며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페미니스트 운동가가 되기 전부터 이미 교수이자 활동가로서 10대 성매매 여성 재교육과 재사회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성구매자 처벌수위가 미약하다는 데에 주목해 관련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후 “여자가 자기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삶이 많이 달라진다는 걸 느꼈다”며 주변 사람들을 모아 잡지이자 여성운동 재단인 어웨이크닝을 만들게 된다. 어웨이크닝은 여성의 자기인식과 다양한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잡지로,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속 뿌리 깊은 유교문화와 여성혐오 대신 자주적인 여성들의 운동을 시작한 뤼슈렌에 이어 80년대의 여성 운동을 이끄는 데 기여한다. 위안은 이 잡지와 함께 레인보우 프로젝트Rainbow Project라는 미성년자 성매매업 종사자 케어센터도 설립하며 어웨이크닝과 함께 여성운동을 이끄는 주역이 됐다.

80년대 대만정부는 임산부의 건강상 문제, 강간에 의한 임신, 태아가 많이 아플 때만 낙태할 수 있게 낙태권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낙태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한다. 당시 아직 계엄령이 풀리지 않았던 때였기에 국민당 정부에 끌려갈 수도 있었지만 위협을 무릅쓰고 어웨이크닝 창간 멤버들은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합해 반대 청원을 내는 등 이 개정안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덕분에 낙태 개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이처럼 식민 지배를 경험하고, 민주화가 완전히 되지 못한 상황에서도 대만의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은 우선순위 논쟁에 사로잡히기보다 조개를 줍는 운동을 맹렬히 해 왔다. 

대담: 앞서가는 대만의 페미니즘

대만의 사례는 여성주의 운동의 역사가 이미 1930년대 부터 꽃피기 되었다는 것부터 시작해, 국가/정부와 상관 없이 시민 영역에서 일어난 자주적인 운동으로 명명된다는 점, 또 현대사의 주인공으로서의 페미니스트들을 보는 것 등 많은 부문에서 강력했고 참여자들에게도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대만과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가지며, 유교문화권에 있는 한국은 왜 현재 대만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조선에도 분명 페미니스트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민족주의자들이 딱지를 붙이기 쉬워 활발히 활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활란 같은 경우 친일을 했던 배경이 유일한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를 지키기 위해서 였는데, 민족주의자들에게 너무 후려치기 당했다. 늘 한국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를 '제국에 협력하고, 부르주아고, 엘리트고, 서구 사대주의고, 보통 여성과는 다르다'라며 끊임없이 분리해왔다."
"한국 전쟁 이후의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신여성'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정치에서 걸출한 인물도 거의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더더욱 뤼슈롄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민족주의가 너무 강해 여성 인물들이 살아남을 토양 자체가 척박했다는 의견이었다. 이어 발제자가 준비하며 느꼈던 점을 공유해주었다.

"대만의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가장 좋았던 점은 시민운동의 역사에 페미니즘 운동 역사가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 왜 이렇게 페미니즘만 따로 떼어 이야기하나 싶었는데, 그런 점이 대만에는 유독 적더라. 대만의 페미니스트들은 대만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다. 이 자체가 주는 힘이 있다."
"영화 <위로공단>을 보면, 여공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운동했고 차별받았고 삭제되었는지가 나온다. 여성들의 운동은 그냥 삭제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이화여대의 이야기는 계속 삭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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