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줍는 시 26. 고통을 나누는 마음

생각하다독서

다시 줍는 시 26. 고통을 나누는 마음

신나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나는 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작품 속 말하는 사람은 무척 괴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뿐이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왜 이토록 괴로운 상황에 처했는지, 정확히 어떤 결의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의지가 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다. 왜 시인 이근화는 자신의 괴로움을 정결한 언어로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나는 이 시를 읽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통하여 그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다가가보고자 한다.

그녀는 어떻게 죽어갔을까

「나의 친구」는 ‘그녀’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시이다. 시인은 그의 턱, 입술, 머리카락, 눈에 대해 묘사해 나간다. 대부분의 경우 시에서 묘사는 대상을 하나의 상으로 그리기 위해 사용되거나, 궁극적으로 어떤 대상을 형상화해내는 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지하기 위하여 사용되곤 한다. 그런데 이때의 묘사는 그 어느 쪽에도 목적을 두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그의 주변을 겉돌며 그의 부분부분을 조금씩 생각해보는 것 같다. 왜일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할까/어떻게 죽어갔을까” 이어지는 진술에서, 시인이 죽은 ‘그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관심과 호기심이 혹 폭력이 될까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선 묘사는 시인의 태도였던 것이다.

이어 시인은 죽은 ‘그녀’의 상황을 헤아려보고, 누군가가 그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낀다. 시인은 죽은 그를 추측하는 일을 통해, 도리어 그의 정체를 약간은 지워내고 그럼으로써 뭇사람들의 시선의 폭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해보고자 한다. “그녀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고/그녀는 아무래도 옷을 입지 않은 것 같다/그녀는 가슴도 음부도 없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의 성별이 여성일 때, 사람들은 쉽게 여성성을 상징하는 신체들을 소환하고 소비하며 망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한다. 시인은 그러한 폭력이 두려웠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녀는 아름다운 것 같다” 시인은 또한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죽은 그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누구의 울음인지

지속적으로 ‘그녀’를 호명하며 이어지던 서술은, 다음의 문장에서 문득 멈추어 선다. 시인은 그에 대한 것인지 ‘나’에 대한 것인지 불분명한 서술들을 이어 나간다. “입술 속에 숨었다/손톱 밑에서 운다/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입술 속에 숨어, 손톱 밑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일까 나일까. 시인은 자신과 그를 분리하고 그에게 감정이입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를 분리해내는 데 실패하고 그의 감정을 그대로 흡수해버린다. 그로부터 문장들이 탄생했기에, 서술된 행위의 주체가 불분명한 문장들이 이어졌던 것이다. 주체가 불분명한 문장들은 시 전체를 흔든다. 지금껏 읽어왔던 문장들의 주체는 누구인가.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모호함을 뒤로 하고, 시는 마무리된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그에 대한 태도와 관계에 대한 의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자신이 그의 앞에서 조심스럽게 머뭇거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약속은 자꾸만 미뤄지지만” 시인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그와의 관계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본다. “친구되기를/그녀와 나는 노력해본다/이 삶에 대해서도” 작품의 제목인 ‘나의 친구’란, 나와 그가 이미 친구임을 명시하는 문장이 아니라, 나와 그가 친구되기를 노력해볼 것임을 이야기하는 문장이었던 것이다.

죄가 나를 먹은 말 

이근화의 시집 전체는 죄책감 속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무수한 잘못 가운데 내가 불쑥 솟아올랐다는 생각. 생각/속에서 나는 천천히 무너져간다.”(「시인의 말」) 세월호 이후로 (혹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로) 시인은 숨 쉬는 방법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낀다. “갑작스럽게 죽은 이들 옆에서 잔인한 호흡법을 배운다./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일이 내게는 무척/어렵다.”(「시인의 말」) 

시인은 사람들의 죽음 이후 타인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역시 잃어버린다. 죄가 시인을 삼키고 시인을 뱉는다. 죄로부터 튀어나올 때, 시인은 돌아갈 집이 없음을 느낀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된다. 그러니 삶은 지옥이다. 

“내가 지워지는 날들이 있어요. 내 죄가 나를 먹는 그런/날들. 다 먹힌 것 같은데 내일의 침묵 속에서 내가 다시 튀/어나오겠지요.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내가 돌아갈 집은/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합니다.”(「내 죄가 나를 먹네」)

죄책감이 자신을 쫓아올 때, 시인은 크고 분명한 공포와 고통을 느낀다.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감각이 시인을 짓누르고 괴롭게 만든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감각 뿐 아니라 이 고통에 머물러야만 한다는 시인의 의지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헤아려보자면, 시인은 타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정당화할 수 없게 되어서, 그렇게 마음이 너무 어려워서, 오직 죄책감에 머무르며 머뭇거리는 방식으로만 삶을 지속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집에는 너무 깊고 잔혹한 고통이 가득하다. 다음의 시에서, 시인에게 죄책감은 자꾸만 쫓아오는 괴물로 그려진다.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자꾸 태어났다. 들/러붙었다. 죽지도 못한다니 이건 불행이 아니니, 물었지만/내가 벙어리였다. 처음이었다. 힘센 못난이라니. 깨진 거/울이 내 몸이었다. 이렇게 극진한 사랑은 처음이었다.”(「괴물은 얼굴에 발이 달렸네」)

