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 생활경제 9. 통장 쪼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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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생활경제 9. 통장 쪼개기

신한슬

송년 모임에 갔다. 이런저런 근황 얘기를 하다가, 나의 내년 목표가 돈 모으기라는 걸 수줍게 밝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기적인 저축 목표를 세웠다는 것도. 지금까지 이런 걸 너무 몰랐다는 고백과 함께. 지인이 맞장구를 치면서 말했다.

저, 통장도 한 개 쓰잖아요.

이건 거의 청약통장 없다는 급의 ‘충격 고백’이다. 모든 재테크나 저축 관련 조언의 1장 1절이 ‘통장을 쪼개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올해 여름에 청약 통장을 만든 사람이니까, 정확히 이 정도 수준의 백지 상태에 너무나 공감이 갔다. 1장 1절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혹은 들어는 봤어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 치고는 의외로(?) 나의 지출 통장은 여러 개로 나눠져 있다. 일단은 그렇다. 급여통장을 바로 생활비 통장으로 몇 년 쓰다 보니, 내가 수중에 있는 돈은 다 써버리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심지어 적금 만기로 돌아온 돈을 예금에 바로 묶을 줄도 몰라서 멍하니 통장에 쌓아 두고 다시 정기적금을 넣기도 했다. 이건 아주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그 돈을 한 통장에 쌓아 두니 여행이며 ‘시발 비용’으로 야금야금 다 빠져나갔다. 적금 부은 기간은 긴데, 모아 놓은 돈은 턱없이 부족한 이유였다. 정말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도 있나 싶겠지만, 있다. 그게 나다.

아무리 감 없는 나라도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생활비 통장을 급여 통장과 분리했다. 하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내 지출 흐름을 파악하거나, 생활비 예산을 제대로 짠 게 아니라서, 돈이 모자라면 바로 또 급여 통장에서 고정비 지출과 적금으로 떼고 난 나머지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두 개를 같은 은행의 입출금 통장으로 만든 게 실책이었다. 모바일로 몇 번만 누르면 금방 돈이 왔다 갔다 했다. 결국 통장을 나누긴 했지만, 그냥 생활비 통장이 두 개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말은 무언가를 정리하고 새 판을 짜기 적합한 시기다. 평생 없었던 저축 목표가 생긴 만큼, 내가 가진 통장을 제대로 정리하고, 필요한 건 새로 만들어서 재테크의 기본이라는 ‘통장 쪼개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통장을 쪼개는 방법은 다양한 재테크 책과 인터넷 정보를 종합했다. 사실 기본 원리는 다 비슷하고 디테일만 조금씩 달랐다.

저축과 고정지출 : 퍼가요

이 세상 어딘가에는 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사람도 존재하겠지? 전 세계 인구가 70억 가까이 된다는데. 확실한 건 나는 아니다. 나는 있으면 쓴다. 쓰기 전에 빼앗아야 한다. 다행히 나 같은 내수활성화의 선두주자를 위해 자동이체라는 좋은 기능이 있다. 나는 급여를 25일에 받기 때문에, 내 정기적금청약저축은 모두 26일에 빠져나간다. 보통 말일이나 1일에 적금을 넣던데, 나는 내 습자지 같은 의지에 6일 간이나 월급을 맡겨 놓을 수가 없다.

급여통장에서 곧바로 빠져나가는 정기적인 지출 중에서 내가 자동이체일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월급 다음날로 맞춰 놓았다. 통신비, 기부금, 보험료 등이다. 이외에도 관리비, 공과금 등은 어차피 내야 되는 돈이니까 급여통장에서 바로 나가는 게 편하다.

이런 고정적인 지출은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실적을 쌓아서 신용등급에도 도움이 되고, 할인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현금이 있어도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신용카드가 생기면 패가망신하겠구나 싶어 20살 이후 단 한 번도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고 오로지 현금 생활만 했다. 그러자 신용등급이 일정 이상으로는 오르지 않는 단점이 있었다. 신용카드를 만들되, 아예 지갑에 넣는 대신 책상 서랍에 넣어 버리고, 대신 관리비, 공과금, 기부금, 통신비만 결제해서 실적을 맞추면 나 같은 마이너스의 손도 건전한 신용카드 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 번 이렇게 마음을 먹은 뒤에도 어떤 신용카드를 선택해야 할 지 몰라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여러 커뮤니티의 정보를 느릿느릿 찾아서 종합해 본 결과, 나처럼 소비가 아니라 고정비용만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는 사람에게는 현대 하이마트Mobile M Edition2(통신할인형)이 가장 좋다. 이 카드로 통신요금을 자동이체 하면 가입 후 3년까지 전월 실적 30만원 이상인 경우 모든 통신사의 통신요금을 1만7천원, 전월 실적 70만원 이상인 경우 2만원 할인해준다. 단, 가입 후 37개월째부터는 6천원 할인이다. 인터넷으로 가입하고 10만원 이상 사용하면 연회비를 캐시백으로 돌려준다. 내 생애 첫 신용카드로 골랐다. 부디 지름신이 내 카드를 피해 가기를.

