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일곱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그레첸

알다뮤지컬여성 주인공

2019년 일곱째 주, 뮤지컬 속 여성 : 그레첸

이응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뮤지컬 <더데빌>

초연 2014년 두산아트센터 
공연 2018년 11월7일~2019년 3월17일
대본/연출 이지나
작곡 Woody Pak, 이지혜,
작사 이지나, 이지혜, Woody PaK

 

<파우스트>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 연극, 뮤지컬,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괴테의 깊은 속을 누가 알리오. 마지막에 신이 나타나 노력하는 영혼은 구원 받을 수 있다며 파우스트를 천국으로 들어 올리는 장면에서는 내가 이 장면 보자고 이 길고 지루한 페이지를 넘겼나, 억울한 마음마저 살짝 들기도 했다. 그의 거룩한 승천이 마치 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여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영화 <콘스탄틴>의 주인공 콘스탄틴이 악마에게 그랬듯이. 

뮤지컬 <더데빌>은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기 보다는 <콘스탄틴>이나 <데블스 에드버킷>같은 파우스트를 기반으로 한 '악마의 유혹'에 관한 창작물들에 파우스트의 모티브를 살짝 얹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파우스트> 이후 토마스 만의 <닥터 파우스트>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악마들이 세상의 남자들을 유혹해 왔던가. 참 이상하지 않은가. 악마의 유혹은 늘 남성에게만 미치고, 그 미끼는 늘 여성이며, 구원의 발판도 여성이다. 그런데 늘 그 여성들의 궁극의 희생, 즉 죽음만이 악마와의 거래를 무산시키는 열쇠가 된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그러하다. 

그 중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레첸은 단연 최악의 케이스들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 하다. 그러므로 뮤지컬 <더데빌>을 너무나 좋아한다면, 여기서 '뒤로 돌아가기'를 누르기를 권한다. 이 글은 <더데빌>이라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이 작품의 여주인공 그레첸을 분석하는 글이다. 뮤지컬 <더데빌>은 2018년에 세번째 공연을 올리면서 X를 블랙과 화이트로 나누고, 이 블랙 X와 화이트 X에 젠더프리 캐스팅을 했다며 공공연하게 홍보해 왔다. 그런데 막상 이 공연을 보고 나니 젠더프리 캐스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들어오는 것은 무지막지하게 갈려나가는 그레첸이라는 인물이었다.

줄거리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유망한 금융맨인 존 파우스트에게는 착한 사람 그레첸이라는 연인이 있다. 이들이 등장하기도 전에, 악마와 신인 듯한 블랙 X와 화이트 X가 나타나 존 파우스트의 영혼을 걸고 내기를 한다. 사실 이들의 내기 장면은 괴테의 파우스트보다는 욥기의 신과 루시퍼의 내기 장면을 연상케 한다. 욥과 존의 차이점이라면 욥은 자식들과 재산을 다 잃고 건강마저 잃어도 신을 저주하지 않았는데, 존은 아주 쉽게 타락했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주식시장이 무너지며 사업이 망하게 생기자 왜 신이 자신을 시험하는지 원망하던 존은 X의 편지를 받는다. 누가 받아도 미친놈이 보냈다고 생각해 마땅한 내용이지만 존은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변질된다면 존의 행운도 끝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그 소중한 존재가 그레첸이라는 사실을 존도 그레첸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성공을 원하는 것은 존인데 걸린 것은 그레첸의 영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세계관은 부두교를 바탕으로 하는가? 부두교에서는 타인의 목숨을 없애달라고 신에게 빌 경우,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군가의 목숨을 신이 수거해 가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자신이 정할 수 없다. 그런데 <더데빌>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인 작품이다. 심지어는 선교용인가 싶을 정도로 성경 구절이 잔뜩 나온다. 실존인물로 추정되는 닥터 요한네스 게오르그 파우스트도, 괴테의 파우스트도 타인의 영혼을 걸고 자신의 젊음을 사거나 성공을 사지 않는다. 오직 이 작품만이 그레첸의 영혼을 건다. 심지어 그레첸이 그 사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후 빚과 어둠인지, 신과 악마인지, 내면의 갈등인지, 셋 다인지 하는 존재인 X가 존 파우스트에게 돈을 물어다 주는 동안 그레첸은 미쳐간다. 악마를 보았다고 소리 지르다 그레첸은 결국 ‘변질’된다. 이제 빛, 혹은 신 혹은 내면의 선함을 총으로 쏴 죽여야만 그레첸을 구할 수 있다는 악마의 마지막 유혹 앞에서 존 파우스트는 자신의 머리를 쏘면서 구원받는다. 죽은 줄 알았던 그레첸이 돌아오고 패한 줄 알았던 빛 혹은 신, 아무튼 그가 이긴다.

