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라는 윤리적 계기, 아렌트와 슬로운

알다영화여성 주인공

‘여성’이라는 윤리적 계기, 아렌트와 슬로운

유희

일러스트레이터: 솜솜

독립된 결정이 직업 능력의 핵심을 이루는 창작자나 전문직 종사자의 경우, ‘여성’이라는 라벨은 득일까, 실일까? 터놓고 말하자면, 대부분의 경우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을 것 같긴 하다. 잃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너무 진저리치도록 잘 알 테니,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한나 아렌트 (2014,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바바라 수코바 주연)
미스 슬로운 (2017, 존 매든 감독, 제시카 차스테인 주연)

<한나 아렌트>는 실존 인물인 성공한 여성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로 유대인을 이송하는 일의 총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문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는 과정을 밀착해 그린다. <미스 슬로운>은 총기 규제 법안을 둘러싼 로비 전쟁에 뛰어든 수완 좋은 로비스트의 이야기다.

두 영화는 아렌트와 슬로운이 커리어의 정점에 서 있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아렌트는 뉴욕 지성계에서 주목받는 ‘유럽계 철학자’로 <뉴요커>에서도 그의 글을 ‘황송하게 받아가는’ 스타 지식인이다. 한편 슬로운은 거물 정치인도 찾아와 선전을 부탁하는, 실패를 모르는 로비스트이다.

아렌트는 형식적으로는 살인 혐의를 받은 ‘개인’으로 재판에 부쳐졌지만 실상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초래한 나치 전범의 ‘본보기’로 ‘심판’의 대상이 된 아이히만을 관찰하고 그를 ‘악마화’하고 싶어 하는 유대인 사회와 뉴욕 지성계의 기대에 어긋나는 글을 발표한다.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을 넘어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이 벌어진 메커니즘을 해명하고자 한 글은 대중과 다수의 지식인에게 나치 친화적이고 희생자인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글로 오독된다.

슬로운은 총기 규제를 둘러싸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진영의 로비를 의뢰받는다. 일을 거절하려 하지만 상사에게 해고 위협을 받고 고민하던 중 승률이 극히 낮은 상대 진영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을 결심한다. 슬로운의 수완 덕에 캠페인은 성공하려는 듯 보이지만, 결국 승기가 상대방에게 기울고 팀원들은 슬로운이 비윤리적인 방식을 택해왔다고 비난한다. 설상가상으로 슬로운은 부정부패 관련 혐의로 청문회에 부쳐진다.

성공해도 '주변'에 위치한 여성

두 영화는 성공한 여성이 다수와 대립하는 곤경을 다루고 있으며, 법과 선악, 혹은 법과 정의의 관계를 다룬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의 아렌트와 슬로운은 각각 비상함과 직업적 수완을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 ‘정의’를 성취하는 인물이다. 이 유능한 여자들이 처한 곤경의 핵심은 이것이다. 직업상의 안전한 ‘성공’과 직업적 윤리가 대립하는 순간. 그리고 이 문제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는 곧 각각의 인물이 인간으로서, 직업인으로서 성숙하는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와 <미스 슬로운>은 전문가로서의 직업적 충실함이 ‘무난한 성공’과 공존할 수 없는 순간, 원칙이나 신념으로 ‘집단과 상식’을 돌파하는 여성 영웅을 제시한다. 이미 충분히 인정받는 지위를 누리는 순간, 보장된 안락한 미래를 집어던지고 타협을 거부하는 장면. 사회인에게 이보다 용기가 더 필요한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결단은 여성으로서 그들이 동류 집단 내부에서 처하게 되는 ‘주변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성공한 여성’이라더니 무슨 소리냐고? 실력으로는 비할 사람이 없는데도, 아렌트는 자신의 글을 제대로 읽을 의사도, 능력도 없는 동료들에게 인신공격을 당하고 슬로운은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사람의 ‘냉철함’은 뛰어난 자질로 평가받는 대신 ‘문제있는 성격’으로 격하된다. 여성으로서의 지위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성이 태생적으로 도덕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불리한 위치’에 처함으로써 ‘사유’와 ‘윤리적 판단’이라는 측면에서 이점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무리에 속해 안정감을 약속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을 법한 소망인데, 일단 그렇게 일원이 되어 일체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논리에서 벗어나 생각하거나 집단의 의사를 거스르기가 어려워진다. 그 대가로 어렵게 손에 넣은 ‘안정감’을 반납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우위에 서고도 주류 집단에서 배제된 자는, 어쩌면 잃을 게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집단 논리에서 빗겨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안일주의를 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내부자’이면서 ‘내부자가 아닌’ 두 겹의 시선이 주변 사람들로서는 예상하기 어려운 독창적 사고방식을 가능케 한 것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경험한 비극적인 과거, 즉 포로수용소 경험과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의 배신에 깊이 영향을 받아 사유를 전개하지만, 유대 ‘민족’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악’에 관한 보편적이고도 독창적인 사상을 제출한다. 슬로운은 ‘목적 달성’을 목표로 삼는 로비스트의 직업적 본성을 거스르고 ‘대의’를 찾아 자신의 경력 전부를 건 결단을 내린다. 영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영웅적 선택이기는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비범함을 근본적으로, 전략적으로 가능케 한 것은 이들의 ‘사회적 소수성’이다. 그 불리한 입장이 강요한 부단한 노력과 고민과 판단이, 다시 말하면 그 수고로움이 그들을 ‘위대한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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