소비, 쪼개면 줄어들까?

이제 남은 돈은 내가 쓸 돈이다. 그렇지만 한꺼번에 두고 와장창 써버리면 결국 통장을 하나만 쓰던 시절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새해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제대로 예산을 정해서 제한적인 소비를 유도해본다. 

소비용 통장을 여러 개로 나누면 한 달에 얼마를 쓰는지 정확한 자금 흐름을 편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많은 재테크 서적이 월 단위 소비와 연 단위 소비를 분리하라고 충고했다. 후불교통카드, 자잘한 식비와 간식비, 운동 비용, 기타 용돈을 월 단위 소비용 통장에 넣기로 했다. 체크카드로 지불해서 쓰면 연말정산 때 편리하다. 나는 원래 쓰던 생활비 통장이 신한은행 계좌라 신한 네이버페이 체크카드를 새로 만들기로 했다. 전월실적 조건 없이 모든 결제금액의 1%가 네이버페이 포인트로 적립된다.

연 단위 소비용 통장은 3개로 쪼갰다. 하나는 평상시 지출하는 것들, 주로 경조사비, 계절용 옷 구매비, 기초 화장품 구매비용 예산이다. 몇 개월 당 한 번씩 사용할 돈이다. 여행, 휴가용 통장은 따로 만들었다. 연 단위 통장이 한 개 밖에 없으면 여름 한 철에 몰아서 사용하는 여행비나 휴가비로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주로 5월과 연말에 몰려 있는 가족, 친구 선물용 통장도 따로 만들었다. 의외로 연 단위로 꾸준히 지출하는 항목이다.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반드시 반려동물용 통장을 만들어 따로 일정 금액을 넣기를 추천한다. 예전에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볼 때는 우리도 그런 통장이 있었다. (지금은 한 명이 그 통장과 함께 고양이들을 평생 책임지기로 약속하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다.) 사료나 장난감, 캣타워나 마약방석은 물론이고 예방접종과 불시에 찾아오는 병치레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연 단위 소비용 통장은 주로 현금을 뽑을 일이 많은 경조사비가 포함된 첫번째 통장만 카카오뱅크 프렌즈 체크카드와 계좌를 새로 개설했다. 모든 은행 ATM기에서 수수료가 무료이기 때문이다. 오직 현금 입출금을 보고 만들었다. 나머지 통장은 새로 만들기 귀찮아서 원래 쓰던 것들로 하기로 했다. 요즘은 대포통장 방지를 위해 신규 계좌를 만들려면 최소 20일씩 기간을 둬야 한다. 최대한 만들어 둔 통장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연 단위 소비 통장은 따로 카드를 만들지 않고 필요할 때 체크카드 통장에 이체해서 쓸 예정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소비용 통장에서 돈이 남으면? 1년짜리 자유 적금을 들어 놓고 거기다 저축하라는 충고가 가장 많았다. 사실 돈이 일정하게 남는다면 예산을 줄이고 저축액을 늘리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비상금

통장 하나로 살다 보면 제대로 비상금 통장을 둘 이유가 별로 없다. 정말 돈이 없는데 갑자기 몇십만원이 필요하면 가까운 친구한테 빌려 쓰고 월급날에 갚기도 했다. 이제 그런 한 치 앞도 모르는 생활은 청산하기로 했다. 저축을 늘리기로 결심했다면 더더욱 갑자기 어딘가 다치거나, 치과 치료를 받거나, 집에 이상이 생겨서 수리가 필요할 때 비상금이 필요하다. 나처럼 자기 소비 예산을 잘 모르는 경우에도 예산에 ‘펑크’가 날 때를 대비해야 한다.

비상금 통장은 연 단위로 충전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월 단위로 계속 충전해서 일정 금액을 유지하면, 결국엔 야금야금 빼서 쓰는 제 2의 월 단위 소비용 통장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입출금 통장 중에서 이자가 조금 높은 편인 CMA 통장을 비상금 통장으로 쓰라는 조언이 많았다.

이제 월급이 들어오면 알아서 자동이체로 각 통장에 돈이 들어가고, 급여통장에는 거의 돈이 남지 않을 것이다. 사실 통장을 쪼개는 건 시작이다. 시작은 반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짜 놓은 예산 속에서 얼마나 잘 생활하는지 달려있다. 숨막힌다고 생각하면 비상금에 손을 대거나 예산을 좀 더 늘려야 할 것이다. 저축액이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안 그랬으면 좋겠다. 어쨌든 아무 구조도 없던 황무지이자 무법지대인 내 경제생활에 뭔가 기초적인 틀을 잡았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새해부터는 내가 그어놓은 선 안에서 경제생활을 시작해보자. 구조가 단단해지면 확장 공사나 색을 칠하거나 나름대로 인테리어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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