연인을 위하여 영혼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레첸이 없다면 이 뮤지컬은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 존 파우스트를 위해 영혼을 걸어줄 단 한 명의 인간이니까. 그러나 그레첸에게는 선택권 같은 것은 없고, 그레첸이 없어도 파우스트는 그 자신의 영혼으로 내기를 할 수 있으며, 파우스트의 자살이 그를 구원할 수도 있다. 괴테가 쓴 작품에서 그레첸의 영혼을 신이 구원했듯이. 그렇다면 그레첸은 <더데빌>에서 무슨 존재일까?

우선 그레첸은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무대에 꾸준히 등장하는 그레첸 이외의 여성 캐릭터는 존 파우스트를 타락시키는 전형적인 '창녀' 역할을 잠시 맡는 앙상블이 있다. '성녀'인 그레첸과 이 앙상블은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나눈다 해도 결국은 존 파우스트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그레첸은 입을 열 때마다 성경구절 아니면 존 생각 뿐이기 때문이다. 

캐스팅에 따라서는 무대 위에 블랙 X 또는 화이트 X가 여성 캐릭터일 수 있다. 이 역할이 젠더프리 캐스팅이었고, 여성 배우 딱 한 명이 공연기간을 둘로 나눠 번갈아 블랙 X, 화이트 X를 맡았다. 하지만 엑스를 혹여 여성 배역이 맡는다 하더라도, 그레첸과 X 사이의 대화는 전무하다. 그레첸의 대사는 성경구절이거나 존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다. 

운명

다른 이와의 관계를 통한 것이 아닌 인물 스스로의 운명이 있는가? 그 운명을 따르거나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가?
NO

그레첸의 운명은 뭘까? 존 파우스트를 위해 영혼을 내놓았다가 존 파우스트의 자기희생으로 기사회생 하는 것? 존 파우스트에게는 존이라는 이름과 그 유명한 파우스트라는 성이 있지만 그레첸은 그레첸일 뿐이다. 성조차 없다. 그레첸을 그렇게나 굴리면서도 그레첸에는 성조차 만들어 주지 않았다. 성도 없는 그레첸의 목표는 파우스트의 행복뿐이다. 하지만 그 행복이 꼭 금전적인 것만은 아닐진대, 그레첸은 처음 파우스트가 금융권의 몰락으로 고통받을 때 누구보다 먼저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 곳을 함께 벗어나자는 제안 한 마디 하지 않는다. 

심지어 존 파우스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자신을 걸 때조차도 그레첸은 이의제기 한 마디 없다. 아니, 세상에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타인을 담보로 내놓는 거래가 어떻게 성립한단 말인가. 심지어 처음에 빛과 어둠조차도 그레첸이 아니라 파우스트의 영혼을 놓고 내기를 걸 건만. ‘소중한 존재’ 그레첸의 영혼은 어째서 어둠으로 끌려가야 한단 말인가.

목표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NO

그레첸을 처음 소개할 때 존 파우스트는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착한 사람이 뭐가 나쁜가. 이 세상의 사람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수박 쪼개듯 나눌 수만 있다면, 인간은 가능하다면 선한 사람 쪽이라는 평을 듣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레첸의 선함은 단 한 가지만으로 증명된다. 파우스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하지만 파우스트는 마약과 여자라는 단순한 쾌락을 즐기기 위해 그 많은 더러운 짓에 손을 담근다. 그 전에는 돈이 그만큼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냥 멕시코의 마약왕 중 한 명을 선택했어도 되었을 인물이다. 도대체 이 인물의 어디가 그렇게 영혼까지 바쳐서 지켜줘야 할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회사가 망하게 된 남자 옆에서 시편의 구절을 외우는 연인을 어떻게 봐야 할지 무섭기조차 하다. 그레첸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언어는 광신도 같은 성경구절이거나, 존 파우스트에게 악마와 손을 끊으라고 하는 말뿐이다. 심지어 이들의 사랑 노래 이중창은 상대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노래다. 물론 그런 생각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그레첸이고, 파우스트는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초개처럼 그레첸을 배신한다. 

