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반생활일지 2. 함께하면 더 나은 자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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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생활일지 2. 함께하면 더 나은 자립

백희원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여성에게 자유는 배로 비싸다

나는 독립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이 자유를 획득하면 불안이라는 값비싼 청구서가 끝없이 날아온다. 지난해 1인가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응답의 비중이 82.5%로 가장 많이 나온 집단은 30대 초반 여성이었다.(2017 한국 1인가구 보고서, KB금융경영연구소) 이 설문에서는 모든 세대에 걸쳐 여성 1인가구의 만족도가 남성보다 높게 나왔지만, 또 한 편에는 서울에 사는 2-30대 1인가구 여성의 절반이 주거비와 치안으로 인한 불안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에 대한 보도기사가 있다.(서울여성가족재단, 2016) 통계에 드러나는 여성 1인가구의 이 양면적인 모습에 나는 완전히 공감할 수 있다.

내가 꾸린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가장 안전해야 할 집조차 생존을 위협받을수 있는 공간이다. 지난 해 겨울 트위터를 휩쓸었던 “이것이_여성의_자취방이다”해시태그를 검색해보면 온갖 생존담이 쏟아진다. 집에 돌아와 바로 긴장을 풀지 못하고 몇 초 간의 적막 속에서 핸드폰을 쥔 채로 화장실과 세탁기 안을 습관처럼 확인하는 여성 자취인을 결코 과민하다고 할 수 없다. 불안은 실제로 여성들이 더 많은 심리적, 물질적 비용을 감당하게 만든다. 가능하면 비싸더라도 더 안전한 방, 그게 어렵다면 도어체인과 방범창, 블라인드, 하다못해 전시해놓을 남자 신발이라도 사야한다.

생활을 궁색하게 만드는 이 불안에 대한 사회의 반응은 여전히 “그러니까 시집가”이다. 하지만 가부장제 하의 가족이야말로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라는 것은 두말 하면 입아픈 이야기다. 한국사회가 여성에게 제공하는 선택지는 불안이 딸려오는 자유거나, 희생이 요구되는 안정인 셈이다. 이 두 개의 차악 중에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단 친구와 함께 삶으로서 불안의 값을 나눠 지불하고자 했다. 이는 실로 효과가 있어서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주는 원초적인 공포 뿐 아니라, 집에 가구를 배달 받는 일, 집주인과의 소통 등 외부와 관련된 이슈에 있어서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창 밖에 낯선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던 어느 날 밤, 겁에 질리지 않고 침착하게 문자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것의 심리적 안정감

다른 이들도 비슷한 효능감을 느끼는 지 궁금해져서 여자 친구들과 넷이 함께 살고 있는 친구, 여성 하우스 메이트들과 셋이 살고 있는 친구를 각각 만나 서로의 동반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보았다. 혼자 생각할 때 보다 장점들이 더 많이 드러났다. 아파트에 사는 경우도, 다가구 주택에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튼 서울의 그저 그런 원룸 월세에 준하는 비용으로 최소한의 동선이 나오는 ‘집’에 살 수 있다는 경제적 이점이 당연히 첫 번째였다. 물론 각자에게 방이 주어진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로, 모두들 개인 공간의 확보가 공용 공간보다 우선한다는 데 동의했다. 친구들 역시 혼자 살 때보다 치안에 대한 걱정이 확실히 줄고, 생활용품 및 소모품 조달에 있어서 경제적이고 편리하다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대화가 점점 깊고 좁아지면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은 친구와의 동반생활에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낀 경험이었다. 대학에 다닐 때는 혼자 자취하다가 최근에 친구들과 함께 살게 된 친구는 이전보다 우울감에서 수월하게 빠져나올 수 있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알 것 같았다. 친구와 함께 살면 생활의 최저선이 생긴다. 우울감 때문에 생활의 질이 떨어지고, 그런 생활 때문에 우울감이 더욱 증폭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려다가도 어느 순간 최소한의 생활을 돌보게 되어 악순환이 예방된다. 맞장구 치며 웃음이 터진 순간은 여자친구들과 함께 살면 어쩐지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잘 먹이게 되더라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디저트 하나라도 들고 오는 친구, 영양제를 챙기는 친구, 자신에게 좋았던 운동을 영업하는 친구. 우리들은 계속 서로의 삶에 좋은 걸 더하려고 한다. 이것은 염려와 걱정이 듬뿍 담긴 무거운 잔소리와는 조금 다른 편안한 돌봄이다.

가족은 가깝지만 누구보다 내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존재인 반면, 친구나 하우스 메이트에게는 오히려 삶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다. 한 친구는 지난 해 완전히 새로운 일의 영역에 도전해야 해서 매일 초조함과 불안감에 힘들었는데, 그 기간 동안 함께 사는 언니가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필요에 의해 함께 살게 된 사이이고, 서로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가벼운 격려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문제적인 상황에 처해있을 때, 가까운 이들이 나라는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그보다 잘 모르는 이가 보낼 수 있는 가벼운 신뢰가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을 위한 온전한 관계

이 대화를 나누고 나서 독립이 경제적인 불안, 치안에 불안을 주기는 했지만, 긴 시간에 걸쳐 나를 더 본질적인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품고 있던 가장 큰 불안은 커리어를 정확히 결정하지 못한 채로 흘러가고 있는 20대의 삶 그 자체였는데, 다행히도 어느덧 내 삶의 꼴이 갖춰졌다는 안정감을 느낀 지 좀 되었다. 이 세계에 나를 위한 온전한 자리를 만들어냈다는 느낌. 영원하고 무결한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나는 사람들과 교류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벌려 스스로를 먹여살리거나 보람을 느끼고, 휴식을 취하며 균형잡힌 삶을 누릴 수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한 이 동그란 세계는, 분명 내가 집을 나와서 산 지난 6년의 시간 동안 천천히 만들어져 온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이 과정에는 함께 사는 친구의 기여가 있다. 당장 생활비가 없어 일일 알바를 전전할 때에도,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일 저 일을 벌려볼 때에도,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 순간에도 나는 같이 사는 이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농담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였는데, 당시에는 별 자각이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집에서의 이 역할이 내가 무너지지 않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되었다. 내일이 안 보여도 오늘 나눌 수 있는 안부와 농담을 건네고 나면 아직 괜찮다는 심정으로 잠들 수 있었으니까. 떨어진 면접에 대한 농담과, 우리가 함께 먹은 떡볶이와 목적없는 밤산책이 지금 내가 삶에 대해 느끼는 안정감의 8할은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삶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관계를 만드는 것, 그러니까, 가족을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다. 하지만 서로에게 기대하는 의무가 큰 만큼 온전한 가족이라는 목표는 종종 불완전한 구성원을 결핍된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게다가 그 의무의 크기는 불균형하기도 하다.)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만 그 안에서 요구되는 멀쩡한 첫째 딸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어서 집을 나왔다. 그 후 친구와 함께 살면서 서로의 곤경을 이해하면서도 서로를 문제거리로 삼지 않을 수 있는 느슨한 관계 위에서만 가능한 어떤 단단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오늘의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끔 이끈다. 이것으로 내가 알게 된 것은 자신다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안전한 사적인 공간이 우선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방을 가진 여성들의 집은 이런 맥락에서 고려할만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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