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녀 잔혹사: 돈'도' 쓰지 않은 남자들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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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녀 잔혹사: 돈'도' 쓰지 않은 남자들을 추억하며

김쿠크

전직 개념녀입니다

“대전역 포장마차 우동이 그리 맛이 좋아”라는 희대의 명문장을 만들어 낸 ‘개념녀’가 있었다. 지금은 김치녀 또는 된장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 때 개념의 절정을 달렸던 과거의 나도 있었다. 나는 적지 않은 연애를 했고, 적지 않은 남자를 만났고, 결국 나에겐 다양한 ‘쓰레기 전남친’이 남았다. 쓰레기라는 표현도 아까운 그들이 각축을 다투는 가운데 굳이 최악을 뽑자면, ‘돈 없는 찌질남’ 을 꼽을 수 있겠다. 나 같은 개념녀와 그런 남자들의 연애는 눈 뜨고는 못 봐줄 정도로 개념찼고, 또 찌질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내 얼굴에 침 뱉기지만, 도시전설처럼 암암리에만 공유되는 최악의 구남친 이야기는 조금 더 바깥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어떤 개념녀였는지, 어떤 ‘개념 넘치는 연애’를 했는지에 대해 써볼까 한다. 이름하여 ~내가 만났던 최악의 돈 안 쓰는 연애 상대~ 들이다. 사이다는 없고,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듯한 답답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자.

후보 1 : 돈 안 쓰는 된장남

대학 새내기가 되어 서울로 갓 상경했을 때였다. 집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던, 문란한 삶을 누리고 싶었지만 막상 문란하게 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 때는 ‘ㅇㅇ당’ 같은 일종의 모임 같은 게 트위터에서 유행했고, 서울에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나는 그런 ‘당’에 들어가서 정모에 참석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만나게 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후보 1 이다. 이러저러하고 여차저차하여 후보 1과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둘 다 학생이었던 탓에 돈이 없긴 매한가지였지만, 나는 개념찬 여친이었기에 돈 없는 남친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대신 도맡아서 비용을 지불했다. 조금이라도 가격대가 있는 식당에 가려면 전부 내가 돈을 내야 했고, 같이 여행이라도 가겠다 치면 호텔 비용도 다 내가 부담해야 했다. 뭐, 여기까지는 도처에 널린 평범한 개념녀의 연애다.

그런데 후보 1은 흔히들 말하는 ‘앱등이’였고, 스타벅스 골드카드 소지자였고, 지갑은 브랜드 물건만 사용했고, 파일럿 워치를 차고 다녔고, 여행을 가면 무조건 특급 호텔에 묵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애플 제품은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구매해야 직성이 풀렸고, 스타벅스 MD가 새로 출시되는 날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줄을 서서 원하는 상품을 사야만 했다. 집에는 스타벅스 로고가 찍힌 텀블러가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 아이폰은 시리즈 별로 집에 모셔놓고 있었다. 페이스북 사진첩에는 특급 호텔 룸에서 명품 지갑과 파일럿 워치가 나오도록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이쯤에서 정정하겠다. 후보 1은 찌질남은 아니었다. ‘된장남' 이었던 것이다.

당시 개념찼던 내게 스타벅스는 된장녀의 상징이었고, 앱등이는 허세의 대표였다. 그랬던 내게 후보 1의 소비 패턴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나? 된장녀는 있지만 된장남은 없었던 시절이라 나는 후보 1을 정의할 단어조차 찾지 못했다. 그저 조금 특이하다 여겼던 후보 1은 스타벅스 한 번 가 본 적 없는 나를 된장의 길로 인도했다. 그렇게 내가 순조로이 된장녀가 되었을까? 그럴 리가. 나의 개념은 단단하고 공고했다. 난 그저 예외적으로 스타벅스를 가는 개념녀일 뿐이었다. 애플 신제품 사느라, 스타벅스 MD 사느라, 명품 가방과 지갑을 사느라 돈 없는 남자친구 스타벅스 카드를 충전해주는 개념녀. 그리고 별은 고스란히 후보 1에게 들어가 차곡차곡 쌓였다. 그의 골드카드는 내가 결제할 때 더욱 빛났다.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겠지만 이 연애의 끝도 좋지 않았다. 나와 후보 1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됐고, 서로 바빠지면서 거리감이 생겼고, 결국 자연스럽게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일 년쯤 뒤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후보 1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게 된다. 알고 보니 후보 1이 내 친구 A에게 호감이 있었다는 이야기. 나에게는 돈 없다고 선물 한 번 사 주지 않았던 그 인간이 A에게는 아이폰부터 명품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물 공세를 다 했다는 이야기. 나와 갔었던 그 비싼 호텔, 내가 돈 다 내고 자기는 사진이나 찍어 올렸던 그 호텔에 A를 데려가며 자기 돈을 척척 냈다는 이야기. 이 모든게 나와 헤어지고 난 이후였으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을 텐데, 알고 보니 나와 사귀고 있는 동안에도 A에게 플러팅을 하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나한테 안 쓰고 아낀 돈을 A에게 쏟아 부었다는, 피가 거꾸로 솟는 이야기.