그레첸에게 자신만의 목표나 신념이 있는가? 괴테의 그레첸에게는 자신만의 도덕관과 자신만의 인생이 있었다. 이에 반하는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광기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도대체 이 작품 속의 그레첸에게 무엇이 있는가? 관객은 그레첸이 누구인지도 알기 전에 그레첸의 존 파우스트에 대한 무지막지한 집착만을 본다. 그리고 그레첸은 그 때문에 내내 고통받으면서도 벗어날 궁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큰 돈을 벌고 성공을 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자유를 누릴 때,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건 그레첸은 맘 편히 잠 한 숨 못 잔다. 그래도 끝까지 악마 탓만 하는 사람, 그레첸이다.

일관성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는가?
NO

이 대답에 Yes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플롯과 이 작품의 캐릭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레첸을 설명하자면, 존 파우스트를 사랑하고 그에게 집착하는 여성이다. 때로는 존 파우스트의 양심의 소리 역할도 한다. 하지만 이 인물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첫 장면과 커튼콜을 제외하면 잠옷과 가운만 입고 무대를 서성이며 비명을 지르고 고통을 받으며 파우스트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짊어질 뿐,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레첸은 아주 수동적인 노예 같은 여성인가? 

이 작품에서 그레첸은 그저 순수한 선의 상징으로서만 존재하는데, 그 상징이 오로지 (또 반복하기도 지치지만) 파우스트라는 남자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으로서만 증명될 뿐이다. 이 캐릭터가 존재하는 이유는 붕괴 당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그레첸이 없어도 파우스트의 고뇌는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업에 실패한 남자가 X의 불순한 도움으로 재기했다가 자살하면 그만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이민

그레첸은 붕괴되기 위해, 소모되기 위해, 무대에 올려진다. 이보다 더 수동적인 인물도 드물다. 플롯에 의해 캐릭터가 붕괴되는 인물이 아니라 붕괴 그 자체가 목적인 인물이다. 미친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자살이라는 자기 희생으로 인해 제정신인 그레첸이 되어 파우스트에게 상으로 주어진다. 영화 <콘스탄틴>에서 냉소적으로 다루었던 ‘자기 희생’이 여기서는 그토록 숭고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보상이 정신 멀쩡한 그레첸이라니.

결정

연애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는가?
NO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인물이다.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성경에의 집착 뿐. 차라리 존 파우스트를 어서 버리고 그 신실한 신앙심으로 종교에라도 귀의했으면 어땠을까.

발전

플롯 속에서 변화나 발전을 이루는가?
NO

그레첸이 무슨 발전을 이루겠는가. 순진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남자 주인공만 바라보다, 미쳤다가, 어둠에게 바쳐졌다가, 파우스트 덕에 다시 돌아오는 인간인 것을. 이 작품 속에서 두 엑스들과 존 파우스트는 그레첸을 나의 누이, 나의 아내라고 거듭 거듭 부른다. 듣다 보면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아닙니다! 그 여성의 이름은 그레첸이고 당신들의 누이 혹은 아내로 주어지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작품 속의 그레첸은 파멸을 향해 순순히 제발로 걸어 들어간다. 실제로는 파우스트가 떠미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파우스트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타인이 내 영혼에 손대게 둔 자의 말로다.

종합 별점

이 작품이 젠더프리 캐스팅을 실현하는 작품이라며 마치 온전한 여성의 역할이 있는 듯이 광고하는 것은 무리수다. 젠더프리 캐스팅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을. 파우스트라는 인물에게 성공이 왜 어째서 그렇게 중요한지, 그레첸이 왜 존 파우스트에게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작곡가가 작곡하고 연출한 작품에서 이토록 무참하게 소모되는 여성 캐릭터를 보는 심정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참담하다. 기독교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에서 여성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다시금 떠오르게 할 뿐이다. 

이응님의 글은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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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2019년 셋째 주, 오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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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넷째 주,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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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섯째 주, 알렉산드라 오웬스

06

2019년 일곱째 주, 그레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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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아홉째 주, 메리 포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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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열번째 주, 핑크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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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열한번째 주,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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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열네번째 주, 나팔, 혜란,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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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열다섯번째 주, 에바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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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물네번째 주 안나 아르카지예브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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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물여섯번째 주, 테레즈 라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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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물일곱번째 주, 음악극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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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스물여덟번째 주, 기네비어와 모르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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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마흔다섯번째 주, 아드리아나와 엘로이즈

41

2019년 마흔여섯번째 주, 레베카 드 윈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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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마흔일곱번째 주,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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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마지막 주, 암네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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