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게임: 내 삶의 질을 높여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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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게임: 내 삶의 질을 높여준 책

진영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제목은 트위터 해시태그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소중하고 ‘나쁜’ 책들과, 최근 도움받은 책들 중 네 권을 추렸다.

<홍당무>, 쥘 르나르

한 소년이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신체적・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하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이를 방관하는 식으로 동조하며, 형과 누나 역시 적극성의 정도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릴 때 <홍당무>를 읽으면서 서럽게 많이 울었다. 주인공 ‘홍당무’가 다소 과하다 싶을 만큼의 천덕꾸러기 못난이로 묘사되어 있어서 ‘이 따위로 못났으니 구박을 당해도 싸다는 의미인가?’ 하는 반감이 들 수 있는데, 쥘 르나르가 이 책을 얼마간 자전적인 태도로 썼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건 그냥 자학 개그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만하다. 홍당무가 아버지와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들어있는 마지막 장이 독자들에게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걸로 유명한데, 이 장면에서 아버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홍당무에게 “나라고 너희 어머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라고 말한다. 여러 모로 유약하고 한심한 인간이다. 아니, 이게 미성년의 아들에게 할 소리인가? 엉망 진창이군! 제대로 된 가정이라곤 없어! 하면서 눈물을 닦고 신나게 책장을 덮을 수 있다. 이 책을 정말이지 닳도록 읽었다. 나에게는 성경 같은 책이다. 독립하면서 이걸 집에 두고 온 것을 알고 새로 한 권 샀다. 어머니는 아직도 이 책의 내용을 모른다.

<소피의 세계>,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 아문센이라는 어린이 시점의 어드벤처물 형식으로 서양철학의 계보를 훑는 입문서. 서양철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점도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반전에 집중했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아름다운 합본판을 사 놓고 끝까지 읽지 못한다는 점에 미루어 이 반전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많을 것인데, <소피의 세계>는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 책이므로 그 반전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데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겠죠. 소피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픽션 속에 존재하는 캐릭터이고, 소피와 가끔 만나지만 영원히 닿을 수는 없는 소녀 ‘힐데’가 현실의 사람이다. 힐데의 아버지가 힐데에게 철학을 가르치기 위해 생일 선물로 <소피의 세계>를 써준 것이라는 게 설정. 아버지가 딸을 때리지 않고 밥을 차려오라고 시키지도 않고, 그대신 생일 선물로 책을 써서 준다니! 어쨌거나 소피가 관념 속 존재임이 밝혀지는 이 책의 결말은 나에게 묘한 위로를 주었다. 살면서 ‘거리두기’가 필요해지는 순간에 나는 언제나 이 책을 생각하는 편이다. 영화 <매트릭스>로 대체 가능하다.

<트윈 픽스>, 데이비드 린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한 여고생이 죽고, 온갖 구리고 이상한 일들이 하나씩 밝혀지는 이야기. 책이 아니지만 꼽았다. 이 TV쇼가 특별히 어떤 작용을 해서 나에게 위로를 주게 되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음이 춥고 힘들 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트윈 픽스를 보면 효과가 좋았다. 이상한 사운드트랙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성 롤모델이 전면에 등장해 극을 이끌어나가는 작품이 아니면 잘 보지 않게 된 요즘에도 종종 생각날 때마다 배경음악 대신으로 트윈 픽스를 틀어 놓는다. 올해 리부트된다고 하여 크게 기대하고 있다.

<철없는 부모>, 니나 브라운

부모의 공격에 방어하는 방법을 삽화를 곁들여 자세히 설명했다. 이를테면 부모가 상처를 주는 말을 할 때 이를 차단하고 싶다면, 실제로 두꺼운 철판이 부모와 나 사이에 내려놓이는 상상(철판이 삐걱거리며 내려오는 소리와 그 촉감까지도!)을 하라고. 이 방법은 꽤 효과가 있었던 것 같지만, 이것 이외에 니나 브라운이 이 책을 통해 제안하는 방법들을 실제로 활용하여 효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나의 경우 ‘부모를 포기해도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데에 이 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부모’라는 키워드로 도서검색을 하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주로 현명한 부모 되기부터 시작해서 문제있는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을 뿐이라는 통렬한 자기 반성에 이르기까지, 검색결과는 다양한 기만들로 가득차 있다. 그 와중에 니나 브라운의 <철없는 부모>만이 나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었다. 이 책으로 부모와의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환상을 갖는 것은 좋지 않다. 많은 ‘철없는 부모’들은 자녀의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는 것만을 보아도 무척 화를 낼 것이다.

독자 여러분 삶의 질 향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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