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 15주차

생각하다임신과 출산

임신일기 - 15주차

ND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2018년 4월5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이 지독했던 내 입덧과 함께 떠나가면서 나에게 안팎으로 봄이 찾아왔다. 날이 제법 따뜻해졌고 곳곳에 벚꽃이 피어있다. 내 임신기간을 통틀어 지금이 제일 가뿐한 시기일 것 같다. 입덧이 사라지고 정신을 차리니 임신기의 나를 더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내 인생이 온통 아기로 가득할 테고 내 최대 화두는 ‘현명하고 사려깊고 강단있는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는 것이겠지. 

아기를 건강한 인격체로 양육하는 것은 외롭고 치열하고도 대단한 일이지만 아기를 낳는 순간 내 고민의 주제들이 통째로 바뀌고, 그 때부터는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건 내 살아온 발자취를 두고 봤을 때 너무 아쉬운 일이다. 남은 임신기 동안 나를 더 돌보고, 생각하고, 기록하면서 유자녀기혼 페미니스트로서 삶을 기대감으로 맞이해야지.

2018년 4월6일

오늘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들은 소리는 "배가 하나도 안 나왔네요." 그야말로 ‘어쩌라고’다. 회사 복도에서 오다가다 나를 보는 사람들마다 배 크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임신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흔히 보던 임부치고는 배가 안 나온 거 같고, 그렇다고 입덧으로 고생하는 거 같지도 않으니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걸까. 

임신한 여성에게 할 말 없으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자. 나는 넷플릭스로 TV 쇼 보기를 좋아하고, 요리하기를 좋아하고, 지난 한 해 해외여행을 다섯 차례 다녀왔고, 페미니스트이며, 전문직 여성인데 갑자기 내가 ‘임산부’로만 취급 당하는 것도 낯설지만 대부분의 대화주제가 ‘내 배 크기’라면 어리둥절해지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할 말은 '제 배를 왜 멋대로 보고 함부로 말씀하세요.' 뿐이지만 오늘도 친절히 다 설명해주고 말았다. 배는 조금씩 일정하게 커지는 게 아니라 중기부터 천천히 나오기 시작해 출산예정일에 인접할 수록 아기와 함께 마구 커지는 거라고 인내심을 갖고 매번 알려준다. 뱃속 아기에게도 성장과정이란 게 있거든.

개인차가 있지만 임신한 여성들은 배가 작아도 근심, 커도 근심이다. 배가 작으면 아기의 성장이 더뎌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하여 무리하게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임부가 있는가 하면, 배가 너무 커져 척추가 몸을 지탱하기 버거워 허리질병이 생기거나 하체 부종이 심화되기도 한다. 불가피하게 제왕절개로 수술분만을 해야만 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임부의 배가 크네 작네 이야기하는데 그 중 임부나 아기를 걱정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다 차치하고서라도, 사람의 외모를 품평하는 게 무례라는 걸 아는 사람들도 임신한 여성의 배 크기나 체중 증가에 대해선 이야기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어쩐지 이상하다.

2018년 4월10일

아랫배에서 뭔가 계속 꾸룩꾸룩 한다. 이런 걸 태동이라고 하나보다. 임신한 지 5개월만에야 내 뱃속에 뭔가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태동을 느꼈다고 하니 친구가 내게 조심스레 이제 모성애가 생겼냐고 물어본다. 모성애는 종교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모성애라는 믿음이 좋은 사람들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그런 것.

어느 임산부의 블로그 포스팅을 보는데 여행을 가고 싶은데 임부의 몸으로 가기엔 조금 무리인 일정 같아 뱃속 아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락 맡고 다녀왔단다. 한참을 생각했다. 태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락을 맡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도대체 어떻게 했다는 걸까.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논리 회로를 작동시키는 내겐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다 이를 믿음의 영역이라고 보니 이상할 것이 없어졌다. 보이지 않는 신이란 존재를 두고 간절히 바라는 것을 기도하기도 하고, 힘들 때 의지하기도 하고, 어떤 일을 두고 신이 한 일이라며 찬양하거나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실체가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종교라는 이유로 그런 믿음을 비난하거나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그 반대와 다를 바 없이 무례하고 옳지 못한 일이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는커녕 아직 아기와 얼굴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임부에게서 나타나는 모성애라는 것 역시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모성애가 모든 임부에게 반드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태중에서부터 아기에게 모성애를 느끼는 임부를 자의로나 타의로나 모성신화에 부역하는 사람으로만 여겨선 안 된다는 말이다.

