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7.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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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드웨이를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 37. 에필로그

이응

세상 모든 여성들의 노래

짧게 잡으면 백 년, 길게 보면 150년 남짓인 브로드웨이 쇼의 역사는 처음부터 여성 관객들이 일구어낸 세월이었다. 현재와 같은 브로드웨이 극장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뮤지컬 비즈니스란 유럽발 오페레타, 아니면 한 쪽에선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다른 한 쪽의 어두운 커튼 뒤에서는 창녀들이 몸을 팔았던 뮤직홀이나 버라이어티 공연이었다. 현재 라스베가스 스트립쇼의 원조이기도 한 이런 공연에는 여성들이 관객으로 드나들 수 없었다. 여성들은 객석에 앉을 수도 없었고, 관람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곳에 있는 여성들은 어떤 면으로든 ‘전문가’들이었다. 

이 침침한 사업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자 제작자들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겠다고 결심하고 여성들을 객석으로 끌어들였다. 여성을 대상화 하는 농담이나 장면, 의상이나 매춘을 빼고 그 자리에 화려한 의상과 쇼, 콩트 등을 채워 넣어 ‘보더빌’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이후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객석은 내내 여성들의 것이었다.

객석에 앉은 관객의 2/3가 여성인 만큼 무대 위에는 항상 여성 인물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객석에 앉은 여성들이 투표권을 획득하고 민권운동에 참여하는 동안에도, 무대 위 여성들의 모습은 남성 제작자들과 남성 창작자들이 제시하는 여성상,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이 좋아할 듯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사회상을 대변하는 역할이었고, 허용된 경계 안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디즈니의 '말괄량이' 캐릭터들처럼. 

그런 와중에도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무대 위에 발을 디디고 최전방에 서서 자신의 배역을 사수한 것은 항상 여성 배우들의 역할이었다. 적지 않은 수의 여성 창작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핵심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여성적 글쓰기가 무대 위에서 구현된 것도 매우 최근의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브로드웨이를 이끌어 가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쓰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머리를 발로 차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었다.

길티 플레져?

때로, 아니 굉장히 많은 빈도로 여성 캐릭터는 남성과의 결혼 그 자체만을 목표로 삼는다. 심지어 주인공임에도 남성의 꿈과 목표를 그저 돕기만 하는 인물로 전락하기도 한다.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오래 공연된 여성 원탑 뮤지컬인 <헬로 돌리!>의 주인공 돌리가 대표적이다. 돌리는 그토록 많은 중년 여성 배우들의 꿈의 배역이고 토니상을 몇 번이나 수상한 배역이다. <헬로 돌리!>는 남편을 잃은 과거 상류계급의 여성이 중매쟁이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한 부자 남성이 자신의 딸 뻘인 젊은 여성과의 결혼을 원하며 중매를 맡기자, 자신이 그 남성의 프로포즈를 받아 다시 상류사회로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돌리는 중매쟁이인 자신의 직업을 결코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헬로 돌리!>가 자신의 인생 뮤지컬인 여성들이 세상에는 무수하게 많다. 돌리가 깃털 장식을 꽂고 맨해튼의 유명 식당의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좌충우돌에 계획성이라고는 없고 타인의 중매 상대를 가로채면서도 전혀 이기적으로 보이지 않는 돌리의 캐릭터도 엄청나게 매력적이다. 마치 <사운드 오브 뮤직>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알면서도 그 안에 나오는 모든 노래를 다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뮤지컬은 웅변이나 논문이 아닌 엔터테인먼트이기에 때로는 ‘길티 프레져’가 모범답안보다 더 즐겁다. 뮤지컬만이 아니라 모든 드라마 장르가 다 그렇듯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나름대로의 기준이 생겼다. 여성 캐릭터들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다섯 가지였다. 우선은 백델 지수의 3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골조를 세웠다. 여성에게 이름이 있을 것, 그 여성이 다른 여성 캐릭터와 대화를 나누거나 관계를 맺을 것, 그리고 그 대화의 내용이 남자가 아닐 것. 사실 백델 지수가 제시하는 기준은 드라마 안의 인물이라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들이다. 이 당연한 기준을 여성 캐릭터에게 적용해 보고, 줄거리 안에서 그 캐릭터만의 운명이 있는지, 자신만의 목표나 꿈이 있는지,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얼마나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긍정적이고 주체적인지를 보았다.

브로드웨이에서 한국으로

그 기준을 좀 더 명료하게 정리해 2019년부터는 브로드웨이만이 아니라 뮤지컬 영화와 한국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들, 그리고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까지 여성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영역을 확대해 보려고 한다. 특히 가급적이면 현재 볼 수 있는 뮤지컬이나 뮤지컬 영화를 소개해, 독자들이 직접 무대 위의 여성 캐릭터들을 만나고 독자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때로는 ‘나쁜 페미니스트’처럼, 때로는 교과서처럼, 뮤지컬 속 인물들은 작가들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길을 떠난다. 관객들은 그들을 맞이한다. 관객들의 상상력 속에서 뮤지컬 속 인물들은 또 다른 누군가로 성장해 나간다. 세상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뮤지컬이 있고,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노래들이 있을까? 그 안에서 여성들이 꾸준히 성장해 가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무한한 기쁨을 준다. 한 편으로 그 성장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더디다는 사실이 가끔 가슴을 무겁게 한다. 그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뮤지컬을 이끄는 여성 캐릭터들을 찾는 탐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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