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다시 줍는 시 1 -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그녀가 일어났다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돌았다

일어선 그녀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나는 온종일 그녀를 바라보며 맴돌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운 5월의 피렌체 공항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흰 벽에 기대어 선 그녀의 목걸이는 빛나고

또 다른 사랑을 위하여

그녀의 목걸이는 이륙을 준비한다

피레네 산맥을 자동차로 넘어온 나 또한

다음 차례로 지상을 떠나지만, 묻지 않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돌았다

일어선 그녀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나는 맴도는 그녀를 바라보며 온종일

맴돌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구름은 내게

내 사랑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 박상순,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Love Adagio』, 민음사, 2004, 32-33쪽.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렸다.>

2017년의 다이어리 첫 번째 장에는 한 해의 다짐이 호기롭게 적혀 있다. “1. 휘둘리지 말자. 2. 당황해도 침착하게!” 달이 넘어갈 때마다, 혹시나 잊을까 하여 1월의 페이지로 넘어가 다짐들을 가슴 속에 새기곤 했다. 그러나 올 한 해는 기록할 만큼 타인에 휘둘렸고 마음 운영에 실패했다. 적어도 지난 날들엔 연인과 와장창 깨졌다면 친구들의 곁에 따스히, 친구들과 돌아섰다면 연인의 품 안에 고요히, 있을 수 있었다. 2017년이 서글픈 이유는 연인 관계와 친구 관계 모두 망했기 때문이다. 부모와의 유대가 약하고 스승과의 유대는 애저녁에 말아먹은 나로서는 연인과 친구가 그나마 남은 소중한 관계였는데… 안타깝게도 올해는 그야말로, 망했다.

좋아하는 영화 <꿈의 제인>(2017)에는 가출 청소년 소현이 등장한다. 그에게는 공동체와 친구가 절실하다. 함께 모텔방에서 살던 정호 오빠가 떠나고 난 후, 소현은 뉴월드의 제인언니에게 새로운 팸의 지수언니에게 마음을 기대고자 한다. 그러나 제인언니도 지수언니도 잃어버리고 만 후, 소현은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법을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사람들 곁에 같이 있을 수 있는지.

소현의 저 말을, 무척 지친 날들에 혼자 입으로 꺼내고 다시 마음으로 집어넣고 다시금 입으로 꺼내곤 했다. 반복 끝에 소현의 말은 나의 말이 되었으며, 삶의 일부가 되었다.

“방법을 모르겠어.” 라는 말을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나의 경우 애초에 방법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과거에 내가 관계를 맺고 유지하던 방식이, 현재의 내가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한 방식이라는 점에 있다. 과거에 나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마음껏 퍼주면서 그들 곁에 있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온갖 사건들을 겪어냈으며, 그 때문에 힘들었지만 관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퍼줘도 언제나 양껏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사랑을 많이 잃어버렸다. 첫 번째 이유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마음이 좁아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양껏 사랑을 퍼주던 관계 몇몇이 실패하면서 그로 인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가진 게 없으면 줄 수 있는 게 없다. 마음의 가난이란 쉽게 형편이 나아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니까 더 빠르고 깊이 가난해진다. 원치 않는 것이기에 마음의 가난은 서럽고 불가피하고, 그래서 또 서러운 일이다. 내 마음의 상태를 깨닫고 나서, 더 이상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지 않을 것이며 지금 가진 관계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노력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삶의 국면이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무척 겁이 났다. 이미 내게 ‘관계’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로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책임

내게 관계가 책임으로 자리하면서, 나는 내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응답하였다. 물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계들 역시 책임지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상황은 팍팍해져만 가고, 그들이 가진 우울증 역시 심해져만 갔다. 나중엔 어떻게 공감하고 위로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을 펴면 쥐고 있는 것들이 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소통이 불가능한 관계라는 판단이 들면 그들과의 관계를 포기하고 싶어 졌는데, 혹시 내가 포기하면 그가 삶을 포기할까봐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다. 내가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어긋나고, 그 어긋남의 정도가 점점 더 벌어졌다. 이 경우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모르겠어서 일단은 버티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솜솜

