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충동구매자의 구매 가이드: 남성용 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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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충동구매자의 구매 가이드: 남성용 팬티

라랄라

일러스트레이터: 해일

페미니스트 충동구매자의 구매 가이드는 많이 사고, 많이 영업하고, 많이 후회하는 필자가 직접 써본 아이템들을 대상으로 리뷰하는 시리즈입니다. 다섯 번째 아이템은 남성용 팬티 입니다.


 “여성용 팬티는 불편하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공감할지 잘 모르겠다. 불편도 상대평가할 새로운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데, 풀었을 때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브래지어에 비해 팬티는 오히려 벗으면 찝찝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브래지어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만 개의 불만이 쏟아지고 이에 대한 공감대가 깊게 형성된 반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모양이라니 전 세계적 여혐에 대한 분노가 치민다) 여성용 팬티의 경우 그 공감대가 아직은 미미하다. 게다가 에*필 이든 원*브라든(와*루는 안 입어봤는데 좋다면 제보 바랍니다.) 해외 속옷 브랜드의 팬티 역시 국내 브랜드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많은 여성들이 '진보된 팬티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이 시리즈의 패턴 상 독자님은 ‘진보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팬티가 새로 나왔나 봐!’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건 내가 만들 생각이긴 하지만, 현재의 여성용 팬티 보다 더 진보한 물건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주변에 있었다.

바로 '남성용 팬티'다.

보이기 위한 속옷으로서의 여성용 팬티

인간의 디폴트 값이 남성이므로 '모든' 물건이 남성의 것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평소 경계하는 편이다. 그러나 남성용 팬티의 세계를 경험하고 난 지금은 여성용 팬티와 남성용 팬티가 그 출발선부터 다른 물건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여성용 팬티가 어떻게 불편했는지를 짚어 보자. 트위터의 콧코(@konut_)님이 작성한 아래 이미지는 9k RT를 기록하며 여성들의 공감대를 얻었다.

이 그림을 요약하면 ‘여성용 팬티는 쓸데없는 조임과 장식을 남발하고, 그로 인한 착용자의 불편을 야기한다.’이다. 명백히 심미성이(그것도 어디서 이런 구린 센스를 가지고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착용자의 편의 보다 우선고려되었다. 여성용 팬티의 제작자들은 팬티의 본질이 무엇인지 완전히 망각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셈이다. ‘보이는 것’을 ‘생식기를 보호하는 의복의 기능’보다 우선시 고려하지 않았다면, 레그 홀에 레이스를 붙여 사타구니가 쓸리게 만드는 제품을 만들어 낼 리가 없다.

그러나 나조차도 이런 불편에 대해 크게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 남성용 팬티의 편함을 강하게 주장해 오던 친구 A가 ‘나랑 궁극의 팬티 만드는 사업 같이 하자’며 ‘남성용 팬티 샘플’을 잔뜩 보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실은 받고 나서도 그 편의성에 대한 의구심이 가시지 않았고, 실제로 입었을 때도 즉각적인 해방감이 들기보다는 어색함을 먼저 느꼈다. 그러나 조금 실망했던 것도 잠시, ‘이왕에 받았으니까 입어나 보자!’ 하고 다양한 남성용 팬티를 여성용 팬티와 섞어 3주쯤 입어보았을 때 알게 되었다. 남성용 팬티가 엄청나게 편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용 팬티는 엄청나게 불편하다. 

앞서 여성들의 공감을 받은 불편은 남성용 팬티와 비교했을 때 더 명백히 드러난다.

(*기준이 된 남성용 팬티는 대부분 브리프 형태이다.)

첫째. 남성용 팬티와 여성용 팬티는 겉보기부터 다른데, 남성용 팬티 대비 여성용 팬티의 패턴은 훨씬 더 평면적이다. (친구 A는 ‘여성용 팬티는 아마 100년 동안 패턴 업데이트가 안 됐을걸.’ 하며 신랄히 비판했다.) 물론 남자에 비해 여성은 드러나는 생식기의 부피가 작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면적인 아랫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남성용 팬티를 입으면, 여성용 팬티를 입었을 때 보다 속옷이 훨씬 더 편안히 아랫배를 감싸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어리즘과 형편없는 스포츠브라의 차이 정도.

둘째. 남성용 팬티는 허리 밴딩 외에 쓸 데 없이 조여지거나 살갗이 쓸리는 부분을 최소화해서 만들어진다. 레그 홀이 여성용 보다 넓어 사타구니를 파고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불필요한 소재(레이스, 시스루 등)를 남용하지 않아 촉감에 거슬림이 거의 없다. 남성용 팬티의 레그홀은 여성용보다 넓지만, 적당한 신축성으로 조이지 않고도 허벅지에 착 감긴다. 분비물이 새거나 하는 일은 ‘사고’ 수준으로 흔치 않을 것이다.