이것이 개념찬 연애가 맞이한 종말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후보 1에게 안 좋은 감정만 남은 것 같지만, 사실 후보 1에게는 고마워해야 할 점이 굉장히 많이 있다. 나에게 스타벅스를 익숙하게 만들어주어서 한층 더 된장스러운 된장녀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 특급 호텔의 맛을 일깨워주어서 된장녀로서의 레벨을 더욱 높일 수 있게 해 준 것,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에 개념녀를 벗어 던지고 헬페미로 거듭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준 것. 돈 주고도 하기 힘든 경험을 정말로 돈 주고 겪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정말로 탓해야 하는 건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옹골차게 개념을 챙기고 있던 나 자신이었다.

후보 2: 여친이 돈 쓰는 꼴을 못 보는 마초

후보 2는 동아리 선배였다. 매주 모임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외모가 눈에 띄어서 좋았다. 그래, 후보 2는 참 잘생겼다. 자칭 타칭 ‘xx대 이승기’였다. 선배로 알고 지낸 지 거의 2년쯤 되었을 때, 어쩌다 보니 썸을 타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섹스를 했고,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더라. 하필이면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졌다. 후보 2도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고, 나도 애인 없이 지내면서 슬슬 외로워 질 때였다.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지. “결혼하기 전에는 이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하기 전에는 그런 사람인 줄 꿈에도 몰랐다. 이 년 정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엠티도 같이 갔고, 매주 모임 때마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밥도 같이 먹었다. 보드게임도 하고, 소풍도 가고, 영화도 보고, 술도 마시고. 하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선배로서 알고 지냈던 그 사람의 모습과 연애를 시작한 후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후보 2는 후보 1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신선하게' 찌질했다.

후보 2는 나보다 나이 많은 선배였지만 어쨌든 학생은 학생. 똑같이 용돈 받아 쓰는 처지에 돈 많이 못 쓴다고 누가 뭐라 하랴. 그렇지만 후보 2에게는 좀 뭐라 하고 싶었다. 그 나이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가부장적 마인드를 장착한 그는 ‘자기 여자’가 돈 내는 꼴을 절대 보지 못했다. 그 결과, 데이트 때 유가네에 가서 볶음밥만 먹고는 “볶음밥 맛있지? 많이 먹어.” 하며 배시시 웃는 꼴을 봐야만 했다. 유가네에서 볶음밥만 시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놈의 잘생긴 얼굴이 뭐라고, 배시시 웃는 얼굴만 봐도 나는 배가 불렀다. 그렇게 후보 2와의 연애에서 갔던 가장 비싼 식당이 아마 콩불과 유가네였지 싶다. 보통은 김밥천국을 가서 김밥만 두세 줄 시켜서 먹고는 했으니까. 가끔 내가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가자고 하면 싸고 맛있는 게 많은데 왜 굳이 비싼 돈 주고 먹어야 하냐며 나에게 훈계를 했고, 결국 나는 김밥천국과 콩불과 유가네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밥 먹는 데에도 내 돈을 못 쓰게 하는 사람이 모텔을 간다고 달랐을까? 후보 2는 만날 때마다 자기가 돈을 썼으니 나는 무조건 섹스를 해 줘야 한다는 식이었고, 서로 개인 공간을 쓰기 어려웠던지라 저렴한 모텔을 찾아 다녔다. 모텔. 말이 모텔이지,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고시텔 같은 방이었다. 사람 한 명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만을 남긴 채 딱 들어찬 침대와 좁은 화장실이 전부인 그런 방. 불을 켜도 어두운, 심지어 콘돔이나 칫솔 같은 일회용품도 제공해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이불을 빨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그런 곳에서 콘돔도 없이 섹스를 했다. 나는 그 찝찝한 섹스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날의 데이트 비용을 전부 후보 2가 지불했으니까.

조금 딴 이야기지만, 한 번은 내가 도무지 안 될 것 같아 콘돔을 사 간 적이 있었다. 후보 2에게 콘돔을 쥐어 주자 그는 내게 이게 뭐냐고 물었고(정말로!) 나는 콘돔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후보 2는 콘돔을 바닥으로 던지면서 외쳤다.

으! 더러워!