그리고 새롭게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에 나는 신나게 휘둘렸다. 분명히 마음에 벽을 세우고 나아가 두꺼운 철문을 쿵하고 닫아 놓았는데, 사람들이 다가왔다. 슬쩍 다가와 말갛고 예쁜 얼굴로 건네는 신년맞이 엽서나, 매일 같이 밥은 먹었는지 오후엔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 카카오톡 메시지. 닫힌 마음 곁에 와 가만히 선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에서 무언가 허물어져 내렸다. 나는 그들을 친구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친구가 되었다. 쳐다보는 뜨거운 눈빛과 아직도 귓가에 있는 목소리,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 그런 매혹을, 그 불가피한 감정을, 사랑 말고 다른 이름으로 뭐라고 호명하는지를 몰랐다. 그렇게 올해는 새 친구와 새 애인이 인생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첫 문단부터 밝혔듯이 난 새 친구, 새 애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내지 못했다. 새 친구들에게는 앞으로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보자는 믿음을 못 줬다, 사실 지금도 가끔 도망칠 궁리를 한다. 새 애인은 멀리멀리 떠나버렸다. 아직도 좋아하지만 그건 내 마음일 뿐이다.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관계를 잘 해내는 것은 불가능한데, 가난한 마음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사건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시인 박상수의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 라는 시는 마음에 들이닥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가 일어났다/내 의자를 넘어뜨렸다./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돌았다” 내가 마음이 가난하건 풍요롭건, 그녀는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게 내 의자를 넘어뜨린다, 그리고 나는 온종일 넘어진 의자를 맴돈다.

왜 의자가 넘어지고 난리람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할 때면, 문득 문득 이 시 생각이 났다. 그럴 때면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왜 의자가 넘어지고 난리야! 하면서 말이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온전하게 지켜지고 내 삶이 조금은 더 안정될 것 같아서. 그런데 누군가 불쑥 의자를 넘어뜨리고, 그러면 나는 기필코 그 의자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넘어진 마음을 수습하기도 전에 나의 그녀는 뻔뻔한 얼굴로 큰 목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일어선 그녀는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다”, “나는 온종일 그녀를 바라보며 맴돌고 있었다” 다가온 그녀 때문에 내가 내 마음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리내기 시작한 그녀 때문에, 나는 내 마음이 아니라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움직이게 된 것이다. 그녀가 내 존재와 내 삶의 결들을 읽어주는 목소리를, 나는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 시점을 넘어오면서, 그러니까 아마 밥벌이를 하고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일들을 수행해 나가고자 노력하면서,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른이 되면 의자가 넘어져도 의자를 맴돌지 않을 줄 알았다, 의자를 일으켜 세울 줄 알았다. 그녀가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들을 소리 내어 읽어도 그녀를 중심으로 맴돌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를 외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완전히 어리석었다. 내가 생각한 어른이란 자기 안에 중심을 가진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나 중심이 생겼다고 타인의 호명에 외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 중심을 가지고, 너라는 중심을 바탕으로 맴도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올 해 알게 되었다.

문제는 관계가 시작되면 그녀가 내 의자를 넘어뜨리는 사건 뿐 아니라, 그녀가 내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큰 소리로 읽어주는 사건 뿐 아니라, 그녀가 나를 두고 떠나는 사건 역시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은 누군가와 온전하고 매끈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도는 사건은 벌어지기 힘든 것 같다. 보다 닥쳐오는 사건들에 얻어맞을 일들만 잔뜩 생겨난다. 내가 가난한 마음을 힘들게 끌어안고 너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벽을 세우려던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나는 이 모든 사건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런데 자꾸 사건들이 일어난다.

가난한 마음

사는 게 힘들어서 사람한테 상처받아서,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 때문에 그 마음이 또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시는 “휘둘리지 말자. 당황해도 침착하게!” 따위의 신년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휘둘림을 즐길 맷집은 또 없어서,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 중이다. 내 가슴 속에서 도는 지구를 가만히 느끼면서 말이다. 시인 박상순의 시편을 고른, 덧붙이고 싶은 이유가 있다. 내게 그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언제나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여자와 여자 간의 관계, 사랑으로 감각하면서 읽었고 이 글을 썼다. 나는 그의 시가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자유를 주는 것 같아서 좋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누구인지, 누구와 관계를 사랑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마지막 연은 다르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내 가슴 속에서 지구는 돌고/구름은 내게/내 사랑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2017.12.27 18:37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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