셋째. 남성용 팬티는 생식기 접촉면이 넓거나 일체형이다. ‘여성용 브리프’를 입어도 레그 홀 부분의 길이가 늘어날 뿐, 생식기 접촉 부는 여전히 좁은 상태다. 남성용 팬티의 경우 특히 일체형은 생식기 부위를 편안하게 감싸주며, 분비물에 대한 흡수 역시 접촉면이 넓은 만큼 걱정이 없다. 여성의 생식기 분비물 분비가 남성보다 활발함에도 여성용 팬티의 생식기를 감싸는 면적은 남성용 보다 더 좁아 오죽하면 일반 중형 생리대가 생식기 접촉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런 탓에 땀이나 생식기 분비물이 묻었을 때 생식기 접촉면만으로는 그를 흡수하여 커버하지 못하고 분비물이 넘쳐 가장자리 부분까지 침범하기도 하는데, 운이 안 좋을 경우 그 가장자리의 레이스 트리밍이 물에 젖은 밧줄처럼 당신의 사타구니를 파고들 것이다. 나의 경우 사타구니에 땀이 차는 스타일이라 여름철에는 기본적으로 팬티를 하루에 두 장씩 갈아입었지만, 남성 팬티로 갈아탄 이후에는 기록적인 폭염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의 같은 허리 사이즈의 남성용 / 여성용 팬티를 각각 곰인형에게 입혀 보면, 남성용 팬티에 비하여 여성용 팬티가 얼마나 적은 착용 면, 평면적인 패턴, 쓸리는 소재로 이루어져 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같은 허리둘레라면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엉덩이가 발달한 체형임에도 불구,

여성용 팬티 쪽은 접촉면이 좁아 ‘조이는’ 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좁은 접촉면이 당겨져 안 그래도 살갗이 배기는 레그 홀 부분에는 레이스 트리밍까지 되어 있어 더더욱 확실하게 살이 배기게 한다.

결국 남성용 팬티와 여성용 팬티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남성용팬티는 사람의 신체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바닥 만한 접촉면이나 트리밍된 레이스, 불필요하게 사용된 시스루 패턴 등, ‘여성용 팬티’하면 떠오르는 많은 특징들이 불편과 억압을 수반한다. 나는 섹시하고 싶은 날 입는 류의 속옷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킬힐처럼, 선택한 불편이라면 감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침대에 누워 폰으로 웹툰 보며 귤이나 까먹는 무드에 어울리는 디자인의 팬티까지도, 그놈의 ‘레이스 트리밍’, ‘불필요한 조임(특히 레그홀)’, ‘까끌까끌한 시스루 재질’ 중의 하나는 무조건 포함한다. 더욱 화가나는건 이런 악성 요소를 모두 제거한 거의 유일한 여성용 팬티인 ‘심리스’ 제품은 그 본질이 ‘생식기를 보호하는 의복’보다 ‘보이지 않는 속옷’에 더 우선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심리스 팬티 제품은 손으로 찢을 수 있을 만큼 얇고 접촉부가 좁아 말려들어가는 등 속옷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한다. 어쩌면 여성들은 아직 까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릴 때 입고 있기 좋은 속옷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팬티같은 팬티를 입는 기분

아직 시장에 궁극의 팬티가 존재하지 않기에, 이 글을 보고 있는 많은 여성들, 특히 생리통이 심하거나 사타구니를 파고 드는 팬티의 레이스나 바이어스가 지긋지긋한 여성들에게는 대안으로 남성용 팬티를 권하고 싶다. (참고로 브랜드와 마트를 오가며 구매한 결과 유의미한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가장 내밀한 부분에서까지 온전히 여성을 위해 디자인 된 것을 갖지 못하는 기분은 살짝 쓰지만 그 대가로 언제나 내 몸에 밀착되어있는 의복이 ‘생식기를 보호하고 분비물이 새나가는 것을 막는 기능’에만 충실할 때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편하냐고? 글쎄. 거슬림이 없기에 크게 편한 감각도 잘 느끼지 않게 된다. 일종의 안정적인 無감각. 경험을 권한다!

예전에 한 남성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보고 황당함을 넘어 황망함을 느낀 적이 있다, 그는 ‘여성들이 입기에 편한 옷을 만드는 데엔 관심이 없다.’는 돌체앤 가바나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신과 같은 남성 디자이너는 옷을 직접 입어볼 수 없으니 ‘상상’에 기반하여 옷을 만들고, 그만큼 ‘보기에 예쁜’ 것을 밀어 붙여 추구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경쟁력이다.’ 그 디자이너는 본인이 만든 옷을 입고 넘어져 버린 지인의 이야기까지 자랑스레 곁들였다. 

사람과 아름다움의 조화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디자이너의 본질과 거리가 먼 태도를 당당히 드러내는 그의 발언은 어떤 사람들은 여성을 ‘사람’보다 ‘예뻐야 할 존재’로 본다는 유의미한 자백이 된다. 이런 경향이 패션/뷰티 영역을 비롯한 모든 영역 전반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억압해왔다. 다행히도 최근엔 패션계에서도 여성의 몸과 맞지 않는 디자인을 고집하는 디자이너는 도태되고, 여성과 여성의 몸을 실제로 이해하는 디자이너들이 인정받는 흐름이 부상 중이라고 한다. 컬렉션에 자주 등장했던 페미니스트 티셔츠가 완전히 허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속옷에도 ‘안 예쁘고 왕 편함’ ‘예쁘고 편함’ ‘완전 예쁘고 불편함’등의 다양한 선택지가 나올 타이밍이 된 게 아닐까? ‘남자친구가 사주는 속옷’으로 속옷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빅토리아 시크릿처럼, 속옷의 패러다임 다시 되돌려 줄 궁극의 마약 팬티를 기대해본다. 안 나오면 제가 만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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