정말이다. 이건 실화다. 믿기지 않겠지만 실화다. 그가 못 만질 거라도 만진 양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콘돔을 바닥으로 던져버렸던 그 상황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천년의 발정이 식어버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날도 콘돔 없이 섹스해야 했다.

후보 2의 가부장적 마인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20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내게 “따박따박 대든다”고 하질 않나, “여자가 왜 그렇게 기가 세냐”고 하질 않나. 제일 가관은 결혼관이었다. 사귄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듣게 된 후보 2의 결혼관은 잘생긴 얼굴만 뜯어먹고 살자 해도 버티지 못할 만큼 구시대적이었다. 결혼하면 여자는 무조건 직장을 그만 두고 가정주부로 살아야 하며, 남편이 아무리 돈을 못 벌어와도 그 돈으로 알뜰살뜰하게 지혜롭게 꾸려나가는 게 여자의 몫이자 의무라고 했다. 신혼은 단칸방 원룸에서 시작해야 하고, 처음부터 아파트나 투룸 같은 곳으로는 절대 못 간다더라. 그리고 수많은 한국남자들에게 들러 붙은 그 귀신, 아침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어 있었다. 너무 구시대적이라고 반박하자 “우리 엄마는 그렇게 살았어”부터 시작해서 “너는 여자가 돼서 남자 말에 대들기나 하고 말이야” 라는 소리까지 듣고 말았다.

후보 2의 옛스러운 마인드에 지친 나는 잘생긴 얼굴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는 자신의 말에 따박따박 대드는 나와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카페에서 만나, 서로 외로움에 만났을 뿐이라며 조용히 헤어졌다. 아, 헤어질 때 카페에서 마셨던 음료는 비로소 내가 결제했다. ‘자기 여자’가 아니면 얻어 먹어도 된다나 어쨌다나.

후보 3: 개념녀 테스트 겸 돈도 절약하는 남자

후보 3은 학생일 때부터 알고 지냈다가 취업 후에 사귀게 된 경우였다. 후보 3은 직장인이고 나는 학생이었다. 그는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을 다녔고, 좋은 연봉을 받았다. 7살 연상이었던 후보 3은 나와 사귈 때 이미 30대였다. 나이도 어느 정도 찼겠다, 번듯한 직장도 있으니 주변에서 결혼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후보 3은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결혼할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나이가 많아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하지만 그게 나를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신붓감으로 키우겠다는 소리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후보 3과의 데이트는 이러했다. 밥을 먹으러 간다. 밥은 비싸지 않은 적당한 금액대에서 먹는다. 밥은 후보 3이 결제한다. 그리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무조건 디저트를 먹으러 간다. 카페에 가서 조각 케익을 하나라도 꼭 주문해야 한다. 디저트는 내가 결제할 거니까. 그러다 보니 밥보다 비싼 디저트를 먹는 날이 더 많았다. 갈릭 디핑 소스 하나까지 더치페이를 요구했다는 더치페이남처럼 칼 같은 더치페이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돈이 없지는 않은데 내가 썼으면 너도 써야만 한다는 정신? 나한테 쓰는 돈을 아까워하는 느낌?

그와의 첫 섹스는 정말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잊혀지지 않는다. 둘 다 술에 취했고, 밤이 늦어 자연스럽게 잘 곳을 찾았다. 번화가에서 같이 술을 마셨기에 가까운 곳에 모텔들이 있었지만 후보 3은 나를 으슥하고 먼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낡고 허름하고 어두침침한 여관이었다. 그 지저분한 방에서 옷을 벗고 애무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덜컥, 열리더니 여관 주인이 들어왔다. 분명 방문을 잠궜는데, 잠금 장치가 고장나서 제대로 잠기지 않았던 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인은 바로 나갔지만, 나는 언제 또 열릴 지 모르는 방문 때문에 불안감에 휩싸인 채 섹스를 해야 했다. 이 찝찝한 이야기를 왜 굳이 꺼냈냐면, 후보 3이 이상할 정도로 여관에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천에 널린 깨끗하고 시설 좋은 모텔들을 내버려두고 굳이 지저분하고 낡고 허름한 여관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 집착은 여행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후보 3과 딱 한 번 멀리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올라오는 게 전부였다. 잠깐 해수욕 하고, 맛있는 거 먹고 오자고. 같이 계획을 짜는데, 후보 3은 여행지에서까지 여관에서 묵겠다며 여관을 찾고 있었다. 멀리 여행까지 가서 여관에서 묵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는 숙소를 내가 알아보고 예약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썩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가는 여행이고, 내가 그렇게까지 주장하는 건 처음인지라 숙소 선정을 나에게 넘겼다.

그렇게 내가 예약한 곳은 해운대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호텔이었다.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추억 만들겠다고 간 거였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가 뭐라고 했을까?