2018년 4월11일

임신을 하게 되면서 커뮤니티 언어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알 수 없는 말들이 넘실대는데 혼자그 뜻들을 파악 하느라 애를 먹었다. 임부 커뮤니티의 게시판을 열심히 관찰한 결과, 임부들의 언어는 줄여 말하기와 돌려 말하기로 양분되는 것 같았다.

줄여 말하기

배테기: 배란테스트기
임테기: 임신테스트기
계유: 계류유산 (태아가 자궁에서 사망한)
화유: 화학유산 (태아가 아기집이 생기기 전에 사망한)
자임: 자연임신 (시험관이나 인공수정 등의 의료적 처치 없이)
촘파: 초음파검사 (질촘파/배촘파로 응용)
자분: 자연분만
제왕: 제왕절개

돌려 말하기

초매직: 임테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보면 매직아이처럼 간신히 두 줄로 보임
단호박: 임신가능성 없이 단호한 임테기 한 줄
111 혹은 222: 매일 혹은 이틀에 한번 섹스
숙제: 병원에서 섹스 하라고 지정해준 날
아기 옷 색깔: 분홍이면 여아, 파랑이면 남아

말을 줄여 쓰는 건 어느 커뮤니티에나 있는 일이지만 돌려 말하기는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다. 여성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이던 ‘소중이’라는 말이 여성의 성기를 뜻한다는 걸 알았을 때처럼 말이다. 

제일 이상하다 싶었던 건 ‘숙제’라는 말이었다. 난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난임 병원에 다녀온 후기를 보면 꼭 ‘숙제일’을 받아온다. 임신 확률이 높은 배란기-그러니까 일체의 피임 없이 섹스 하는 날-인 건 알겠다. 병원에서 날짜를 지정해주며 ‘숙제’하라고 말하냐고, 정말 ‘숙제’라는 용어를 쓰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병원에서까지 ‘성관계’ 혹은 ‘섹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숙제’라는 말로 돌려 말한다니, 이게 전문가의 입에도 제대로 올리기 불편한 그렇게 어려운 말인가 싶고, 자연임신은 섹스를 통해야만 이뤄지는데 어째서 은밀하게만 언급해야 하는 건지 머리를 갸우뚱했다.

지난번 정기검진에선 초음파로 아기를 보며 아기의 뇌 둘레, 배 둘레, 뼈 길이 등을 하나하나 재서 알려주던 담당의가 돌연 아기의 옷 색깔이 궁금하냐 물으셨다. 아기 옷 색깔? 무슨 이야기인지 조금도 눈치를 못 채 남편과 마주보고 눈을 서로 꿈뻑 꿈뻑만 하다가 뭐든 아기에 대한 정보겠거니 하고 “네” 했는데 ‘핑크색’ 이란다. 아, 아기의 성별을 이렇게 알려주는구나. 왜 이렇게까지 돌려 말하나 싶어 찾아봤더니 임신 32주 전의 태아 성 감별은 의료법 위반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런 식의 성 고정관념이 가득한 성별고지는 불쾌했다.

이미 10년 전에 태아 성 감별 고지 금지 조항이 위헌으로 판결 났지만, 개정된 법에서도 성 감별을 목적으로 진찰해서는 안되고 우연히 발견하더라도 32주 전의 고지는 불법이라고 명시되어 있더라. 태아 성 감별에 대해서 여아낙태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2018년에 병원에서 핑크색 옷을 준비하란 얘기를 들으니 그 구시대적 감수성에 기분이 이상하다.

남편과 이 낡은 성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러면 어떤 식으로 아기 성별을 고지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사실 이렇게는 어떤 말이라도 성 고정관념을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Girls can do anything"인데, 생물학적 요소를 언급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아와 여아를 구분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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