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일기 1 - 임신 3~4주차, 희미한 두 줄로 요동치는 일상

생각하다임신과 출산임신중단권

임신일기 1 - 임신 3~4주차, 희미한 두 줄로 요동치는 일상

ND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편집자의 말>

여자와 남자가 피임 없이 섹스를 하면 아기가 생긴다. 여자의 난소에서 만들어진 난자, 남자의 정소에서 만들어진 정자. 수정란이 되어 여자의 자궁에 착상되어 약 10개월 간 세포분열을 한다. 아기는 탯줄을 통해 모체로부터 영양소를 공급받아 성장하여 질을 통과해 밖으로 나온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이런 생물학적인 사실은 임신과 출산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 아무 것도. 실제로 임신을 하면 여자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성이 어떤 신체적 또는 정신적 변화를 겪는지, 현대를 사는 독립적인 (최소한 그렇다고 믿었던) 여성이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면서 어떤 고통을 참아내야 하는지, 대한민국의 교육과정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이 진정한 여성의 ‘선택’이 되려면 모든 여성이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야 한다. 여기 자신의 임신 경험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임신을 경험한 여성으로서 또 다른 임신 여성이나 비임신 여성에게 폭력적인 발언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매일을 기록하는 임신한 여성이 있다. 이 글은 ND님이 트위터(@pregdiary_ND)에 공유한 일기를 갈무리하고, 글자 제한에 담지 못한 내용을 추가해서 엮었다. 물론 임신, 출산 중에 겪는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하나의 사례로서, 임신과 출산을 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로서 읽어 보길 바란다.

2018년 1월9일

남편과 수많은 대화 끝에 아기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남편은 내 약한 몸이 감당하기 힘들 거 같다며 주저했지만, 온 인류가 별탈 없이 해온 일을 나라고 못하겠냐며 우리 가정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임신을 계획했다. 경구피임약과 콘돔 없이 배란기에 맞춰 남편과 섹스를 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임신테스터로 확인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주 희미하게 테스터기에 붉은 빛 두 줄의 선이 보였다. 임신이다. 계획적으로 임신을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줄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백지가 됐다. 갑자기 아무 생각이 안 난다. 지금부터 나는 걸어 다니는 걱정덩어리다.

결합된 수정란이 내 자궁벽에 착상만 했을 뿐인데 벌써 몸이 이상하다. 쏟아지는 졸음에 당황스럽다. 회사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커피를 주문했다. 뱃속 아기는 아기라기보다는 아직 세포수준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난 커피 한 잔에 미안함을 느낀다. 에스프레소 2샷이 정량인 커피를 주문하며 0.5샷만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정말 조는 것만 그만두려고. 어쨌든 일을 해야 한다. 전문의의 임신 확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에 임신 사실을 보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임신확인서가 있대도 업무를 제대로 못해내면 ‘이래서 여자는 안 돼. 결혼하고 임신하면 일 못하잖아.’라는 흔한 말에 기여하게 되는 것만 같아, 졸음에 허우적대는 나를 계속 다그쳤다.

앞으로 내게 얼마나 더 스펙타클한 일이 벌어질까? 이제 막 임신테스터기로 희미한 두 줄을 봤을 뿐인데 통째로 요동칠 내 미래의 일상이 그려졌다. "그게 다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야."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겪은 일이야."라는 말을 정말 싫어했다. 지금도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2018년 1월11일

종일 기분 나쁘게 울렁거린다. 이런걸 입덧이라고 하나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참아낸 후 다시 일을 한다. 과연 내가 임신을 완수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자신이 없어진다.

결국 근무상황에 조퇴결재를 올렸다.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상사나 동료가 볼까 두렵다. 임신을 하면 당연히 평소와 같을 수는 없는 건데, 회사라는 공간이 기혼임신여성인 나를 스스로 더 엄격하게 만든다.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 짓고, 도망가듯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제발 지하철의 임산부석이 비어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에서 임산부배려석이 비워져 있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2018년 1월12일

자위하는 꿈을 꾸다가 극심한 복통에 깼다. 섹스를 한 것도 아니고 자위를 한 것도 아니고 자위하는 꿈만으로 너무 아파 서럽다. 뭐 이렇게 아픈 복통이 다 있지? 자궁이 수축한 걸까? 자궁이 수축했다면 간신히 착상해서 분열하고 있을 아기에겐 온 세계가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 아닐까? 아기는 안전한 걸까?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엄마 욕정에 놀랐을 뱃속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려고 해서 욕이 나와 버렸다. 임신 전에는 뱃속 아기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뇌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그러니까 감정도 생각도 무엇도 없는 세포덩어리에 아기라는 인격을 부여하고 내 행동 하나하나에 아기에게 미안해하면서,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늘 자부했던 내 존재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2018년 1월14일

밤새 사타구니가 너무 아팠다. 끔찍하다. 계속 이렇게 아플까 봐 두렵다. 임신 중 당연한 과정이려니 하면 힘들어도 어떻게든 이겨내 보겠지만, 아기에게 이상이 있다거나 이상한 곳에 착상된 것일까 봐 너무 무섭다. 어서 병원에 가서 아기가 제 자리에 있는지 정상적으로 분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임신 5-6주는 되어야 자궁의 아기집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니 무력하게 기다릴 뿐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하루하루가 영겁의 시간이다. 내 아이가 잘 있는지, 유산 중인 건 아닐지, 너무 궁금하고 두렵다. 이런 생각도 참 우습지. 내 몸이 제 상태가 아닌데 벌써부터 아기를 걱정하면서 마음이 상한다.