왜 이런 데를 오냐. 여관 같은 데도 묵을 만 하다. 이런 데는 김치녀, 된장녀들이 허세 부리러 오는 데다.

그렇게 나는 함께 가는 여행에서 좋은 호텔을 내 돈으로 예약하고도, 윽박지르는 남자친구 앞에서 잘못했다고, 나는 된장녀가 아니라고 빌어야 했다. 숙박비를 더치페이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내 돈으로 내가 자고 싶은 곳에서 자겠다는데 도대체 왜 잘못했다고 빌었는지. 과거의 나 자신이여, 한심해도 너무 한심하다.

어찌저찌해서 후보 3과는 일 년 정도 연애하다가 헤어졌다. 헤어지게 된 이야기는 쓰지 않으련다. 조용하게 헤어졌고, 헤어지고 난 이후에 약간의 질척임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최종적으로는 안전이별할 수 있었다. 후보 3이 여관에 집착했던 이유가 모텔비도 아끼고 여자친구 ‘개념녀 테스트’도 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였다는 걸 나중에야 깨닫긴 했다. 새로 만나는 분은 그 테스트 통과 하셨으려나.

개념녀의 괴로움이 이름을 찾았다

후보 3과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옹달샘의 “개보년”, “경험 있는 여자는 창녀” 등 수많은 여성혐오 언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주 다니던 커뮤니티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분노하는 걸 목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갈리아가 생겼다. 그곳에서 나와 비슷한 여자들을 만났다. 한 때 개념녀였던 여자들, 데이트 폭력과 데이트 강간,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여자들을.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사는 게 맞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두가 그런 삶을 산다 해서 그 삶이 옳은 게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삶을 산 게 내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나의 불편이, 우리의 고통이 그렇게 이름을 찾았다.

메갈리아가 생기고 주변의 친구들도 바뀌어갔다.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늘어났고, 이전에는 부끄러움에 이야기하지 못했던 과거의 연애를 털어놓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누구는 남자친구가 바람 피운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 생각하며 살았고, 누구는 혼후관계주의였지만 남자친구 때문에 원치 않는 섹스를 해야 했고, 또 누구는 일상적으로 성매매 하는 남자친구를 보며 자신을 탓했고, 또 누구는 콘돔을 쓰지 않는 남자친구 때문에 임신과 낙태를 경험했고, 또 누구는 상습적인 데이트 폭력과 데이트 강간을 겪었지만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벗어날 수 없었고, 또 누구는 남자친구에 의해서 감금당해 며칠을 외부와 단절된 채 두려움에 떨었고, 또 누구는 남자친구에게서 성병이 옮았지만 그 때문에 비참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서로의 위로가 되었고, 서로의 용기가 되었다.

개념녀 여대생에서 ‘꼴페미' 이대생으로

그렇게 나는 페미니즘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이대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라도 나는 남자를 만날 때 학벌도, 외모도, 돈도, 능력도, 그 무엇도 밝히면 안 되고, 오로지 진정성과 더불어 잘 보이지도 않는 내면만을 보아야 했다. 그렇게도 자기 내면을 보아달라고 외치던 남자들의 내면이 실제로는 정말이지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꼴페미들의 온상’이라는 이대생 타이틀에 걸맞는 페미니스트로 거듭났다.

페미니즘을 알고 난 뒤의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상대가 데이트 비용을 전부 다 냈다고 해서 내가 무조건 섹스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었고, 내 돈을 쓰면서도 된장녀 소리를 들을까봐 전전긍긍해 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치페이는 더 이상 당연한 개념이 아니었고, 콘돔을 사용하지 않거나 내가 원치 않으면 섹스를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원치 않는 섹스는 연인 사이라 하더라도 강간이라는 것,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며 자기 마음대로 다루려 하는 것도 데이트 폭력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를 옭아매는 그 수많은 족쇄들을 거부할 권리가 나에게 있었다. 한 번 새로운 세상의 맛을 본 나는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개념녀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페미니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개념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후보가 셋이 아니라 열 쯤으로 늘어나 있었을지도 모르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페미니스트의 길로 인도한 ‘페미요정’ 옹달샘에게 아주 약간의 고마움을 표한다. 지금은 나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자신이 돈을 썼다는 이유로 내게 섹스를 맡겨 놓은 것처럼 구는 사람과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 연애에 들어가는 돈이 불필요한 비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연애도 딱 거기까지인 거니까. 연애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게 돈이든, 감정이든, 시간이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이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여겨야지, 뭐.

“돈 없으면 연애도 하지 말라는 거냐!”고 울부짖는 여혐 종자가 있었다. 글쎄. 너희가 돈만 없겠니, 돈'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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