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만든 여자 7. 충실한 삶의 뿌리 : 메리 대칫

알다여성 주인공

여자가 만든 여자 7. 충실한 삶의 뿌리 : 메리 대칫

꽈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밤과 낮>은 다른 버지니아 울프의 저작들과는 다소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다. 구혼소설의 성격을 갖고 있는 이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아류라며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러한 평가가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태작이라는 비난과는 달리 전통적인 기존 체제와 맞닥뜨리는 여성 주인공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여성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깊이 탐구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2017년 아카넷에서 출간되었다.

줄거리

캐서린 힐버리는 문장으로 이름난 명문가의 외동딸로 열렬히 구혼하는 사실상의 약혼자가 있지만 본인의 마음은 심드렁할 따름이다. 어느 날 메리 대칫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랠프 데넘은 캐서린에게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윌리엄 로드니와 약혼한 사이라고 믿고 단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여성 참정권 운동 사무실에서 일하는 메리는 랠프를 사랑하나 캐서린에 대한 랠프의 마음을 눈치챈 뒤로는 마음을 접는다. 캐서린이 무감하게 윌리엄과 약혼한 뒤 공교롭게도 윌리엄은 캐서린의 사촌인 카산드라와 사랑에 빠진다. 메리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랠프는 뒤늦게 메리에게 청혼하지만 메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마침내 캐서린도 랠프를 사랑하게 되어 캐서린과 랠프, 윌리엄과 카산드라는 연인이 되고 메리는 간사 일자리를 얻어 자신의 일이 있는 삶을 꾸려 나간다.

삶에 충실한 여자

메리는 랠프를 사랑한다. 랠프의 방문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하고, 랠프의 남자답게 편협하고 자신감 넘치는 말에 휘둘리고, 기대와는 다른 랠프의 반응에 실망한다. 그러나 랠프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메리는 랠프에게 성의를 다한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랠프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순수한 호의에서 자신의 고향집에서 머물 것을 제안하고, 조언을 구하는 요청에는 진심으로 랠프의 입장에서 고민해본다. 모든 순간을 메리는 성의껏 대한다. 랠프이기 때문이 아니라, 메리가 본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랠프를 대하는 데에는 메리 특유의 충실함에 랠프에 대한 사랑이 더해졌을 뿐이다. 매사 충실히 성의를 다하는 사람이 바로 메리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메리의 비범함은 여자에게 투표권이 필요할까를 사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해보는 수준이었던 당시 사회상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면에 나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메리는 행동하는 사람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메리는 아직 본인이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삶을 밀고 나갈 역량이 충분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자질은 바로 메리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순간도 허투루 하지 않는 성실함에서 나온다. 사람의 행동은 사람 자체이다. 사랑에도 자신에도 충실한 메리는 즉, 삶에 충실한 사람이다.

이를 받쳐주는 행동력

평범함 사람이라면 여간해선 갖기 어려운 메리의 단호함과 자존감은 자신에게 충실한 메리로서는 당연한 것이다. 메리의 이 특별한 장점은 랠프를 대하는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그 사실을 알고 애써 마음을 접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 사람이 자신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그 청혼을 단칼에 거절한다?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한다는 사실에 눈물 지으며 마음을 거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메리를 남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뒤에 이어진 랠프의 청혼을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인 양 감복하며 매달리지 않고 잘라냈다는 점이다. 메리는 랠프가 자신을 사랑해서 청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메리는 자신이 랠프에게서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보다 메리는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에 매여 지옥으로 걸어들어가지 않고 이를 악물고 떨쳐낼 줄 알았다. 현명함에 그 현명함을 따를 수 있는 행동력까지 갖춘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삶을 허비하는 법이 없는 메리는 시기하느라 자신을 쫓기게 두지 않는다. 다만 언제나처럼 충실히 슬퍼하고 성의껏 할 바를 다 한다. 예의를 차리며 타들어가는 속내를 감추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나 사랑의 기쁨에 도취되어 흥분하고 실연에 좌절하는 일은 상충하는 일이 아니다. 슬프지 않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슬프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메리는 다른 모든 것에 그러하듯 자신에게도 성의를 다한다. 슬픔을 듣고, 위로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나의 삶에
오롯이 귀를 기울여라

메리는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자신의 삶을 무엇으로 만들어 나갈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캐서린이 아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등 자신의 삶에 대해 탐구하는 지점에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랠프가 이상적으로 그리는 삶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바뀌며 언제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과도 대조적이다. 환상을 좇느라 눈 앞에 나타난 현실 앞에서는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꿔버리는 윌리엄과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메리는 랠프를 사랑하지만 랠프에게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고, 랠프와의 결혼을 꿈꾸던 시절에도 랠프를 내조하는 모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의 일을 해나가며 삶을 공유하는 것을 꿈꾸었다.

줄곧 메리가 바라던 것은 스스로가 일구는 삶이었다. 랠프에 대한 사랑도 캐서린과의 우정도 메리에게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덤일 뿐이다. 메리의 삶의 기둥은 메리이기 때문이다. 그간 살아오며 충실히 자신을 들어준 덕에 메리는 캐서린과 달리 소모적인 공상에 빠지지 않았고 랠프처럼 호기롭게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었으며 윌리엄처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착각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나를 성의껏 듣고 나에게 충실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알았다. 메리에게는 충실함으로 이루어진 뿌리가 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자신의 일이 있다. 메리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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