2018년 1월18일

하루 종일 아랫배가 욱신욱신 싸하게 아프다. 마치 생리통 심한 날처럼.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도 높은 생리통과 배란통을 겪어왔지만, 지금은 내 처지가 다르다. 생리통에는 치사량에 버금가는 양의 진통제를 먹었고, 진통제로도 해결이 안되던 배란통은 피임약을 먹으면서 통증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서럽게 울면서 별 수 없이 통증을 감당할 뿐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이 단지 임신 때문이라니. 괴롭지만 달리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정신이 나갈 것 같다. 기력은 떨어지고, 감정은 우울하고, 속은 울렁거리는데, 입덧을 달래려고 음식을 먹으면 위가 아프다. 이렇게 힘들면 앞으로 9개월은 어떻다는 거지. 임신 중의 내 고통이 얼마만큼인지, 내 감정이 어떤지 계속 기록해야겠다.

2018년 1월19일

남편은 며칠 째 출장 중이고, 나는 어젯밤 꿈에서 남편과 섹스를 하다가 배가 너무 아파 잠에서 깼다. 자궁이 혼자 설레발 치고 수축했나보다. 뭐야, 나 앞으로 9개월 동안 섹스도 못 해? 섹스로 시작된 임신이 결국 섹스의 무덤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몸소 겪고 있다. 임신호르몬 때문에 생전 없었던 야한 꿈들을 종종 꾸고 있지만, 초기임산부에게 자위와 섹스는 곧 자궁 수축이고, 자궁 수축은 쾌감이 아니라 극한 통증이다.

회사 가는 출근버스를 탔는데 영 울렁거려서 챙겨 온 두유를 꺼내 조용히 빨대를 꽂았다. 이걸 지금 먹어 버리면 회사에선 어쩐담. 입덧생존음식인 두유 없이 출근하려니 스마트폰을 집에 놓고 외출 나온 기분이다.

2018년 1월20일

드디어 주말이다.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오픈 시간에 맞춰 병원에 다녀왔다. 주말 늦잠은 사치다. 주말의 산부인과는 전쟁터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어도 주차 공간이 없고, 대기시간이 끔찍하다. 출산이 저조하다고 온 국가가 난리인데, 관계 당국은 의료 인프라 확충에는 관심이 없나 보다.

2018년 1월22일

웬일로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 있어서 앉았다. 임신 사실이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데 임산부임을 나타낼 수 있는 배지도 없어서 불안하다. 사람들이 눈으로 욕하는 것 같다. 아저씨들은 잘만 앉아 있던데 말이다.

지하철역 안내데스크에 가면 임산부 배지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내리는 길에 들렀다. 역무원에게 문의를 하니 배지를 따로 구청에서 받아 오는 게 아니라서 현재 역내에는 보유하고 있는 배지가 없단다. 환승역에 내려 다시 한 번 도전했다. 안내데스크를 찾아 임산부 배지를 받을 수 있냐고 문의했더니 "여기서 그런 걸 주나요?" 하고 내게 되묻는다. 역마다 보유량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하니, 돌아가서 여기 저기 전화로 알아 보고는 다 나눠줘서 없어진 지 오래란다. 입덧 때문에 한걸음 한걸음이 힘겨운데 이번에도 헛걸음이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하차역에서도 고객지원센터를 찾아 임산부 배지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서울교통공사(서울메트로)에는 있을 수도 있는데, 코레일에는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초기임산부가 임산부석을 이용하고 싶으면 임산부 배지를 들고 다니면서 임산부임을 스스로 증명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건소에서 임산부 배지를 받을 수 있지만 직장인인 나는 평일에 보건소를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할 수 있는 걸까? 임산부 배지 얻기도 이렇게 힘들다. 혹시라도 어딘가에선 받을 수 있을까 싶어, 무거운 산모수첩을 계속 들고 다닌다.

자궁을 가지고 태어난 여성이라면 임신과 출산이 숙명이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한국에서 여성으로 30년을 살았음에도 그것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이 세세한 고통과 비참을 왜 내게 아무도 안 알려줬을까. 임신과 출산을 겪은 여성들에겐 말할 곳이 없었고, 나는 들을 곳이 없었던 게 아닐까? 임신 과정과 임신기의 실상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평생을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 당하며 살아왔지만, 내 자궁에서 무언가 생기고 커 가는 일이 이 정도로 끔찍할 줄은 몰랐다. 임신호르몬의 노예가 되기 이전에 임신 확인을 기다리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정신이 너덜너덜해진다. 

엄마는 임신 후 힘들어하는 내게 "유난 떨지 마라"고 했다. 엄마라면 모두가 겪은 일이라고. 도무지 이래선 안 되겠다. 엄마 말을 듣고서는 더 크게 소리 내고 유난 떨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더 이상 여성 개인의 몫이어선 안 된다. 이 안에 숨겨진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지. 아주 풍성한 비밀정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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