시인은 말한다,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방향과 속도를 모르고 헤지는 시간/내 마음은 피바다를 건넌다”(「내 마음은 피바다를 건넌다*」) 

나는 다시 「나의 친구」로 돌아와 생각해본다. 이가 시인이 타인에 대해 느끼는 죄책감에 관한 작품이라고 생각해보니, 시에서 말하는 이가 처한 정황이 조금 밝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이 시에서 시인이 그녀에게 취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시집을 읽어본다. 그리고 나는 이근화의 시집이 던지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1.여성이 여성에 대해 감정을 느낀다는 것 2.죄책감을 글로 쓴다는 것.

함께 울었다

이근화의 시에서 말하는 이는 여성인 타인에게 거리를 갖지 못한다. 여성인 타인 그 자체가 되어 고통받고 울음을 터뜨린다. 시인은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한 번 괴로워하고, 자신에게 죄를 묻고 책망하는 방식으로 또 한 번 괴로워한다. 작품 속에서 시인은 아이를 낳고 친정 엄마가 끓여준 미역국을 먹는다. 환희와 뜨거움으로 가득할 것 같은 이 장면에는 오직 괴로움과 슬픔이 가득하다. 

“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은/눈물 같고 고름 같고 죽음 같다/흐르지 않고 동그랗게 고인다/잊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꿈속의 연인들처럼/고독한 순례자처럼/성지에서 터지는 폭탄처럼/폭력적이고 슬프다”(「미역국에 뜬 노란 기름」) 

한 생명을 낳으며, 시인은 자신을 낳고 자신에게 평생을 헌신해 온 엄마의 삶에 죄책감을 느낀다. 자기 키 만한 미역을 끌어안고, 피를 질질 흘리는 소고기 덩이를 등산 가방에 매고, 피곤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 온 엄마. 시인은 어머니가 겪어 온 고통과 슬픔을 고독하게 받아 마신다. 이러할 때, 시인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죄처럼 느껴진다.

아이를 낳으며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느끼던 시인은, 글을 쓰며 죽은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낳으며 그로부터 자신도 탄생하는 과정 가운데, 시인은 자신으로 인해 조금씩 죽어가거나 이미 죽어버려 다시 소생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또 시인은 자신이 무엇을 쓴다 해도 타인의 죽음에 한 발치라도 다가가거나 그 깊은 적막을 깰 수 없음에 완전한 절망을 느낀다. 동시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무엇을 써서라도 죽어가거나 죽음을 맞이한 타인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한다. 그 절실함 가운데 시가 탄생한다. 

“오늘밤 한권의 책이 나를 낳았다/피부와 머리카락이 없고/입술과 성기가 없는 어여쁜 사람/오늘밤 내가 태어나고 나는/한권의 책을 네 옆구리에서 다시 찾아냈다/여러개의 서랍 속에서/모두들 태어나고 싶은데”(「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시인은 타인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라니/안아줄 팔도 없이/달려갈 발도 없이/네가 나를 부른다”(「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시인은 그 소리를 받아 적으며 괴로워한다, 그것은 가까워지고 싶지만 가까워질 수 없고 살려내고 싶지만 살려낼 수 없는 사람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네가 영원히 죽는다 해도/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죄책감이란

다시 나는 「나의 친구」로 돌아온다. 시인은 죽은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이 시를 썼다. 시인은 죽은 그가 살아 냈을 깊은 고통의 시간을 함께 느끼고, 죽은 그의 고통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괴로워했다. 시인은 죽은 그에 대해 쓰고자 했으나 혹 그것이 폭력이 될까, 수없이 ‘그녀’를 호명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머뭇거렸다. 그리고 시인은 조금이나마 살기 위해 시를 쓰면서도, 아무리 써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에 그를 다시 살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절망했다. 그러한 가운데 몇 줄의 시를 썼다. 

이제 나는 조금이나마 「나의 친구」라는 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친구인 여성들이 고통받을 때, 우리는 한 몸처럼 ‘그녀’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리고 그의 고통에 크고 깊은 책임을 느끼면서도, 함부로 그에 대해 말하거나 쓸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채로 머뭇거리게 된다. “약속은 자꾸 미뤄지지만” 우리는 ‘그녀’를 잃거나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 곁을 떠돌게 된다.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죄책감이란 그런 것이다. 이근화의 시는 그 고통의 한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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