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민낯: 협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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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민낯: 협찬 전쟁

김도민

혹독한 야근, 주말 없는 스케줄, 비정규직과 열정 페이… 패션계의 이면이 그리 달콤하지 않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섹스 앤 더시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떠오르는 화려한 겉모습도 부정할 수 없는 패션계의 일부다. 수년 째 업계에 몸담고 있는 나는 이 ‘화려함’에 대한 여러 질문을 받는다. 늘 ‘사람 하는 일 다 똑같다’고 답하지만, 사실 나는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낡은 방식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조명이 꺼진 촬영장, 패션계의 민낯은 정겹기마저 한 재래식 ‘협찬 전쟁’의 연속이다.

협찬이 뭐길래. 

협찬. 일정 기간 대여하고 반드시 반납하는 게 룰이다. 알려진 것처럼 빌린 아이템을 ‘소유’하는 일은 극히 드문 특별한 경우다. 협찬의 영역도 무한하다. 연예인을 예로 들면 시상식 드레스부터, 출연 중인 드라마에서 걸친 옷 뿐 아니라 브랜드 행사, 영화 시사회에 참석할 때도 협찬을 통한다. 물론 ‘공항 패션’으로 소비되는 모습도 협찬의 결과물이다. 대중에 보여지는 대부분의 순간, 협찬이 빠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왜 ‘전쟁’이라 표현하는가? 

패션 잡지는 매달 비슷한 날짜에 새로운 호를 발간한다. 즉 많은 잡지사가 비슷한 주기로 마감을 치룬다는 말. 비슷한 시기에 기획 회의를 하고, 화보 촬영을 하기 때문에 협찬이 필요한 시점도 서로 겹친다. 매 시즌마다 트렌드는 정해져 있고, 이를 주도하는 ‘대세’ 브랜드의 옷도 정해져 있다. 고가의 제품 특성 상 여러 사람의 손을 타고 낡거나 분실될 염려가 있는 협찬 용 샘플 아이템은 수량이 하나뿐인 게 대부분. 많은 이가 옷 한 벌을 비슷한 시기에 빌리려 하니 경쟁은 치열할 수 밖에 없다. 한날 한시에 수십 벌의 드레스가 등장하는 시상식 날이라면? 그야말로 전쟁이다.

협찬은 어떻게 받는가.

이 얘기를 하자면 지인과의 일화가 생각난다. 식사 중 꺼낸 파우치 속 작은 쪽지 한 장 때문이다. 

“1-2-3. A. 김도민. B. 홍길동 010-XXXX-XXXX” 

‘대체 이게 무슨 암호야?’라고 묻는 지인에게 협찬 시스템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아이템을 빌려주는 곳은 명품 브랜드부터 독립 디자이너의 작은 작업실까지 다양하다. 유명 해외 명품 브랜드는 국내 지사 홍보팀에 ‘쇼룸’을 갖추고 있다. 본국에서 매 시즌 촬영을 위한 샘플을 보내주면 홍보팀이 직접 관리한다. 쇼룸의 담당자는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협찬을 의뢰해오는 이들과 소통한다. 이 정도 규모의 팀이 없거나 업무를 병행할 여력이 없는 대부분의 브랜드는 ‘홍보 대행사’에게 협찬을 비롯한 다양한 홍보 업무를 위탁한다. 국내외 패션 브랜드 뿐 아니라 디저트나 문구류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브랜드가 홍보 대행사를 찾는다. 

다시 돌아와 쪽지의 암호를 해독하면, 1-2-3은 각각 대여, 촬영, 반납 일자를 뜻한다. A는 협찬 의뢰자인 ‘김도민’이 속한 회사 명(혹은 담당하는 연예인의 이름)이다. B는 촬영 컨셉, 즉 이 아이템을 빌리는 용도다. 홍길동은 대여와 반납을 담당할 ‘김도민’ 팀의 어시스턴트다. 종합해보면,

저는 A매거진의 에디터 김도민입니다. B를 주제로한 패션 화보를 찍을 예정인데요, 이 옷을 빌리고 싶어요. 9월 1일에 빌리러 와서 2일에 촬영하고, 3일에 돌려드릴게요. 빌릴 스케줄이 된다면 길동이에게 연락주세요. 길동이가 옷을 가지러 올 거예요.

가 되겠다. 이 홀딩 딱지는 앞서 말한 홍보 대행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행어 가득 아이템이 채워진 홍보 대행사의 쇼룸 한 켠엔 룩북이 마련돼있다. 룩북은 해당 대행사에서 위탁 받은 다양한 브랜드의 협찬 가능 아이템을 사진으로 정리한 책자다. 에디터,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등 협찬을 위해 홍보 대행사의 쇼룸을 찾은 이들은 수 십 권에 달하는 룩북을 한 장씩 넘기다가 필요한 아이템을 발견하면 사진 위에 딱지를 붙인다. 샘플은 매달, 빠르면 매주 새롭게 교체되기 때문에 자주 방문해 룩북을 살펴볼수록 필요한 아이템을 얻기 수월하다. 인기가 높은 아이템은 룩북의 사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딱지로 뒤덮이기도 한다. 쉽게 말해 ‘찜’ 하는 거다.

물론 딱지를 붙이는 자가 있다면 ‘떼는 자’도 있다.

협찬 업무가 마감된 매일 저녁 딱지를 순서대로 떼어 촬영 스케줄과 순서를 정리하는 게 떼는 자의 몫이다. 이는 홍보 대행사에서 맡은 각 브랜드를 담당하는 막내 직원들의 일이다. 이 방식은 십 수년 전부터 변함 없이 이어져 온 국내 패션업계의 전통적인 협찬 방식이다. 매우 공평한 경쟁 방법이자, 낡은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촌각의 유행을 좇는 자들이 손으로 적은 딱지를 들고 행어 앞에서 ‘찜’하고 있는 모습을 누가 상상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라 예외도 있다. 문지방이 닳도록 수 년 동안 내 집인 듯 ‘남의 회사’인 홍보 대행사에 드나들다 보면 자연스레 친분도 생기고, 끈끈한 유대감이 생기기 마련. 인기가 많아 도저히 낄 수 없는 아이템의 스케줄에 넣어 달라며 조르다 보면 슬쩍 이름을 올려주기도 한다. 실제로 업계사람들과의 친분은 원활한 촬영을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친한 친구를 만난 듯 수다를 떨고 친분을 나누는 것은 패션계의 정겨운 일상이자 빼놓을 수 없는 업무인 셈.

흔히 ‘급’이라 표현하는 것도 존재한다. 

어떤 브랜드는 연예인이 누군지에 따라 가려가며 협찬을 하고, 어떤 브랜드는 전문 패션 모델이 아닌 연예인이나 일반인에게 옷을 빌려주지 않는다. 잡지의 인지도나 성향에 따라서도 협찬 여부가 갈리기도 한다. 금전적 거래도, 빌려주면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계약도 없이 제공하지만 입는 사람은 엄연히 브랜드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것. 협찬의 조건이 까다로운 것은 입어봐야 매력을 아는 상품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지, ‘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무례한 태도가 아니다.

패션계의 민낯은 이렇다. 어제 본 드라마 속 여배우의 ‘억’소리 나는 패션, 뉴욕 야경을 배경삼아 찍은 패션 화보는 여러분과 다를 바 없는 ‘개미’들의 발품과 너스레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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