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만든 여자 2. 사라진 여자의 여자 : 아파르나

알다여성 주인공

여자가 만든 여자 2. 사라진 여자의 여자 : 아파르나

꽈리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반다나 싱은 현세대 가장 주목받는 SF작가이자 한국에서는 흔히 접하기 어려운 인도 여성 작가이다. 이론물리학자이기도 한 반다나 싱은 작품활동과 함께 물리학 및 지구과학 교수로 재직 중이기도 하다. 일찍이 인도에서 시작된 여성주의 환경운동인 칩코 운동을 통해 페미니즘에 눈을 떴다. <다락방>은 2002년 잡지 <폴리포니>에 실려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오르게 한 작품이다. 한국에는 2018년 아작에서 출간된 단편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에 마지막 작품으로 담겨 있다.

줄거리

델리에 사는 소녀 우르밀라는 우기가 시작되고 첫 비가 오던 날 다락방에 세를 들기 위해 찾아온 아파르나가 골목 어귀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저 여자가 모든 것을 바꿀 것이라는 묘한 예감에 휩싸인다. 우르밀라는 아파르나가 마법을 부려 답답한 일상을 바꿔놓길 바라지만 아파르나는 조각가일 뿐이다. 남동생 솜나스가 어느샌가 아파르나와 친해지며 우르밀라는 솜나스가 한동안 주변에 둘러 놓았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어쩐지 경쾌해진 것을 깨닫는다. 우르밀라는 솜나스와 아파르나의 다락방에 찾아가기 시작한다. 아파르나가 자매처럼 자란 레누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조각가였음에도 남편인 바르다만 미트라 때문에 조각을 그만둔 것에 분노한다는 것을 우르밀라와 솜나스가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누카는 자살한다. 며칠 뒤 바르다만 미트라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살해되고 아파르나는 떠난다. 아파르나의 뒤를 쫓은 우르밀라는 아파르나가 진흙으로 녹아드는 것을 목격한다. 우르밀라의 세계가 변한다.

사라진 여자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번뜩이는 재능을 결혼과 함께 사장해버렸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다방면의 눈부신 걸작을 코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을까. 좋은 아내의 자리가 그이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인양 스스로를 속였을까. 감쪽같이 속지 못한 얼마나 되는 여자들이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수십 번 수백 번 바닥을 향해 뛰어내렸을까. 그렇게 사라진 여자가 몇이나 될까. 헤아릴 수 있을까.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다락방의 아파르나는 솜나스에게 조각을 선물한다. 우르밀라에게도 선물한다. 아파르나가 만들고 건넨 것은 모두 선물이었다. 아파르나는 솜나스의 체스 세계로 들어가 솜나스가 세우고 있던 날을 가라앉혀준다. 우르밀라가 모르는 세계의 한 겹도 열어준다. 부드럽고 상냥하게 진흙을 매만지며 아파르나는 두 아이들에게 듣는 법을, 진흙이 무엇이 될지 꿰뚫어보는 법을 전해준다. 여기까지는 친절한 셋방의 언니, 어린 날 따뜻한 추억 속 그리운 사람으로 무난히 남을 법하다. 그러나 아파르나에게는 레누카가 있었다. 아파르나가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떠날 수 밖에 없는” 먼 곳에서 델리까지 오게 만든 레누카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결혼으로, 종국에는 죽음으로. 아파르나는 비통함에 가득찬 비명을 내지른다. 레누카는 두번에 걸쳐 사라진 것이다. 친자매나 다름없던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 우르밀라와 솜나스에게 단순히 신비롭고 포근한 기억으로 가라앉았을 아파르나도 사라진다. 남은 것은 일찍이 우르밀라가 예감했듯이 모든 것을 바꿀 한 여자다. 곧 진흙으로 사라질.

애써 만든 조각들을 잡히는대로 벽에 집어던지면서 아파르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통과 상실감 속에서 힘껏 내던져 깨버리고 싶었던 것은 그토록 찬란한 재능에도 뒤로 물러나는 데 만족한다고 말해버린 레누카였을까, 살아움직이는 듯한 조각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뮤즈로 박제하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바르다만 미트라였을까, 레누카가 휩쓸린 부당함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도망나온 아파르나 자신이었을까. 셋 모두를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할 생각도 하지 못하게끔 붙박아둔 긴 세월의 세상 전부였을까.

마지막 조각

아파르나는 따지자면 사라진 여자가 아니다. 사라지던 여자 곁의 여자다. 살아있고 스스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주변의 다른 이까지도 삶으로 끌어들이는 여자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한 여자다. 아파르나는 말하자면 주변인이다. 당사자가 아닌 아파르나는 소중한 친구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그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 사라지고 있던 레누카에게서 아파르나는 사라졌다. 이윽고 레누카가 사라지자 머지 않아 아파르나도 사라진다. 아파르나 또한 두번에 걸쳐 사라진 것이다. 아파르나와 레누카는 어떻게 따져도 사라진 여자다. 헤아릴 수 있다.

바르다만 미트라를 살해한 것은 어쩌면 레누카였을지 모른다. 레누카가 사라지면서 남긴 아파르나는 레누카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것은 조용히 남편 뒤에 묻혀 있다 사라지는 수밖에 없었던 모든 여자들이기도 하다.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자가 남는다.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사라지던 여자 곁의 여자는 자연히 남은 여자가 된다. 여자와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벽은 숱하게 허물어져 서로 녹아들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셈법으로 사라진 여자는 언제나 하나다. 남은 여자만이 헤아릴 수 있다. 무수히 진흙이 된 아파르나 이전의 여자들은 레누카이면서 아파르나이고 또 이제는 우르밀라가 된다. 바르다만 미트라는 죽으면서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헤아릴 수 없다. 남자는 스스로를 사장할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이게 내 마지막 조각이야.” 

아파르나는 중얼거렸다. 아파르나가 녹아버린 뒤에, 축복하듯 내리는 비 속에서, 우르밀라는 마침내 이해했다. 아파르나의 마지막 조각이 된 우르밀라는 아파르나가 사라진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일종의 흥분에 가까운, “자기 안에 번지는 가벼움”을 느꼈다. 우르밀라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우르밀라는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르밀라는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우르밀라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기가 가져다준, “세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벽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신이 아니라 세상에서 구현되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르밀라는 남편에게 묻힌 레누카도 진흙에 묻힌 아파르나도 아닐 수 있을 것이다.

우르밀라의 세상은 이제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라진 여자는 어쩌면, 사라지지 않은 여자를 남길 수 있을지 모른다. 아파르나는 더러운 손으로 그렇게 진흙을 빚었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다른 여자를 남기려고 애썼을까. 얼마나 많은 여자가 남은 여자가 사라지지 않도록 세상의 가능성을 매만졌을까. 헤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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